외전 8화
이안은 상상도 못 했다.
설마 제게 그런 괴상한 축복이 걸려 있을 줄이야. 좋아하는 상대와 마음이 통하면 꼬리가 보이는 축복?
듣도 보도 못했다.
“왜, 왜 꼬리인 거예요?”
당황한 이안이 버벅거리며 묻자 아무스는 자랑스럽게 꼬리를 움직였다.
“눈에 잘 띄니까. 그 정도는 보여야 네가 놀라서 내게 올 것 같았거든. 내 말이 맞았지? 사랑이 맞지?”
아무스는 금방이라도 그레이에게 뛰어가 제 말이 맞지 않았냐고 떠들 것처럼 보였다.
“사람 감정이 장난이에요? 왜 그런 일을 벌여요?! 알, 알지도 못하면서!”
스스로도 몰랐던 제 마음을 아무스가 알아차렸기 때문인지 이안의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하지만 아무스의 표정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장난도 아닌 마음을 왜 모른 척하고 살았지? 인간의 생은 턱없이 짧은데. 아깝지 않나?”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무스의 크고 강한 꼬리는 여전히 바람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인간의 생은 턱없이 짧아서, 자기 꿈을 이루기에도 부족해요.”
“그래? 네 꿈은 뭔데?”
“제 가게를 여는 거요.”
“그럼 이미 이룬 거 아닌가?”
“성공하고 싶어요. 아버지랑 셸먼에게 보란 듯이 크게요.”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한 성공이 정말 너의 꿈이라고 할 수 있나? 난 잘 모르겠군. 인간. 허영은 쓸데없는 감정이야.”
“그래도 저는…… 너무 억울했어요. 그간 열심히 노력해 왔는데 그걸 무시하는 아버지의 처사가, 아무렇지 않게 동생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게…… 좋은 의도였다고 해도 저한텐 상처가 될 수 있잖아요. 힘들었다고요.”
앞에 있는 이가 사람이 아닌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인지, 이안은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하게 제 속내를 털어놓았다.
아무스의 덤덤한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아무스는 제 꼬리로 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리 앉아 봐라. 인간.”
“저 이안이요.”
“그래. 이안.”
이안이 앉고 난 뒤에도 아무스는 별말이 없었다.
“저, 왜 앉으라고 하셨는지…….”
“보통은 이렇게 앉으면 자기 얘길 하더군. 남한테 못 할 얘기도 털어놓고 말이야.”
“대체 누가요?”
아무스는 무언가를 회상하듯 아무것도 없는 정원의 먼 저편을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내가 언덕에서 산을 기다리던 때.”
용의 시선을 따라 정원의 먼 곳을 보고 있던 이안의 눈동자가 다시 그를 향했다.
“이렇게 가만히 석상처럼 앉아 있으니 인간들이 와서 말을 걸었다가, 내게 나쁜 뜻이 없어 보인다 싶으니 속내를 털어놓더라고. 인간들의 이야기를 한참 들었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와 아무스의 긴 머리카락을 천천히 스치고 갔다.
제게로 불어오는 바람에 이안이 눈을 살짝 감았다 뜨자 아무스의 세로로 긴 동공이 반으로 접혀 있었다.
“작은 인간들은 어쩜 그리 고민이 많은지. 나는 고민을 들어 주는 것엔 이골이 나 있으니 말해도 된다. 인간.”
“……이안이라고요.”
“이안.”
이안은 왠지 모를 쑥스러움에 잔디를 손가락으로 툭툭 잡아 뜯으며 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렸을 적부터 아주 열심히 일했다고. 처음엔 아빠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랬지만 나중엔 그게 제 천직이라 느꼈다고.
당연히 백화점을 물려받는 건 첫째인 자신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골드먼트 남작과 결혼하라는 아버지가 미웠으며, 남작이 청혼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아버지는 후계로 자신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가끔 했었다고.
괜히 제 딸이 귀족이 될지도 모른다는 헛바람이 든 게 분명하다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아무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고민 잘 들어 준다면서요.”
“듣기만 해 봤단다. 내가 언덕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시절에는 단 하나의 목표 빼고는 삶에 흥미가 없어서.”
“그러니까요. 저도 지금 하나의 목표 빼고는…….”
“이안.”
샛노란 눈동자가 저를 꿰뚫을 듯 바라봤다.
“지나간 일 때문에 오늘을 낭비해선 안 돼.”
“네?”
아무스가 꼬리를 이용해 땅에 가로로 긴 작대기를 그었다.
정원사가 봤다면 ‘아이고, 용 님이 또 정원을 조지네!’ 하고 울었을 정도로 긴 작대기였다.
