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세상에, 남작님. 어쩌다가…… 아니,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어요.”
중년의 여성이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로 남작에게 말을 거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고 이안은 병실을 나왔다.
크게 다치지는 않으셨다고 말을 해 드릴 걸 그랬나.
잠깐 고민했지만 약혼녀와 남작 이 있는 곳으로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저는 남작님과 결혼을 할 뻔했던 사이가 아닌가.
곧바로 병실을 나온 건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며 이안은 빠르게 솔리안 백화점으로 다시 향했다.
인부들에게 건설 부자재들을 똑바로 정리하라고 말을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골드먼트 남작님의 성정으로 봐선 인부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이안은 책임자로서 경고를 해 둬야 했다.
까다로운 성미의 귀족들에게 언제 다시 책잡힐지 모르니까.
예상대로 백화점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사장님. 그, 그분은…….”
공사장 책임자인 척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안에게 다가왔다.
“골드먼트 남작님은 크게 다치진 않으셨다고 합니다. 화나신 것 같지도 않았고요.”
그제야 척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공사장에선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니 조심하셨어야죠. 앞으로는 주의하셔야 합니다. 이후 보상 문제에 관해서는 제가 남작님과 얘기하겠습니다.”
“예. 시정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 그리고 사장님. 공녀님께는…….”
“공녀님께도 당연히 말씀드릴 겁니다. 안전사고에 유의하라고 주의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책임을 물으셔도 감수해야 합니다.”
“아…….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공녀님이 솔리안 백화점을 세우는 걸 마지막으로 상단 일에서 물러나겠다고 했지만 이곳의 인부들은 모두 공녀님을 최고 책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공녀님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백화점에서 체크해야 할 부분들을 확인하고 나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이안은 공작저로 향했다.
“공녀님은 후원에 계십니다.”
“네, 알겠습니다.”
후원과 연결된 문을 열자마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아무스. 다른 걸로도 변신할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걸로는 뭐든지 변신할 수 있어.”
“정말? 예전엔 인간으로 변하는 것도 잘 못했잖아.”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그래.”
“하하하. 귀여워.”
“……나 귀여워?”
“야! 너 일 안 하냐!”
“아, 깜짝이야! 놀랐잖아. 그레이!”
“너어는 오빠한테 그레이가 뭐니, 그레이가. 듣는 그레이 오빠 섭섭하게.”
“그레이. 지금은 보다시피 데이트 중이다.”
“남의 집에서 데이트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넌 집 없어? 안 가냐.”
“그레이. 전에 보여 줬다시피 내 동굴은 사라졌다.”
아무스의 긴 꼬리에 누워 있던 솔레아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진짜? 그거 없어졌어? 그럼 우리가 숨바꼭질하던 그 작은 동산은?”
그레이에게 무거운 목소리로 답하던 아무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따스한 목소리로 솔레아에게 답했다.
“그건 남아 있어, 산. 비록 어느 귀족의 개인 사냥터가 됐지만.”
목소리에 애정이 뚝뚝 흘러넘쳤다.
“오랜만에 너랑 가 보고 싶다.”
“오빠 말 안 들리니? 얘들아. 오빠 아직 여기 있다. 아. 아. 연애는 나가서. 연애는 나가서.”
밖으로 나가라며 그레이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그러다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이안!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이제 막바지 공사에 들어갔지?”
“예…….”
이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후원으로 들어섰다.
‘화목’이라는 글자가 형상화된 한 폭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이안은 스스로가 저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공녀의 앞에 다가가 섰다.
“공녀님. 오늘 백화점에서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 누가 다쳤어?”
이안은 간략하게 보고를 마쳤다.
부자재가 제 쪽으로 쓰러져 골드먼트 남작님이 다치셨다고.
“남작이 이안과 같이 있었어?”
“……마침 백화점에 오셨던 모양입니다.”
“이안 쪽으로 쓰러졌다면서.”
