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그네를 달면 다시 네 머리를 발로 차 주겠다고 셸먼에게 엄포를 늘어놓은 뒤, 이안은 조심스럽게 공녀님에게 다가갔다.
“공녀님. 여쭤볼 게 있어요.”
“아. 미안해! 이안!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아버님이 제발 비밀 지켜 달라고 사정을 하셨거든. 속여서 너무 미안해.”
“그건 이제 괜찮아요.”
“그래? 그럼 뭐가 궁금해?”
“혹시 제게 저주가 걸려 있나요?”
“저주?”
공녀님은 보라색 눈을 빛내며 이안을 찬찬히 살펴봤다.
눈꼬리가 올라간 큰 눈이 저를 꿰뚫을 듯 바라봤다.
“없는데.”
“네? 그럴 리가요.”
“저주 없어.”
“있었는데?”
“없어.”
“그러니까 있었다가?”
“그냥 없어.”
“원래는 있었고?”
“없다고.”
솔레아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없어. 그냥 없어. 그런 사특하고 요상한 기운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그럼 진짜로 사람한테 꼬리가 달려 있다는 건가요?
이안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을 꾹 참았다.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다.
이런 걸 지금 물었다가는 친절한 공녀님이 ‘당장 쉬어야 한다.’며 백화점 개업을 미룰지도 몰랐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요새 꿈자리가 안 좋아서…… 여쭤봤어요.”
이안은 말을 돌리며 후원으로 들어섰다.
온갖 색의 꽃을 심어 놓고, 여기저기 벤치를 놓아두어서 산책하기에 좋았다. 공녀님이 사 놓은 백화점 부지가 굉장히 넓은 덕이었다.
역시 그네를 달기에는 아까운 아름다운 정원이지.
이안은 한동안 말없이 후원을 거닐었다.
제 바로 뒤에서 아버지와 셸먼이 어색하게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침묵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아버지가 셸먼에게 말을 걸었다.
“……셸먼. 후원에 그늘막을 설치할 걸 그랬나?”
“공녀님이 사람은 자연광을 맞아야 비트가 생긴다고 하시던데요. 그리고 후원엔 나무도 많으니까 괜찮다고 하셨어요.”
“공녀님이 정말 비트라고 그러셨니?”
“……아니었나?”
이안은 공녀님이 앉아 있는 벤치 쪽을 슬쩍 바라봤다.
후원의 한가운데에 있는 넓은 벤치에 라트엘, 돈과 나란히 앉아 있던 공녀님은 셸먼의 말을 듣고는 픽 웃었다.
그러곤,
“드랍 더 비트. 뿌이뿌이뿌이.”
라는 이상한 주문을 외우며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음악을 마법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라트엘이 눈살을 찌푸리며 공녀님을 노려봤다.
“으. 공녀님. 교양 떨어집니다. 이런 요란한 음악은 백화점에 어울리지도 않고요.”
“그래도 아가씨의 마법은 멋있어요. 괜찮아요. 아가씨. 멋져요.”
이안은 제 동생의 말실수를 놀리는 공녀님 때문에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아야 했다.
아버지 역시 상황을 눈치챘는지 헛기침을 한 후 셸먼에게 말했다.
“……셸먼. 아빠가 너한테 최대한 늦게 백화점을 물려주도록 오래오래 해먹어 보마. 건강하게 오래 살게.”
“아빠. 저 그래도 계산 잘하고, 처세술도 좋아요.”
“어쩜 그것만 좋니. 장사를 하려면 다 잘해야지.”
“그럼 누나한테 백화점 물려주지 그러셨어요?”
셸먼의 말에 앞서 걷던 이안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아빠가 백화점을 키울 당시에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 여자면 대부분 무시하곤 했어. 물론 지금도 약간은 그렇긴 하지만…….”
“누나가 잘하겠지, 뭐. 괜찮을걸요.”
늘 낙천적인 셸먼의 말에 이안은 픽 웃으며 뒤돌아봤다.
“셸먼. 넌 그게 문제야.”
“내가 뭐! 또 시비 거네.”
“장사를 하려면 언제나 최악의 수를 내다볼 줄 알아야지.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게 인생인데.”
“나도 그 정도는 내다볼 수 있어. 누나가 어련히 잘할까!”
결국 이안은 웃음을 터뜨리며 어느새 저보다 훌쩍 커 버린 셸먼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쓰다듬었다.
“고맙다. 셸먼.”
“뭐야. 왜 이래.”
“아빠도요. 감사해요.”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이안은 토니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늘 크고 넓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등은 어느새 꽤 굽어 있었다.