아무스는 왼쪽부터 세로로 하나씩 획을 그으며 말했다.
“자, 인간. 태어났고.”
“네.”
“아버지한테 칭찬을 들어서 기분이 좋았고.”
“네.”
“아버지가 백화점을 더 작은 인간에게 준다고 했고.”
“……네.”
“산을 만나서 너는 솔리안의 단주가 되었지.”
“네.”
“그 상단은 지금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상단이 되었고. 곧 모든 분야에서 제일 크게 사업을 하는 상단이 될 거야.”
“네, 하지만 더 크게…….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이미 베르고의 공녀가, 이 세계의 마지막 용이 함께하는 상단이라는 꼬리표가 있다. 사실 네가 골드만두와 결혼을 하든, 이혼을 하든 사람들은 신경 안 쓸 거야. 축하는 하겠지.”
“아.”
저 자신의 문제에만 신경 쓰느라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무스가 세로로 그은 작대기는 이제 가로선의 반의반 정도 온 상태였다.
그때 갑자기 아무스가 남은 선을 빗자루 쓸 듯 꼬리로 휙휙 쓸어서 지워 버렸다.
“아앗……!”
“과거로 돌아갈 힘도 없는 나약한 인간이면서 왜 자꾸 과거를 붙잡으려 하지? 오늘 죽는다면 남은 오후 동안엔 뭘 하고 싶어?”
이안은 미래는 거칠게 지워진 채 지금까지의 제 삶이 축약되어 있는 선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오늘 밤에 죽는다면, 제 인생의 마지막 저녁에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요.”
“지금 해. 인……안.”
“이안이요, 이안. 공녀님 이름은 제대로 외우신 거예요?”
“그럼. 산, 지윤, 솔레아.”
이안은 픽 웃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서 엉덩이에 묻은 잔디를 탈탈 털어 냈다.
속이 개운했다.
“아무스 님.”
“왜.”
아무스는 정원사의 눈치를 살피는지 엎어 놓은 잔디를 다시 깐 뒤 꼬리로 툭툭 다지고 있었다.
“오래 사신 분이라 그런지 확실히 뭔가 다르시네요.”
“……솔레아도 꽤 오랜 시간을 어둠 속에서 보냈어.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동년배인 셈이지. 비록 나는 죽지 않고 살아와서 나이가 많지만, 그래도 과거를 공유하는 사이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해서 사랑해선…… 안 될 수도 있지. 그래도 산이랑 나는…….”
“저 별말 안 했어요. 그냥, 감사하다고요.”
“아. 그런 뜻이었나. 그럼 감사한 김에 조금 더 감사해 해 봐.”
“예?”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아무스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갑자기 시야가 뒤틀렸다.
“악!”
이안은 괴성을 지르며 어딘가로 떨어졌다.
새하얀 침대보 위였다.
“악?! 무, 무슨! 여기 어디지?”
주변을 둘러보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방이었다.
그때, 이안이 깔고 앉은 이불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헙!”
이안은 숨을 들이켜며 재빨리 몸을 피했다. 이불 속에서 얼굴을 드러낸 사람은 골드먼트 남작이었다.
“……남작님?”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지만.
어쨌든 골드먼트 남작이었다.
“얼굴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이안은 움찔 멈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남작을 매몰차게 걷어찼으니까. ‘거절’이라는 말로 포장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매정함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화풀이였던 것 같지만.
아무래도 아무스가 남작에게 사과를 하고 마음을 고백하라고 여기로 보낸 게 분명했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이안이 당황해하고 있는데, 남작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또 꿈입니까.”
“……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또 나를 거절할 거죠. 내가 너무 눈치가 없어서, 내가 타이밍을 못 맞춰서, 내가……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서. 갖은 이유를 대며 또 나를 밀어낼 거죠.”
“그게 무슨 말…… 아니, 그리고 남작님은 약혼녀가 있으시잖아요.”
“네? 약혼녀라니요? 대체 누굴 말하는 겁니까. 내 평생 동안 당신만을 좋아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데.”
갑작스러운 고백에 이안의 두 볼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래도 청혼을 거절한 지 몇 년이나 지났잖아요……. 그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으셨어요?”
해리 골드먼트는 남작가를 이어야 할 유일한 후계자였다.
그러니 약혼녀가 있다고 한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해리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난 당신 말고는 없단 말이에요, 이안. 당신밖에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요……. 당신 말고는 싫어요.”
남작이 말을 잇는 내내 그의 에메랄드빛 녹색 눈동자에서 물방울이 맺혔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눈물이 작은 보석처럼 동그랗게 떨어져 이안은 홀린 듯 남작을 바라봤다.
약혼녀는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초상화보다 더 잘생겼잖아?