“예, 그런데 남작님이 저를 밀치셔서 그분이 대신 다치셨습니다. 하지만 의사 말로는 일상생활에 무리가 있을 정도로 다친 건 아니라고 합니다. 환부에 물만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는데도 공녀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은퇴 선물로 세워 주신 백화점에서 개업도 전에 사고가 났으니 당연히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이안도 놀랐겠네. 괜찮아?”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돈이 여태 집에 안 들어왔구나.”
돈에게는 여기가 집이구나.
이안은 떠오르는 생각의 편린을 구석으로 밀어 넣고 대답했다.
“예. 제가 공사장의 마무리를 부탁하기도 했고, 골드먼트 남작가에서 요구하는 보상 조건을 알아 오라고 했습니다.”
“일단 베르고의 의술사를 골드먼트 남작가로 보낼게. 내가 마법사이긴 한데 의술 쪽은 잘 몰라서 혹시라도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갑자기 남작님 머리에서 뿔이 솟으면 안 되잖아.”
딱딱하게 굳은 이안의 표정을 본 솔레아가 농담을 건넸다.
‘어느 날 남작님 머리에서 뿔이 자랐다.’
그럴 리가.
공녀님은 농담도 잘하시지.
이안은 살짝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의술사 고용 비용은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우리 사이에 딱딱하게 왜 그래, 이안.”
인간으로 변한(옷을 입은) 아무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안. 나도 뿔이 있다. 뿔은 나쁘지 않아. 오히려 좋지.”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진지한 말투였다.
이안은 웃음을 참으려 이를 악물었다.
다행히 그레이가 아무스의 손목을 잡아끌고 반대편으로 데려갔다.
“용. 내 동생 사업 얘기 하잖아.”
“사업 얘기였나? 나는 여자와 남자 간의 애정 얘기인 줄 알았어.”
“뭐? 저게 무슨 애정 얘기야.”
“이안이 다칠 뻔했는데 골드만두가 대신 다쳤다며. 그건 사랑이 아닌가?”
“골드만두 아니고 골드먼트. 넌 사람 말을 귓등으로 듣냐? 그리고 단순한 호의일 수도 있지. 넌 눈앞에서 사람이 다쳐도 구경만 할 거야?”
“솔레아가 아끼는 사람인가?”
“솔레아는 대체적으로 사람을 다 아끼지.”
“그래도 내가 다치면 솔레아는 다른 사람이 다쳤을 때보다 더 마음 아파할 거다.”
“이 용 새끼 희생 안 한다는 말을 로맨틱하게 포장하네.”
“처남은 입이 험하다.”
“너는 눈치가 험하다.”
두 사람이 아웅다웅 다투며 멀어지자 솔레아가 머쓱하게 웃으며 이안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골드먼트 남작이라면, 그분 맞지? 전에 이안에게 청혼을 했던…….”
“예, 맞습니다.”
“혹시 백화점에 찾아온 것도 그런 이유인가?”
“아닐 겁니다. 청혼을 거절한 이후로는 제대로 이야기해 본 적도 없으니까요. 게다가 그 청혼도 수년 전 일입니다. 벌써 기억에서 잊으셨을 겁니다.”
“흠…….”
의미심장한 얼굴로 솔레아가 턱을 매만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 건너편에서 그레이가 다시 뛰어왔다.
“산윤솔! 산윤솔! 이 미친 용대가리가 내 이마에 뿔 달았어!”
“처남이 먼저 내 뿔 욕했다!”
“아, 좀 싸우지 마! 나 지금 이안이랑 얘기하잖, 악! 아무스! 진짜 우리 오빠 머리에 뿔을 달아 버리면 어떡해!”
이마에 적갈색 뿔이 솟아오른 그레이의 모습에 이안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스의 등짝을 퍽퍽 내리친 솔레아가 마법으로 그레이의 뿔을 없앴다.
“오빠! 머리 아프진 않아? 괜찮아? 바보 되는 거 아니야?”
“쟤가 먼저 내 뿔 이상하다고 했어, 산.”
“쟤? 쟤에에에? 야. 용! 평소엔 처남, 처남 잘만 부르더니 좀 싸웠다고 쟤?”
“그레이! 아무스! 싸우지 말라고 했잖아!”
난장판 속에서 이안은 솔레아에게 짧게 인사했다.
