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백화점 공사는 착착 진행됐다.
어벙해 보였던 마차 안에서의 인상과는 달리 돈은 제 역할을 해내기 위해 발로 뛰며 일을 배웠다.
라트엘에게서 상단 관련 일을 인수인계받은 뒤 모르는 부분은 홀로 공부하며 깨친 듯했다.
노예 출신이라기에 걱정했는데 다행히 글은 읽을 줄 아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서대륙어도 할 줄 알았다! 차후에 대륙을 건너 물건을 수출할 일이 생긴다면 그를 써먹을 수 있었다.
‘서대륙어를 배웠으면서 그간 왜 말을 안 했던 건가요?’
‘……아가씨가 하지 말라고 하셔서요.’
그리고 외국어를 배우는 속도까지 빨랐다.
게르투만어는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했고, 크렘린어는 글로 쓸 줄은 몰랐으나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물건을 사고팔기 위한 상업적 대화는 거의 현지인 수준이었다.
크렘린과의 통롤러 수출 거래를 성사시키고 사무실로 돌아온 이안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돈에게 물었다.
‘크렘린어를 어쩜, 아니 크렘린어뿐 아니라 외국어를 어떻게 그렇게 잘하는 건가요?’
학교도 다니지 않았을 텐데.
라는 뒷말은 조용히 삼켰다.
이안의 책상 옆 작은 책상에 앉아 일을 하던 돈은 유순한 검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게르투만에서 나고 자랐고, 크렘린에서 꽤 오래…… 생활하다가 제르노아로…… 넘어왔습니다.’
아, 참.
물건을 사고팔 때 능숙하게 대화한다 했더니 그가 ‘물건’이었군.
이안은 불필요한 질문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에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와 이안이 돈에게 체크해야 할 것들을 지시하는 짧은 대화만 간간이 오갔다.
애초에 둘 다 그다지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돈이 요령 부리지 않고 빠릿빠릿하게 일을 배우니 서너 달쯤 지났을 때는 이안과 손발이 잘 맞아 들어갔다.
“일을 정말 빨리 배우는군요.”
이안의 말에 돈은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어쨌든 돈은 일을 잘했다.
그리고 사람과 많이 부대끼는 생활을 해 와서 그런지 사람 보는 눈도 있었다.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인재였다.
“사장님. 백화점 세부 인테리어 말씀하신 부분 수정됐습니다. 계단 난간 디자인은 말씀하신 대로 디테일을 추가해서 뱀이 타고 오르는 것 같은 조각을 넣는 시안으로 작업 들어갔습니다. 벽화는 글론 웜베트 씨가 마무리 중입니다. 완공 예정일은 이달 말쯤인데, 지금 확인하러 가시겠습니까?”
“좋아요.”
이안은 꽤나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사가 거의 끝나 가는 백화점에 도착해 찬찬히 살펴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비서…… 편하다!’
대부분의 단주들은 시동을 몸종처럼 달고 다녔고, 그 외엔 업무별로 일을 맡긴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안은 라트엘에게 ‘비서’라는 직종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거부감이 들었다.
너무 귀족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골드먼트 남작과의 결혼을 거절했으니 평생 ‘귀족’이라는 글자와는 인연이 없을 줄 알았다.
심지어 반항하는 마음으로 클레버 백화점에 출근 도장을 찍었던 거였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제힘으로 돈을 벌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물론 공녀님의 힘이 컸지만.’
그래도, 그래도.
이안은 완공을 앞두고 있는 백화점을 다시 천천히 둘러봤다.
‘여긴 진짜 내 힘으로 꾸려 갈 수 있는, 내 공간이야.’
가슴 안에서 작은 파도가 소용돌이치며 천천히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물결처럼 밀려든 감정에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른 순간, 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이안은 돈의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 돈이 제게로 손을 뻗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지, 라고 생각한 찰나 누군가가 제 몸을 밀쳤다.
커다란 굉음이 울리고 뿌연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바닥에 쓰러진 이안은 자신을 밀친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골드먼트 남작이었다.
“……남작님?”
아직 미처 치우지 못한 공사 부자재가 이안 쪽으로 쓰러진 모양이었다.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다치신 분은 누구……!”
골드먼트 남작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 미동도 없이 가만히 누워 있었다.
차갑게 식은 이안의 머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백화점의 내부 공사가 아직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니 자재가 쓰러지는 사고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골드먼트 남작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공사가 완료되지도 않은 백화점에 대체 뭐 때문에 왔단 말인가.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이안의 옆으로 돈이 다가왔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이, 이분은 누구십니까?”
돈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이안은 빠르게 이성을 찾았다.
남작님이 왜 여기를 찾아왔는지보다 중요한 건 ‘귀족’인 그가 다쳤다는 것이었다.
“……골드먼트 남작님이십니다. 부상을 당하신 듯하니 어서 병원으로 옮겨 주세요. 골드먼트 남작가에도 연락해 보호자를 부르고요.”
“예, 알겠습니다.”
빠르게 대답한 돈은 주변 상황을 정리한 후 근처의 인부에게 마차를 부르라고 명령했다.
소란스럽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이안은 저를 밀친 골드먼트 남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골드먼트 남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인 이이의 보호자가 될 만한 사람이 있었던가?
……그사이에 혹 그가 결혼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의 부인이 오겠지.
놀라서 펄떡이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힌 이안은 마차가 도착하자마자 골드먼트 남작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그는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머리가 찢어져 피를 조금 흘리긴 했지만 상처가 크진 않은 모양이었다.
“……클레버 영애?”
‘영애?’
윗사람의 딸을 부르는 호칭이다.