또 나타난 귀와 꼬리는 은은하게 빛나는 미모에 가려 눈에 뵈지도 않았다.
이안이 골드먼트 남작의 얼굴을 관찰하느라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지난 며칠간 계속 울었는지 얼굴에 핏기가 없고 낯빛이 파리했다.
물론 그 덕에 평소보다 더 처연해 보여 어딘지 모르게 심금을 울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병실에 찾아온 사람은…….”
“그녀는 내 보모였고, 지금은 남작저의 하녀장이에요. 이안, 제발…… 꿈에서만은 날 밀어내지 말아요.”
남작은 이불보를 쥐고 있는 이안의 손 근처로 제 손을 뻗었다.
놀란 그녀가 저도 모르게 움찔하자 남작은 이안의 손 옆에 있는 이불을 꼭 움켜쥐었다.
꿈에서조차 그녀의 손을 차마 잡지 못해 이불이라도 그러쥐고 있는 듯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나를 해리라고 불러 주면 안 될까요? 늘 그랬듯 냉정한 얼굴이어도 좋아요. 그냥…… 서로 이름을 부르고 싶어요.”
남작의 눈물이 그 자신과 이안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해리.”
해리는 눈물 때문에 벌게진 눈가를 고이 접으며 빙긋 웃었다.
“……이안.”
아직도 꿈인 줄 아는 듯했다.
왜 이렇게 현실 분간을 못 하나 했더니 침대 옆 협탁 위에 술병이 놓여 있었다.
“해리. 이 말 명심해요. 난 술 마시는 남자가 싫어요.”
“그래요?”
“네. 장사를 하다 보면 술주정하는 손님들을 자주 보거든요. 그래서 술 냄새 나는 남자는 딱 질색이에요. 지금 해리에게선 술 냄새가 안 나지만…… 왜지? 요정인가? 아무튼, 앞으로는 속상한 일이 있어도 되도록 술은 마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나랑 연애할 거면 말이에요.”
해리가 방글방글 웃으며 답했다.
“당신이랑 사귈 수만 있다면 술이야 얼마든지 끊을 수 있습니다.”
“……해리, 내가 못 한 말이 있는데 나중에, 그, 저기, 당신 술 깨면…… 할게요.”
막상 말을 하려고 하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이안은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괜히 더운 기분에 셔츠 깃을 잡고 팔랑팔랑 흔들었다.
해리는 다시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머리를 이안 쪽으로 돌리고 몸을 웅크려 누운 해리는 눈을 감고 시를 읊듯 중얼거렸다.
“이안. 처음 봤을 때부터, 어릴 때 백화점에서 길을 잃었을 때요. 내가 귀족인 걸 알아보고 당신이 나를 어머니한테 데려다줬을 때. 기억 안 나겠지만……. 그때부터 당신 좋아했어요. 똑똑하고, 착하고, 예쁘고, 차갑고……. 힝, 너무 차가워요. 좋아해요, 이안. 좋아해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살아 계셨을 때 당신 좋아하셨는데……. 똑똑한 아가씨라고 하셨는데……. 내가 못나서 고백도 해 보기 전에, 흑. 차가워. 아이, 차. 손이 시려워. 꽁. 마음도 시려워, 꽁.”
해리는 훌쩍거리며 이불을 끌어안고 잠에 빠져들었다.
이안은 당장에라도 해리를 깨워서 키스를 갈기고 싶은 걸 꾹 참아야 했다.
이렇게 귀여울 거면 진작 귀여웠어야지. 제 앞에선 그렇게 점잖을 떨어 놓고 혼자 있을 땐 이랬단 말인가.
지나가 버린 세월이 아까워서 이안은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아니다. 어차피 오늘이 되기 전까진 무슨 수를 썼어도 해리를 좋아하는 걸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안 되지, 안 돼. 지나간 일 때문에 오늘을 낭비하지 말자.”
이안은 제 눈에만 보이는 밀가루 반죽 같은 해리의 귀를 매만지며 속삭였다.
“푹 자고 일어나요, 해리.”
몇 시간 뒤, 해리 골드먼트 남작의 방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정말, 정말입니까?”
“네. 부끄럽지만…….”
“아! 아아, 내가 또 꿈을!”
“꿈 아니에요! 또 자기만 해 봐요. 내가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이, 이안. 이안.”
해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방 안에서 종종거리자 소리를 들은 사용인들이 방문 앞으로 달려왔다.
“남작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다들 물러가!”
아무리 연애를 한다고 해도 결혼도 하지 않은 미혼의 남녀가 한방에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이안은 해리의 방에서 몰래 저녁을 함께 보내고 새벽녘에 귀가했다.
그와 함께한 저녁 식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