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아버지는 이 와중에도 상황을 파악하려 빠르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이안은 그런 아버지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토니가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이안의 싸늘한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결혼 안 할 거예요. 아버지가 정한 사람과는 절대 결혼 안 할 거라고요.”
“이안. 그건…….”
“안 해요! 전 성공할 거예요! 아버지보다 더! 셸먼이 물려받은 아버지의 백화점보다 더! 남작 부인이라는 칭호 없이! 저 혼자! 제힘으로 노력해서 해낼 거라고요! 골드먼트 남작은 물론이고 그 누구와도 결혼 안 해요!”
말을 뱉고 나서야 골드먼트 남작이 옆에서 듣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이안은 뒤로 돌아 베넷 남매에게 말했다.
“3일 안에 제대로 된 간판을 만들어 오세요. 만약 그러지 못하면 계약 불이행으로 위약금 청구는 물론이고, 후원도 모두 끊을 겁니다. 다시는 조각칼도, 붓도 잡지 못하게 해 드리죠.”
빠르게 말을 쏟아 낸 뒤 이안은 문 앞에 서 있는 남동생 셸먼의 어깨를 퍽 소리가 나도록 치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공기를 힘껏 들이마셔서 폐 안에 집어넣고 난 후에야 정신이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명치 속에서 뜨거운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골드먼트 남작이 이안의 뒤를 쫓아왔다.
“단주. 괜찮습니까?”
“……죄송합니다, 남작님.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에요.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대가 괜찮은지…… 그것뿐입니다.”
이안은 묻는 말엔 답하지 않고 평온한 목소리로 골드먼트 남작에게 물었다.
“남작님, 오늘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백화점에 갔는데 단주가 여기로 갔다고 해서, 잠깐 얼굴을 볼까 싶어서…….”
그제야 남작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이안은 꽃다발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남작님, 며칠 전에 저를 구해 주신 건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저는 결혼할 생각도, 남작님의 애인이 될 생각도 없어요. 혹시 제가 착각했다면…… 죄송합니다.”
골드먼트 남작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또 꼬리가 보였다.
좌우로 흔들리던 남작의 꼬리는 서서히 움직임이 느려지다가 이내 아래로 축 처지며 멈추고 말았다.
지금은 꼬리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아버지가 걸어 놓은 웃기지도 않은 저주인가 보지. 게다가 그에겐 약혼녀도 있지 않은가.
이안은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약속한 3일이 지났다.
이안은 새벽부터 백화점에 출근해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공사는 이미 마무리됐고, 매대를 채울 물품들도 거의 도착했다.
만약 오늘 베넷 남매의 간판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간판을 포기할 것이다.
공녀님께 부탁해서 영상석을 이용해 ‘솔리안 백화점’이라는 글자를 공중에 띄울 예정이었다.
혼자 힘으로 성공하겠다고 수선을 떨어 놓고 공녀님의 마력을 이용한다는 게 송구스러웠지만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잠을 못 자 뻑뻑한 눈가를 매만지며 이안이 수심에 잠겨 있는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잠깐 멍하니 굳어 있던 이안은 총이라도 맞은 듯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동도 트지 않았다.
돈에게도 말하지 않고 일찍 출근한 탓에 이 큰 건물 안엔 저 혼자뿐이었고.
이안은 무기가 될 만한 게 있나 주변을 둘러봤지만 각목은커녕, 그 비슷한 것도 없었다.
인기척을 들어 보니 한두 명이 아닌 것 같았다.
이안은 이를 악물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이야, 잘 꾸며 놨네. 멋진데.”
셸먼의 목소리였다.
‘누나 진짜 똑똑하다아!’
‘너도 내 나이 되면 할 수 있어.’
‘누나처럼은 못 해.’
‘셸먼. 침 닦아.’
‘우우…….’
‘침을 닦으랬더니 왜 줄줄 흘리고 있어.’
‘침 닦으면 옷이 더러워지잖아.’
‘아니, 그래도……! 으유, 못 살아. 이리 대 봐.’
‘히히. 누나 좋아.’
‘……말도 안 듣는 게. 웃긴.’
‘히히히.’
더 이상 가족의 밑바닥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안은 혹시라도 울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입을 틀어막은 채 문 앞에 주저앉았다.
가족이잖아.
가족이면 어떤 길을 가든 응원해 줬어야지.
서운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남작과 결혼하라고 말하던 아버지에게 실망하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자신의 앞길에 훼방을 놓을 줄은 몰랐다.
“하…….”
어쨌든 백화점을 뭉개는 걸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을 순 없었다.
이안은 눈을 부릅뜨고 몸을 일으켰다. 혹시 몰라 난로 부지깽이를 손에 꼭 쥔 상태였다.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잡았다가 이런 상황에선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당장 안 꺼져!”