“근데 누나. 그늘 아래 있으면 몸을 건강하게 하는 비트가 안 나온대.”
공녀님이 또다시 ‘헤이. 디제이. 드랍 더 비트.’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괴상한 음악이 다시 후원을 가득 채웠다.
라트엘이 격 떨어지는 음악이라며 공녀님을 나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토니는 둥둥 울리는 커다란 음악 소리가 약간 줄어들고 난 후에야 이안에게 말했다.
“집에 한번 오렴, 이안. 네가 갑자기 나가 버려서 집이 휑하구나.”
“바쁜 거 좀 해결되고 나면요. 선물 사 들고 갈게요.”
“그래. 네가 오고 싶을 때 언제든 와 주렴.”
토니는 제힘으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자랑스러운 딸을 힘 있게 다독였다.
어느새 아침 해가 환하게 떠 있었다.
이안은 공녀님이 공작저로 돌아가기 전 슬쩍 다가가 물었다.
“공녀님.”
“응?”
“꼬, 꼬리가 있는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버지와 셸먼이 훼방 놓는 줄 알고 괜히 죄 없는 골드먼트 남작에게 불같이 화를 내 버렸다.
제가 저주에 걸린 게 아니라면, 골드먼트 남작님이 저주에 걸린 게 분명했다.
꼬리가 나타나는 저주라니.
공녀님은 위대‘했던’ 후레자식 마법사 이달론을 처치한 대마법사니까 분명 꼬리와 관련된 저주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공녀님은 제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머리를 긁적였다.
“꼬리 달린 남자는…… 매력적이지.”
“네?”
공녀님의 얼굴이 머리카락 색과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귀…… 귀엽고, 감정도 눈에 훤히 보이고, 사랑스럽고, 멋있잖아.”
“……에이, 그래도 꼬리가 달리면 안 되죠. 멀쩡한데 꼬리가 휙휙 움직이면 조금 그렇잖아요.”
“꼬리가 뭐가 어때서! 꼬리 흔들리는 게 얼마나 귀여운데. 네, 네가 뭘 모르네!”
잘 익은 토마토처럼 얼굴이 빨개진 공녀님은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소리쳤다.
“왜, 왜 나한테 그걸 묻는 거야? 앤이 시켰어? 감정 표현을 더 하래? 나도 내, 내 나름대로 하고 있어. 꼬리도 예쁘고 다 예쁘다고 자주 말한단 말이야……! 됐어!”
영문 모를 소리를 뱉던 빨강 공녀님은 마법을 이용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잠시 후, 백화점에서 나온 라트엘이 이안에게 물었다.
“우리 아가씨 어디 갔습니까?”
“……그냥 가셨어요.”
“하. 이왕 갈 거면 같이 가지. 알겠습니다.”
라트엘은 마차를 불러 홀로 터덜터덜 공작저로 돌아갔다.
가족들도 돌아가고 사무실에 혼자 남은 이안은 머릿속으로 조용히 정리를 시작했다.
Q. 나는 저주에 걸렸나?
― 아니다. 공녀님이 아니라고 하셨음.
Q. 골드먼트 남작님이 저주에 걸렸나?
―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며칠 전 공녀님이 남작저로 보낸 의술사에게서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타박상 말고는 큰 이상이 없다는 뜻이겠지.
Q. 그럼 내가 미친 건가?
― 그럴 수도 있음. 하지만 남작님에게 꼬리가 보인다는 것 말고는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이상도 느끼지 못했다.
혹시나 싶어서 이안은 사무실 문을 열었다.
마침 돈이 1층에서 매대에 올라가는 물품을 체크하는 중이었다.
“돈!”
“네!”
“혹시 내가 미친 것처럼 보이나요? 요 며칠 그런 기미를 느낀 적이 있나요?!”
“아니, 아닌데. 무슨, 왜, 아닙니다! 사장님은 지극히 정상이십니다! 그리고 일 처리에 능하시고! 눈치도 빠르시고! 맺고 끊는 게 칼같고! 그, 그리고! 배우고 싶은 점이 많고……!”
“됐어요! 아부는 하지 말아요! 그런 사회생활은 안 해도 돼요! 아무튼 알았어요!”
이안은 다시 사무실로 들어와 앉았다.
Q. 내가 무의식적으로 골드먼트 남작님을 사랑스러운 강아지로 보고 있었던 건가?
― 그런 취미는 없다. 사람에게 강아지 꼬리가 달려 있다니. 나는 변태가 아니야.
이안은 눈을 감고 조금 더 깊은 내면의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Q. 그럼 골드먼트 남작님을 사랑스럽다고 여겼나?
