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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화 (172/192)

외전 4화

……내가 미쳤나?

이안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단주?”

“사장님?”

두 사람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이안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나도 참. 어지간히 피곤했나 봐.

아무래도 어제 남작님이 저 대신 다친 게 심적으로 많이 부담이 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단주, 혹시 내가 너무 이른 시간에 찾아왔나요? ……불편하면 약속을 잡고 다른 때에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남작의 커다란 귀가 아래로 축 처졌다. 붕붕 흔들리던 꼬리도 시든 풀때기처럼 축 늘어졌다.

이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제 정신 이상은 나중에 의사에게 찾아가면 된다.

하지만 기껏 찾아온 고객을, 아니, 어제 사고의 피해자를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아닙니다, 남작님. 편하신 자리에 앉으세요. 돈, 차 좀 준비해 줘요.”

“예, 알겠습니다.”

돈이 임시 사무실을 나가자 어색한 공기가 이안과 남작 사이에 감돌았다.

골드먼트 남작은 잠깐 이안의 눈치를 살폈지만 얼른 평소의 냉정을 되찾았다.

그는 작은 소파에 앉고는 꽃다발을 탁자 위에 올려 뒀다.

그러나 곧 다시 꽃다발을 매만지더니 또 금세 손을 떼고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 뒀다가, 다시 꽃다발에 손을 대길 반복했다.

가만히 앉아 있질 못했다.

“남작님.”

“네. 아. 오늘 찾아온 이유는, 그, 내가, 머리는 괜찮습니다. 꽃은, 멀쩡히 퇴원했고…….”

‘꽃은 멀쩡히 퇴원했다?’

하나도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남작은 애써 차분한 표정으로 고쳐 말했다.

“크흠. 저는 멀쩡히 퇴원했고, ……곧 백화점 공사가 끝난다고 들어서 꽃을 가져왔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치신 곳은 괜찮으신가요?”

“네. 다행히도.”

“인부들에겐 각별히 주의하라 말해 뒀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공녀님께서 오늘 남작저에 의술사를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감사하다고 꼭 전해 주세요. 걱정을 끼쳐 송구하네요. 제가 조금만 더 재빨랐으면 좋았을 텐데요.”

남작의 녹색 눈이 반으로 곱게 휘어졌다.

꼬리가 붕방방 흔들렸다.

이안은 최대한 그쪽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남작의 두 눈을 뚫어져라 보게 되었다.

그와 이렇게 가까이서, 이렇게 오랫동안 눈을 맞춘 것은 처음이었다.

클레버 백화점의 손님으로 왔을 때는 대부분 멀찍이서 잠깐 보기만 했고, 응대를 하더라도 시간이 아주 짧았다.

청혼을 할 때 보내온 초상화 속 다정한 낯은 일부러 오래 보지 않았다.

오랜 시간 소망하던 꿈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억울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골드먼트 남작은 그때 당시에 이안의 꿈을 전혀 몰랐겠지만.

어쨌든 이안은 그가 달갑지 않았다.

제 아버지는 골드먼트 남작이 아니라 다른 누구였더라도 이안을 결혼시키려고 했겠지만.

‘이안. 남작 부인이 되면 여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어.’

‘이안. 좋은 분이시다. 다정하시고, 들려오는 소문에 나쁜 말이라곤 하나도 없었어. 너도 알잖니.’

‘이안! 골드먼트 남작을 거절할 순 없어!’

아버지의 목소리가 기억 깊숙한 곳에서 되살아났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국 이안의 의사를 존중해 남작의 청혼을 거절했다.

다행히도 남작은 그에 앙심을 품지 않았다.

선한 사람이었다.

별난 제게는 아까울 정도로.

지금도, 일에 치여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멀쩡한 사람의 엉덩이에서 꼬리를 보고 있지 않은가.

“……주!”

“예, 에?”

“단주. 많이 피곤하면 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닙니다. 남작님.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죠?”

아래로 살짝 처진 남작의 유순한 눈이 좌우로 짧게 흔들렸다.

“왜, 단주의 시선이, 내, 다리 사이를…… 향해 있는지……. 혹시 거기 뭐가 묻었는지……. 내가 보기엔 아무것도 없는데…….”

