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5화 (173/192)

외전 5화

해리는 새 바지가 올 때까지 솔리안 백화점에 가지 않았다.

그 덕에 이안은 멀쩡히 일할 수 있었다.

며칠 전의 그 소동이 ‘스트레스’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버지를 뵈러 집에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 주지 않았다.

정말로 아버지나 셸먼이…… 이안을 라이벌로 판단해 웃기지도 않은 저주를 걸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돈. 골드먼트 남작가에서 온 소식은 없었나요?”

“예. 그때 남작님께서 도망치시고 난 뒤엔 따로 연락이 없으십니다.”

“……도망?”

“싸우고 도망치신 거 아닌가요?”

이안은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백화점 앞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하긴, 왜인지 질색하셨지.’

인부들은 공사 부자재를 짐마차에 소란스럽게 옮겨 실었다.

이제 간판만 달면 끝이었다.

개업식은 다음 주지만 간판은 오늘 도착하는 대로 달아 놓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까지 간판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래는 아침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이안은 초조한 눈으로 거리를 살폈다.

“간판이 왜 안 오는 거죠?”

“어제 확인했을 때는 오늘 아침까지 무사히 보낼 수 있다고 했는데 이상하네요. 가서 확인해 볼까요?”

이안은 시계를 확인한 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어야 할 시간이었다. 뭔가 사고가 생긴 게 분명했다.

개업 기념 할인 행사 때문에 물건들이 하나둘 도착하고 있었다.

내부 청소를 꼼꼼하게 마친 뒤 상품들을 매대에 전시해야 했다.

물품이 모두 도착했는지 확인하던 이안은 두 시간이 지난 후 파리하게 굳은 얼굴로 돌아온 돈을 보고 사태를 예감했다.

“완성이 안 됐다고 하나요?”

“……예. 백화점 개업 전까지는 반드시 작업을 마치겠다고는 합니다.”

“어디까지 완성됐는지는 보고 왔나요?”

“베넷 남매가…… 미완의 작품은 보여 주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안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예술가란 놈들은 왜 이럴까.

정해진 마감을 제때 지키는 게 힘든가.

아니다. 애초에 경력이 별로 없는 어린애에게 맡긴 제 잘못이다.

에티 베넷과 플럼 베넷.

후원하는 조각가들 중 나이가 어리지만 천재성을 보이는 남매였다.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탓에 제게 어떤 재주가 있는지도 모르고 클 뻔했지만 헤이먼 공자님의 눈에 띄어 조각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됐다고 들었다.

누나인 에티는 버려진 날붙이로 나무를 깎아 다람쥐, 늑대, 강아지, 고양이 등의 다양한 동물 조각을 만들었고 남동생 플럼은 그 조각에 색칠을 해 팔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일찍이 돌아가셨고, 병든 어머니만 남아 계시다고 했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누나와 남동생, 하나만 남은 부모.

이안과 가족 구성원이 비슷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는 달랐지만.

솔리안에서 후원을 하겠다고 했을 때 남매의 어머니는 ‘둘 다 재능이 있으니 둘 모두를 데려가 주십시오. 학비는 제가 구걸을 해서라도 대겠습니다.’라고 했었다.

이안은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베넷 부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물론입니다. 아드님도, 따님도 모두 훌륭한 예술가로 키워 내겠습니다.’

라고 했었지.

백화점을 꾸밀 큰 조각을 주문하기엔 둘 다 경력이 없어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 보라고 간판 제작을 맡겼는데.

마감 일자를 못 맞추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냥 숙련된 전문가한테 맡길 걸 그랬군.

누나인 에티 베넷의 열망을 보고서 그 아이와 저를 동일시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안은 스스로의 아둔함을 욕하며 복잡한 속을 다스렸다.

백화점 개업까지 며칠 남지 않았으니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들을 잘 다독여서 어떻게든 간판을 받아 내는 수밖에 없었다.

“수고했어요. 내가 직접 가 볼게요.”

돈의 동그랗고 큰 눈동자가 힘없이 아래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제가 갔을 때 확인을 똑바로 하고 왔어야 하는데.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이안에게 혼난 거라고 생각했는지 돈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비쳤다.

“제가 누군가를 독촉하는…… 그런 걸 아직 잘 못해서 그렇습니다. 다음엔 더 잘하겠습니다. 고치겠습니다.”

이안은 누군가를 달래는 것에는 재주가 없었다.

하지만 눈썹을 늘어뜨린 채 식은땀까지 흘리는 돈을 이대로 두고 가자니 마음에 걸렸다.

몇 달 같이 일해 본 결과 돈은 질책을 받으면 주눅이 들었으면 들었지, 독기를 품고 아득바득 일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이안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돈 잘못이 아니에요. 흔한 일입니다. ……잘하고 있어요.”

“……!”

“앞으로 더 나아질 거예요. 돈은, 잘하고 있……어요.”

어색했다. 누군가를 다독이며 위로하는 건.

부자연스럽게 굳어 있는 이안을 물끄러미 보던 돈은 얼른 길가로 달려 나가 마차를 잡아 왔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사장님이 작업실에 다녀오실 동안 물품을 확인하고 있겠습니다.”

이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이안은 지난 며칠 내내 만나지 못했던 아버지를 베넷 남매의 작업실 앞에서 발견했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말한 대로 하고 있는 거죠?”

“네, 네. 물론입니다.”

“위약금은 물론이고, 받기로 한 보수까지 우리 쪽에서 얼마든지 추가로 줄 테니까 내가 말한 그대로만 해요.”