“으억!”
이안의 괴성에 백화점 안에 있던 무리들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모두 양손에 뭔가를 든 채 벙찐 표정으로 이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2층 난간에 서서 부지깽이를 높이 쳐들고 있던 이안은 현관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셸먼과 눈이 마주쳤다.
“누나! 이 시간에 거기서 뭐 해! 설마 퇴근 못 한 거야?! 공녀님이 퇴근도 안 시켜 주셔?”
“공녀님 욕하지 마! 그리고 너, 너야말로 남의 백화점에 이 시간에 왜 왔어!”
“우리가 왜 남이야! 가족이지!”
“뭐?”
“저번부터 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야, 누나!”
그제야 괴도인 줄 알았던 이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크고 작은 조각상들이었다.
“누, 누구 마음대로…….”
활짝 열린 백화점 정문 밖으로 사다리가 보이고 익숙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간판 수평이 안 맞습니다. 왼쪽 조금 더 내리세요. 주문한 사이즈보다 더 크군요. 에티 베넷.”
“그, 그게 추가금을 받아서요!”
“더 화려하고요. 플럼 베넷.”
“그, 그것도 추가금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라트엘과 베넷 남매였다.
이안은 부지깽이를 내던지고 계단을 빠르게 뛰어 내려갔다.
“누나. 놀라지 마.”
너스레를 떠는 동생을 지나쳐 이안은 밖으로 향했다.
푸르스름하게 밝아 오는 여명 사이로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돈과 공녀님도.
“사장님! 여기서 주무셨습니까? 혼자 계시는 건 위, 위험합니다. 다음엔 제게 연락 주세요……!”
“이안!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이 새벽에 여기 있는 거야?”
“이안 사장님. 직원일 때는 추가 수당이 나오지만 본인이 사장이면 이런 식으로 일해도 돈이 더 나오지 않습니다. 다음엔 잘 생각하고 출근 시간을 조정하세요.”
“이보시오, 라트엘! 내 딸이 과로를 하고 있는데 잘 생각하고 출근하라니!”
“아이고, 아버님. 저쪽 가서 저랑 얘기하실까요. 우리 라트엘이 말은 험하게 해도 속이 깊습니다. 내심 걱정돼서 한 말일 겁니다. ……아마도요.”
“공녀님? 아, 아버님이라니.”
“아이고, 아버님. 따님이 어찌나 사리에 밝고 총명한지 함께 일하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 공녀님 혹시 장사를 해 보셨습니까? 말솜씨가 아무리 봐도.”
“하하. 무슨 그런 말씀을.”
공녀님이 제 아버지의 어깨를 붙잡고 구석으로 데리고 가는 뒷모습을 이안은 멍청한 눈으로 보고만 있었다.
“사장님. 우리 백화점 간판 좀 보세요.”
“어? 네?”
완전히 길가로 나온 이안은 뒤돌아 백화점의 정면을 올려다봤다.
아까 라트엘이 말한 것처럼 주문한 사이즈보다 훨씬 큰 간판이, 아니, 간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조각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솔리안 백화점’
이라는 글자가 필기체로 조각되어 있었다.
양각으로 뚜렷하고 섬세하게 깎고, 암녹색으로 칠한 글자는 어찌나 입체적인지 멀리서 보면 길게 이어진 커다란 산맥처럼 보이기도 했다.
해가 천천히 떠올라 주변이 밝아지자 간판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배경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튀어나와 있는 글자가 산맥처럼 보이는 덕에 커다란 그림 같았다.
강줄기가 흐르고, 곳곳에 솟아오른 바위와 나무들이 실제처럼 생생했다. 그리고 그 주변엔 자그마하게 표현된 집들도 있었다.
구석구석 신경 쓰지 않은 곳이 없어서 한참을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러다 이안은 간판 구석에 조각된 익숙한 파란 지붕의 집을 발견했다.
이안을 따라 길가로 나온 셸먼이 그녀의 놀란 표정을 보고 씩 웃었다.
“저거 누나는 알아보겠어? 난 지붕 색깔까진 기억 안 나는데. 누나가 지붕 위에서 나 밀었다며.”
“……내가 언제.”
“아빠가 그랬는데? 그래서 누나가 나보다 똑똑한 거래. 내가 저 때 지붕에서 머리부터 떨어지지만 않았어도 지금보다 훨씬 명석했을 텐데.”
그때 공녀에게 잡혀 있던 토니가 돌아왔다.
토니는 머쓱하다는 듯 웃었다.
“이안. 노, 놀랐니? 네가 자립하는 첫 시작인데, 아빠가 뭐라도 하나 해 줘야 되지 않나 싶어서…….”