“아……. 그렇, 죠……. 아무것도 없죠……. 있을 리가. 없죠……. 아무것도 없어…….”

이안은 여전히 좌우로 팔랑팔랑 움직이는 탐스럽고 풍성한 긴 꼬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남작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나, 나도 남자니까 아무것도 없진 않습니다.”

“네?”

멍하니 남작의 다리 사이를 뚫어지게 보던 이안이 고개를 쳐들었다.

골드먼트 남작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떼며 심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곳에 아무것도 없진 않습니다. ……이안.”

“그럼, 있나요?!”

“예?”

“진짜 있어요?”

이안이 금방이라도 손을 뻗을 것처럼 몸을 앞으로 숙였다.

남작은 저도 모르게 소파에 등을 바짝 붙이며 몸을 물렸다.

“당연히 있습니다!”

“거짓말!”

이안이 거짓말이라고 소리치자 남작은 어쩐지 조금 흥분했다.

“있습니다! 있고말고요! 당연히 있죠!”

“당연히 있다니요!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 그렇군요! 몰, 몰랐습니다. 그럴 거라고 막연히 생각은 했지만…… 아니, 그런 걸 정말로 상상했다는 건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정말 있어요? 있는 거예요?”

이안은 저 꼬리를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탁자에 바짝 붙어 앉았다.

남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직은, 아직은 안 됩니다! 있기야 당연히 있고요! 꽤나, 있습니다!”

“그럼 이게 진짜란 말이에요?”

아까부터 계속 시선을 강탈하고 있는 화려한 무빙의 꼬리에 홀린 이안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바지춤에 손을 가까이 가져다 대자 남작은 휘청거리며 도망가듯 멀어졌다.

“이안, 아니, 단주! 한 번도 본 적 없다니 호기심이 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합니다!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저, 저는 정말로 처음 봐요!”

“아직 안 봤잖습니까!”

“보여요!”

“보, 보인다고요?”

남작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제 아래를 힐긋 내려다보더니 탁자 위의 꽃다발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러곤 제 다리 사이를 가렸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 다음엔 약속을 잡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골드먼트 남작은 꽃다발로 아래를 가린 채 빠르게 임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쟁반 위에 차를 올린 채 안으로 들어오려던 돈과 부딪쳤지만 남작은 허둥지둥 도망치기 바빴다.

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남작과 사무실 안의 이안을 번갈아 바라봤다.

“싸우셨습니까?”

“아니요.”

“그럼 대체 무슨 일이…….”

“돈. 나 오늘, 쉬어야겠어요.”

“어디 아프세요?”

“그건 아닌데…… 무리한 것 같아요. 병원에, 병원에 다녀오겠습니다.”

이안 역시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쟁반을 든 채 가만히 서 있던 돈은 제가 준비한 차를 호록 마셨다.

“……좀 쓰네. 더 연습해야겠다.”

완벽한 비서가 돼서 솔레아 아가씨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돈은 단정한 걸음걸이로 백화점 내부 통로를 지나 안쪽에 마련된 작은 식당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골드먼트 남작님이 꽃다발로 다리 사이를 가리고 계셨지.

어제 넘어지실 때 거길 다치셨나? 아니면 사장님이 대화하시다가 거기를 가격하셨나?

아가씨도 급할 땐 손이 먼저 나가시니, 아가씨와 친한 사장님도 그런 버릇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 * *

“저 이상한 게 보여요.”

“어떤 거 말씀이세요?”

“사람한테 꼬리가 달려 있어요.”

무덤덤한 표정으로 진료 차트를 확인하던 의사의 눈이 요동쳤다.

“아. 귀도요.”

의사가 고개를 휙 돌려 이안을 바라봤다.

“잘,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저는 눈, 눈 전문이라…….”

“그러니까요. 제 눈에 보이는 거잖아요.”

이안은 결국 안과 의사에게서 ‘정신과’ 쪽으로 가 보라는 얘기를 듣고 진료실을 나와야만 했다.

정신과도 가 봤지만 최근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적이 있는지 물을 뿐이었다.

그래도 약간의 소득은 있었다.

“지금 제 엉덩이에서도 꼬리가 보이십니까?”