“네, 알겠습니다. 클레버 님.”

잘못 본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에티의 입에서 나온 ‘클레버 님’이라는 이름을 듣고 나서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작 왔어야 할 간판이 아직 오지 않은 것에는 제 아버지, 토니 클레버의 뒤 공작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좋은 아버지였잖아.’

돈을 밝히는 장사꾼이었어도, 원치 않은 결혼을 시키려고 했어도.

이안의 머릿속에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과 함께 보냈던 어린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편한 삶을 살라 하며 남작 부인이 되라 했던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로서 딸이 다른 사람들 입맛을 맞춰 가며 장사치로 사는 게 싫었을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이해시켜 왔다.

그런데, 이건.

이 상황은 정말 이안을 ‘딸’이 아니라 동종 업계의 라이벌로 인식했다고밖에는 볼 수 없었다.

왜지?

아버지가 정해 준 인생을 따라가지 않아서?

이안은 토니 클레버가 떠나고 몇 분이 지난 뒤에야 베넷 남매의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클레버 님?”

무심코 문을 연 에티의 두 눈이 잠깐 커졌다.

“내가 올 줄 알았나 보죠? 얼굴을 보기도 전에 클레버 님이라고 부르다니.”

그녀는 일순 당황하는가 싶더니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 아하하. 원래 오늘까지 간판을 보내 드리기로 했으니까…….”

“알고 있군요. 이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엔 늦었다는 것도 알고 있겠죠.”

“예…….”

에티는 말끝을 흐리며 반쯤 열린 문의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꼿꼿이 서 있었다.

“어디까지 완성됐습니까? 확인을 해 봐야겠어요.”

“안, 안 됩니다!”

“에티 베넷.”

문손잡이를 잡고 놓지 않는 에티의 뒤쪽에서 우당탕탕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계약서 내용 기억합니까? 날짜를 넘기면 위약금을 청구한다고 분명히 명시돼 있을 텐데요.”

“네, 네. 하지만 무통보로 그런 게 아니라, 아까 아침에 비서분이 왔을 때…… 며칠 더 시간을 달라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끌다가 당일에 펑크 내려는 속셈 아닌가요? 가령 위약금을 내 줄 사람이 있다든지.”

간판이 도착하지 않아도 백화점 을 개업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제 혼자 힘으로 내딛는 첫걸음을 미숙하게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아버지가 손수 망친 개업식이라니.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이안은 이를 악물고 문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문 좀 열어 보세요!”

“안 됩니다! 정말 안 돼요! 단주님. 사장님! 안 돼요! 제발 일주일만 시간을 주세요!”

“일주일? 당장 다음 주가 개업인데 개업식 날 간판을 들고 와서 인부들과 함께 달겠다는 겁니까?! 손님들 머리에 먼지랑 간판을 나란히 떨어뜨릴 계획이에요?”

“아닙니다! 절대 아니에요!”

힘이 부치는지 에티는 목이 터져라 남동생을 부르기 시작했다.

“플럼! 플럼!”

곧이어 안쪽에서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달려 나왔다.

문이 안쪽으로 힘 있게 열렸다.

그 탓에 문을 밀고 있던 이안 역시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가 플럼의 몸에 부딪쳐서 튕겨져 나왔다.

“사장님. 부탁드립니다. 시간을 좀 더 주세요.”

플럼의 눈빛에는 절대 굽히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위압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때 이안의 뒤에 그림자가 졌다.

“지금 누굴 위협하는 겁니까.”

골드먼트 남작이었다.

부드럽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하며 남작은 이안의 옆으로 와 섰다.

그는 이안에게 짧은 눈인사를 건넨 뒤 플럼에게 말했다.

“솔리안의 단주가 주문한 제품을 받기로 한 날짜는 오늘이라 들었는데.”

“예, 그렇지만 아직 완성이 안 돼서……. 미완성인 작품은 보여 드릴 만한 것이 아니라…….”

형편없는 핑계였다.

이안은 플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한 부분만 보여 줘도 상관없으니 당장 보여 줘요.”

그럼에도 남매가 여전히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자 골드먼트 남작은 플럼을 지나쳐 문손잡이를 잡고 반쯤 열린 문을 활짝 열었다.

언제나 순한 얼굴로 사람들 사이에 얌전히 서 있는 것만 봐 왔던 터라, 이안은 그의 추진력에 내심 놀랐다.

플럼은 감히 남작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문이 열리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작업실은 엉망이었다.

색색의 물감의 독한 냄새와 먼지, 바닥에 굴러다니는 나무 조각과 구석에 세워진 석상까지.

제가 주문하지 않은 여러 조각들만 즐비했다.

여기에 솔리안 백화점의 간판은 없었다.

이안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내 백화점의 간판은 어디 있습니까.”

“그, 그게…….”

망설이며 답하지 못하는 에티와 플럼 남매의 꼴을 보자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는 날 딸로 생각하긴 한 건가.

배신감에 치가 떨려 마치 설산에 홀로 서 있는 듯 이가 딱딱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단주?”

옆에서 저를 부르는 골드먼트 남작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쥐고 있는데도 손끝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열린 문 너머에서 들렸다.

“이안?”

아버지와 셸먼이었다.

뭘 재차 확인까지 하고 싶어서 다시 찾아온 건지.

이안은 그만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다.

“아버지는 정말, 정말로 내 첫걸음을 망치게 하고 싶으신 거예요? 내가 아버지가 말한 대로 살지 않아서? 내가 남작님과 결혼하지 않아서?!”

악에 받친 이안의 목소리가 작업실을 가득 메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