“……그럼 위약금 얘긴 뭐예요? 베넷 남매의 작업실에서 위약금 얘길 하셨잖아요.”
이안의 질문에 에티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미 받아 놓은 일들이 있었는데 클레버 님이 그쪽 위약금 다 해결해 줄 테니 솔리안 일을 가장 우선해서 해 달라 하셨어요. 그 과정에서 클레버 님이…… 계속 더 화려하게 하라고 하셔서, 간판이 커졌습니다. 그리고 또, 백화점 내부를 꾸밀 조각이랑 그림도 추가로 주문하셨고요. 아! 추가금은 클레버 님이 이미 지불하셨어요!”
이안은 토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저한테 비밀로 하신 거예요? 제가…… 웃기지도 않은 오해를 하게 됐잖아요.”
토니는 민망한 듯 머리카락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머리를 문질렀다.
“공녀님께 미리 허락을 받기도 했고, 너를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그랬지. 그리고…….”
그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다가 굳이 먼 산을 보며 말했다.
“네게 아직 사과를 못 했잖니. 아빠가 네 꿈을 응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네게 꿈이 뭐냐고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지.”
토니는 손을 들어 제 눈가를 꾹 눌렀다가 문질렀다.
그의 눈가가 시뻘겋게 변했다.
“앞으론 네가 원하는 걸 하렴. 이안.”
손에서 땀이 나는지 토니는 연신 제 바지춤에 손을 문질렀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오해였다니.
이안은 민망함에 빨개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아버지.”
“이안. 그래도 아빠가 장사 선배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렴. 물론 이제 우리 딸이 가족 중에서 돈을 제일 잘 버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야. 하하!”
이안의 뒤에서 셸먼의 우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백화점 후원에 있는 나무에 그네 달아도 돼? 공녀님이 그거는 누나한테 물어보고 달라고 하셔서!”
“누구 마음대로 그네를 단다는 거야?”
“누나는 왜 내가 뭔 말만 하면 성질부터 내냐?”
“어울리질 않잖아! 백화점 분위기를 봐!”
“그런 걸 달아 놔야 가족 손님들이 오지!”
“클레버에는 분수대가 있는데 우리 백화점엔 그네를 달겠다고? 너 지금 일부러 그래?!”
“왜 사사건건 비료를 해?”
“비료 아니고, 비교 인마! 아빠! 무슨 저런 놈한테 백화점을 물려준다는 거예요?!”
“이안, 네가 어릴 때 그네 타다가 셸먼 머리를 발로 차서 그렇다. 그리고 셸먼도 가끔은 괜찮아.”
“가끔 괜찮은 걸로는 부족, ……제가요? 아니, 아까는 지붕에서 밀어서 바닥에 떨어뜨렸다면서요.”
“둘 다 했단다. 남매가 다 그렇지. 하하하!”
그 와중에 빨리 안으로 들어와 보라고 셸먼이 재촉하는 바람에 이안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백화점 안은 여러 점의 조각과 그림들로 꾸며져 있었다. 웬만한 전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빙긋이 웃고만 있던 공녀님이 박수를 짝 하고 치자 그저 희기만 했던 벽이 장막을 걷어 내듯 사라졌다.
그리고 화려한 벽화가 드러났다.
“짜잔! 아빠가 빚을 내서 고용한 벽화 장인, 가비에르 화가의 천장화!”
돔 형태로 된 높은 천장에는 여러 마리의 용들이 그려져 있었다.
“용을 테마로 써먹을 수 있는 백화점이 전국에 솔리안 말고 또 어디 있겠니. 하하하! 내 딸이 솔리안의 사장이 된다니!”
마법이 걸려 있는지 천장화 속 구름은 천천히 떠다녔고, 용들 역시 느린 속도로 그림 속을 유영했다.
벽에 걸린 작은 그림들 속에는 이안이 어릴 때 어머니와 놀았던 작은 동산도 있었고,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오솔길도 있었다.
일정이 급하니 개업 전까지 일단 깔끔하게 마무리한 후 차차 꾸며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안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아빠와 동생의 물밑 작업과 공녀님의 철통 보안 때문에.
완공된 솔리안 백화점은 이미 화려함에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누나! 후원에 그네 달아도 되냐고! 봐 봐! 여기! 이 나무! 여기! 누나!”
“네 백화점에나 달아!”
모두 오해였다니.
그럼 골드먼트 남작님이 내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 것도 내 착각이었나.
이안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감각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근데 그 괴상한 저주는 누가 건 거지? 남작님에게 진짜 꼬리가 있는 건가? 설마 괴상한 취미를 가진 약혼녀를 만나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