“그럼, 의술사 부탁드리겠습니다. 공녀님.”
“그래. 내일 바로 보낼게. 이안. 너무 걱정하지 마. 잘 해결될 거야. 그리고 골드먼트 남작님도…….”
“산윤솔! 이 미친 새끼가 내 엉덩이에 뿔을 단대!”
“골드만두는 사랑 맞다고!”
“호의라고! 호의!”
“호이?”
“호이 같은 소리 하네! 이 용대가리가 진짜!”
“처남 몇 살이야?! 처남이 사랑을 알아?”
“이, 이게 나이를 들먹거려? 야, 나도 너 같은 늙다리한테 내 동생 못 보내!”
“아, 좀! 싸우지 말랬지! 아빠 부른다! 아빠아아악! 그레이랑 아무스 또 싸워요! 그만! 떨어져! 둘 다 떨어져! 이안! 가, 잘 가! 연락할게!”
“……네. 알겠습니다.”
소란스럽지만, 여전히 행복해 보였다.
도련님과 용 님이 얼굴을 벌겋게 붉힌 채 싸우는데도 공녀님의 얼굴엔 미소가 감돌고 있었으니까.
이안은 백화점이 완공되고 저 자신만의 사무실을 가지게 되면 공녀님처럼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오랜 꿈이었으니까.
집으로 가려고 저택을 나서는데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하녀가 따라붙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공녀님 담당 하녀인 ‘앤’이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이안 님. 제가 공녀님의 최측근이라 초반에 이안 님을 섭외하면서 여러 소문을 들었었거든요.”
“……그런데요?”
“골드먼트 남작님이 혹시 아직 이안 님을 좋아하시는 게 아닐까요?! 마음에 두고 있으니까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이안 님을 팍! 밀치고! 본인이 팍! 다치시고!”
아직 앳된 하녀의 얼굴에 맑은 장밋빛 생기가 발갛게 돌았다.
어이없는 추리였지만 귀여웠다.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일은 없어요.”
“아니 그래도! 이안 님! 제가 이쪽 방면으로는 천재인데!”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앤. 하지만 그런 소문이 나면 남작님께 실례가 될 수 있으니 앞으로 조심하도록 해요. 귀족이시니 그런 염문에 휩싸이는 걸 싫어하실 겁니다.”
“……네.”
강아지라면 귀와 꼬리가 축 처졌을 것이다.
앤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이안을 배웅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이안은 조용히 헛웃음을 지었다.
남작님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나를. 그럴 리가 없지.
‘진짜 사랑이면 어쩔 건데! 나 사랑 알아!’라고 소리치던 용 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다음 날, 백화점으로 출근한 이안은 임시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시든 꽃을 발견했다.
“돈? 이게 뭐예요?”
“아. 어제 골드먼트 남작님이 쓰러져 계셨던 자리에 저 꽃이 있었습니다. 아마 사장님께 그걸 전해 주러 오신 듯해서 거기 뒀습니다. 치울까요?”
“네.”
“네?”
“네?”
“……잘 못 들었습니다?”
진짜 치우라고 할 줄은 몰랐던 건지 돈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제 딴에는 나름 신경 써서 거기 둔 것 같았다.
“……남작님은 귀족이세요. 우리 같은 평민과 불미스러운 소문이 나면 안 됩니다. 그분의 명예가 실추되니까요. 얼마나 불편하시겠어요. 남작님의 친절을 섣불리 오해했다가는…….”
“골드먼트 남작님 오셨습니다!”
밖에서 인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문 너머에는 이마에 약간 큰 반창고를 붙인 골드먼트 남작이 서 있었다.
“안, 안녕하십니까. 단주. 찾아와도 된다고 해서…….”
남작의 손에는 작지만 고운 들꽃이 한 아름 들려 있었다.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이안은 손님을 사무실 안으로 들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보였다.
……남작의 머리 위에 밀가루 반죽같이 말랑해 보이는 큰 귀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엔 꽃다발에 정신이 팔려 보지 못했는데 엉덩이 뒤에서는 커다란 꼬리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도 무지하게 세차게. 아주 빠른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