주름이 자글자글한 백발의 늙은 남자 의사 엉덩이에 꼬리가 달려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쩐지 징그러워서 이안은 약간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요.”

“그럼 어떤 분한테서 꼬리를 보셨습니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분의 명예가 달린 문제였다.

“……혹시 마법사에게서 저주를 받은 게 아닐까요? 마력이 강한 마법사들은 어렵지 않게 상대방의 정신을 와해시키는 저주를 건다고 합니다.”

저주?

그 정도로 남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이 있었던가?

이안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과거를 훑었다.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게다가 저주라기엔…….

“귀여웠어요.”

“예?”

“……깜짝 놀라긴 했지만 굉장히 귀여웠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하지만 환자분이 병원에 찾아오신 건 일상생활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겠죠.”

“네.”

그건 그렇다.

남작님에게 제대로 된 피해 보상을 해 드리지도 못했는데 귀와 꼬리가 보여서 대화에 집중을 못 하다니.

아래위로 팔랑대는 말랑말랑하고 도톰한 갈색 귀라니.

풍성한 꼬리털이라니.

……만지고 싶었는데.

가만히 생각하던 이안은 제 손등을 꼬집었다.

미친년.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이 정말 없나요?”

“원한이라고 해 봐야…….”

횡령 때문에 잡혀 간 단주들?

아니면…….

수도에서 크게 백화점을 하고 있는 클레버 백화점의 사장이라든지.

아버지가 나를 원망하고 계실까?

시키는 대로 결혼도 하지 않고, 집을 나와 공녀님이 마련해 주신 거처에서 살며, 그분의 사람이 되어 상단에서 일하다가 결국 커다란 백화점의 사장이 되었으니.

건방지다고 생각하실까?

어쩌면 클레버 백화점을 물려받게 될 남동생, 셸먼이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다 시집이나 갔어야 할 누나가 업계 1위가 되어, 꺾어야 할 라이벌이 돼 버렸으니.

“예상 가는 사람이 몇 있어요.”

“그러시군요. 저주에 걸렸다면 그 저주를 건 마법사를 찾아가 풀어 달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더 강한 마법사를 찾거나요. 성함이…… 아, 이안 클레버 님. 솔리안 상단의 단주님이시군요. 바로 공녀님께 찾아가 부탁해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이런 사소한 일로 공녀님께 폐를 끼칠 순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비밀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이안은 입막음을 위해 치료비를 두둑하게 얹어 주고 병원을 나왔다.

아버지를 찾아가 봐야 했다.

* * *

해리 골드먼트는 점심 식사도 거르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남작님. 식사는 하셔야죠.”

“아니, 괜찮아.”

“대체 왜 그러세요. 어제 다치신 머리가 갑자기 아프신 거예요? 아유,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어요. 공사도 안 끝난 백화점에 찾아가지 마시라고 했잖아요. 내가 딱 보니까 그 클레버 아가씨는 남작님한테 관심이 쥐뿔도 없더만요.”

남작가에서 오래 일한 해리의 보모 겸 하녀장인 쟌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녀의 남편인 말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식사도 거르고 방에만 계시는 남작님께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 말이 틀렸나. 도련님, 어머. 내 정신 좀 봐. 또 도련님이라고 했네. 남작님! 그 아가씨한테는 천천히 다가가시라니까는!”

“남작님. 저는 제 아내와 생각이 다릅니다! 저돌적으로! 이제 화끈하게! 가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요즘 아가씨들은 그런 거 싫어해!”

두 사람이 잠긴 방문 앞에서 옥신각신 싸우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해리가 방문 너머에서 온갖 시름은 다 끌어안은 얼굴로 침울하게 말했다.

“말콤, 쟌.”

“네, 남작님. 말씀하세요.”

“……나, 그, 다 보이나?”

“뭐가요?”

“실루엣이…….”

말콤과 쟌은 한참 후에야, 쭈뼛대는 남작님에게서 설명을 듣고서야 말뜻을 이해했다.

쟌은 티 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말콤은 달랐다.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실루엣이 살짝 보이는 편이 좀 더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악!”

쟌이 들고 있던 쟁반으로 말콤의 머리를 내려쳤다.

해리는 그날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쟌은 새 바지를 여러 장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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