‘생각보다 상처가 심각한 모양이다. 사람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시는군.’
침대 옆 작은 의자에 앉아 있던 이안은 벌떡 일어나 치마 양쪽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이안 클레버입니다. 영애라 불러 주실 만한 사람은 아니니 그리 존칭을 붙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사는 남작님 머리의 상처가 크지 않다고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치지 않았어요?”
“예?”
이안은 숙였던 머리를 들어 올렸다.
지금 머리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는 게 누군데.
누가 누구 걱정을 하는 건지.
하지만 골드먼트는 진심인 듯했다.
그의 연한 녹색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클레버……. 다친 곳은 없습니까?”
그와 눈을 맞춘 채 가만히 서 있던 이안은 얼른 다시 고개를 숙이고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예, 불행 중 다행으로 저는 괜찮습니다만 남작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직 공사를 끝마치지 않아 주의했어야 하는데 제가 미흡해 남작님께 폐를 끼쳤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용서를…….”
“안 다쳤군요. 그럼 됐습니다.”
몸을 일으켜 앉은 골드먼트 남작은 침대 옆에 적혀 있는 제 이름을 확인했다.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내 이름을 알고 있었군요.”
해리 골드먼트.
모를 리가 없었다.
클레버 백화점의 중요한 고객님이었다.
그리고 이안의 아버지가 결혼을 추진했을 때, 아니, 남작이 청혼했을 때 이름이 적힌 종이와 초상화를 보내지 않았던가.
평민에게 청혼을 한 걸로도 모자라 제 초상화까지 보내오는, 귀족치고는 흔치 않은 다정한 성정이었다.
이름을 잊는 게 더 어려운 일일 텐데.
이안이 여태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그가 왜 이리 감격스러워하는지, 이안으로서는 전혀 모를 일이었다.
“네,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클레버 백화점의 중요한 고객님이시니까요. 비록 지금은 제가 베르고 공녀님 밑에서 일하지만 원래는 아버지의 백화점에서 오래 일을 했으니까요.”
“……그렇군요.”
이안은 청혼 이야기는 빼놓고 대답했다.
평민 따위에게 거절당한 그의 자존심을 배려한 행동이었으나 남작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처가 보기보다 더 아픈 것 같았다.
“남작님. 불편하신 부분이 있으시면 당장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치료비는 당연히 저희 상단에서 해결하겠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요구하실 사항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배상하겠습니다.”
“……나는 괜찮……아, 그러면.”
남작은 말을 끝맺지 않은 채 천천히 제 두 손을 맞잡고 만지작거렸다.
백화점에서 오래 장사를 해 온 이안은 눈치가 빨랐다.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걸 보니, 꽤 까다로운 걸 요구하려는 듯했다.
귀한 몸을 다치게 했으니 어느 정도는 각오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만약 이안에게 법적인 책임을 묻는다면 조심스럽게 항의할 생각이었다.
가만히 계셨으면 제가 다쳤을 텐데 남작님의 의사로 저를 밀치셨다고. 그건 저의 선택이 아니니 다소 부당하다고.
하지만 한참 손가락을 만지작대던 남작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상상도 못 한 헛소리였다.
“……서로 이름을 부를까요?”
“예?”
원래 이안은 말귀를 못 알아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마디만 말해도 백 마디의 설명을 들은 것처럼 찰떡같이 알아듣는 약삭빠른 타입이었다.
그런데 골드먼트 남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클레버, 라고 부르면 그대의 아버지를 부르는 것 같으니까……,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고, 당신도 내 이름을 부르고……. 내 이름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마침 알고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남작은 말을 마친 후 눈짓으로 침대 옆 제 이름표를 슬쩍 가리켰다.
‘……그러니까 지금 해리라고 부르라는 건가?’
장사를 하다 보면 귀족들의 이해 못 할 취미 생활을 질리도록 보게 된다.
하지만, 귀족이 장사를 하는 평민한테 서로 이름을 부르자고 하다니.
당혹스러운 요구였다.
남작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딱딱하게 대하지 말고, 조금만 더…… 아. 아닙니다. 이건 너무 갔네요. 그냥 이름만 불러 주십시오.”
“남작님께서는 저를 원하시는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어린 소년처럼 남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제가 감히 남작님을 존함으로 부를 순 없는 일입니다.”
“……아. 그렇, 그렇군요. ……그렇죠.”
남작의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미안합니다. 내가, 또…… 실례를 했군요. 영애, 아니, 클레……. 미안합니다. ……단주.”
어째 거리감이 확 느껴졌다.
남작은 허둥거리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남작님. 갑자기 움직이시면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남작은 이안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 덕에 더 시뻘게진 목덜미가 더 눈에 들어왔다.
‘낯을 많이 가리시는구나.’
클레버 백화점에선 간략한 인사만 주고받아서 몰랐던 점이었다.
혹 앞으로 솔리안 백화점에서 뵙게 된다면 응대에 참고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남작님!”
꽤나…… 연세가 있어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남작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허겁지겁 달려온 건지 옷매무새가 엉망이었다.
약혼녀인가 보군. 연상이 취향이신가.
이안은 빠르게 여인의 옷차림을 훑었다.
혹시 나중에 남작님께서 약혼녀의 선물을 사러 오실지도 모르니 취향을 파악해 둬야 했다.
……수수하게 입으시는구나. 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영애이신 듯했다.
이안이 뒤로 물러나는데 남작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클…… 단주. 그러면 제가 나중에…… 찾아가는 건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남작님.”
피해 보상은 남작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릴 생각이었다.
이안은 필요하면 무릎까지 꿇을 각오가 돼 있었다. 제 무릎 정도야 값이 싸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