― 아니다. 손님으로 대했다.
Q.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나?
― …….
이안은 감고 있던 눈을 서서히 떴다.
있었다.
이안은 제게 청혼을 거절당한 직후, 백화점에 찾아온 골드먼트 남작에게 해코지를 당할 거라 생각했었다.
감히 귀족의 자존심을 건드렸으니까.
하지만 골드먼트 남작은 멀찍이서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 이후로도 늘 그랬다.
이안이 부담스럽지 않을 거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시간 동안만 이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가곤 했다.
그리고 그는 그때마다 진한 남색 스카프를 매만지기도 하고, 작은 구두를 살펴보기도 했다.
처음엔 새로운 애인이라도 생겼나 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안이 머리 자르는 걸 잊어 검은 단발머리가 어깨를 넘기도록 자라나 있던 어느 날, 미미하게 달아오른 발간 얼굴로 머리를 묶는 끈을 구경하는 걸 보고서야 알았다.
해리 골드먼트는 매번 제게 어울릴 만한 것들을 살펴본 것이었다.
스카프, 굽이 낮은 구두, 머리끈, 얇은 팔찌, 새로 나온 만년필과 향이 독하지 않은 향수 등.
그때, 처음으로 그를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마음 깊은 곳의 서랍에 담아 놓고 잠가 버렸다.
제 선택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귀족 부인으로 사는 것이 제 삶의 목표는 아니었으니까.
그때 무심코 열어 버린 서랍 속에 들어 있던 감정이 제게 물음을 던졌다.
Q. 그럼 골드먼트 남작이 귀족이 아니었다면 사랑할 수 있었을까?
― ……무의미한 전제다.
이안은 눈가를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상력이 과했다. 평소엔 이렇게까지 쓸데없는 생각을 깊이 하지 않는데.
갑자기 골드먼트 남작에게서 꼬리가 보이는 바람에 당황해 버렸다.
차라리 돈에게서 귀나 꼬리가 보였다면 ‘어이없는 장난에 당했나 보네.’ 하면서 넘겼을 텐데.
남작님은 그런 장난에 당할 분이 아니니까. 그렇게 선한 사람을 누가 욕한단 말인가. 그저 조금 걱정되는 것뿐이다.
이안은 어느새 ‘골드먼트 남작님’을 특별하게 여기고 있었다.
물론 본인은 아직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안은 혹시 저주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골드먼트 남작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솔레아 아가씨가 모르신다면 용 님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무스는 인간 상태로 공작저 정원의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었다.
아무스는 이안을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세요?”
“미안하지만 나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어. 산 말고는.”
산이라면 솔레아 아가씨의 전 전생에서의 이름이라고 했지.
역대급 인외존재와 인간 소녀의 사랑 이야기 좀 들어 보라며 앤이 사람을 오가지도 못하게 붙잡은 채 눈물 콧물을 질질 흘려 가며 말해 준 적이 있어 기억하고 있었다.
“……예, 그러시겠죠.”
이안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때 아무스가 갑자기 꼬리를 꺼냈다.
“내 멋진 꼬리를 좋아해 주는 건 고마워. 하지만 나는 임자가 있다. 어린 인간.”
그제야 무슨 오해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안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꽥 소리를 질렀다.
“저도 그런 시커먼 꼬리엔 관심 없습니다! 이왕이면 갈색 털이 풍성한! 붕붕 흔들리는 강아지 같은 꼬리가 좋다고요!”
아무스가 고개를 갸웃 꺾었다가 아! 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지금 꼬리가 보이는 사람이 있나, 인간?”
“네! 혹시 아세요?”
“당연하지. 내가 축복을 걸었으니까.”
“……축복이요?”
“응. 처형이 골드만두와 자네는 사랑이 아니라고 우겨 대기에.”
설마 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꼬리가 보이는 축복인가.
무슨 그런 해괴망측한 축복이 있어.
하지만 용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안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대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대를 좋아하면, 그러니까 서로 마음이 통하면 표시가 나도록 했지. 보니까 이안 그대는 자기 마음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누구한테 꼬리가 보였나? 골드만두 맞지?”
용의 꼬리가 이리저리 휙휙 흔들리며 꽃밭을 뭉개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안의 머릿속에서는 용의 말이 느리게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대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대를 좋아하면, 그러니까 서로 마음이 통하면 표시가 나도록 했지.’
……세상에.
이안은 두 손으로 타오를 듯 붉어진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겐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이게 무슨.
이제 겨우 마음을 깨달았는데 이미 늦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