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수많은 비리 상단들이 무너졌다.
그 빈자리는 당연하게도 솔리안 상단이 빠르게 채워 나갔다.
처음엔 솔리안도 여타 상단들처럼 뒷돈을 받아먹은 비리 상단일 거라 의심하는 업주들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생 상단이 순식간에 제르노아 제국 전체를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양모 사업뿐 아니라 린넨, 레이스, 단추와 장신구까지.
솔리안은 재빠르게 옷감과 옷에 대한 사업권을 따내며 업계 1위로 자리 잡았다.
게다가 통롤러, 메트로놈 같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특이한 발명품들까지 줄줄이 대박을 쳤다.
그러나 상단이지만 제 몸집 불리는 사업에만 혈안이 돼 있지는 않은 듯했다.
솔리안 상단은 수많은 예술가들과 학자들을 후원했고, 빈민층을 향한 복지와 교육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뇌물을 받아먹은 게 틀림없어.’
라고 말하던 이들은 얼마 가지 않아
‘솔리안만 한 곳이 없지.’
라고 입을 모으게 됐다.
처음에 솔리안 상단을 의심하던 업주들도 빠르고 정확한 일처리, 낮은 계약 수수료, 직원들에 대한 복지에 마음을 돌렸다.
그리고 용의 주인인 베르고의 공녀가 솔리안 상단의 후원자이며 공동 대표라는 게 밝혀진 것도 영향이 컸다.
위험을 무릅쓰고 사특한 마법사를 죽인 용감한 베르고의 공녀님이 그럴 리 없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제르노아의 국민들은 다들 한마음이었다.
‘우리 공녀님은 나쁜 짓 안 하셔!’
그리고 솔레아는 공동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공녀님. 그럼 아예 일선에서 손을 떼시는 거예요? 공녀님 없이 저 혼자서 어떻게…….”
이안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작 은퇴 선언을 한 솔레아는 태연했다.
“이안. 사람 인생이 얼마나 짧아. 이제 삶을 즐겨야지.”
이안은 어이가 없었다.
솔레아가 용의 주인이 되어 장수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제르노아의 온 국민이 다 알고 있었다.
최근 솔리안에서 인수한 켈르그 출판사에서 출간한 동화책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공작저 정원에서 고양이마냥 널브러져 자고 있는 저 용에게도 직접 들은 얘기니 거짓일 리 없었다.
“……길어야 70년 정도 살게 될 평범한 인간인 저한테 상단을 넘기시겠다니.”
“이안. 상단은 원래 인간이 관리하잖아.”
“그래도 공녀님이 계신데 제가 어떻게…….”
“그럼 너 죽고 나면 그 뒤로 70년 동안은 내가 관리할게.”
솔레아의 맑은 보라색 눈이 초롱초롱 반짝였다.
누가 봐도 일에서 도망가고 싶은 눈치였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같이 일한 시간이 있는데 제가 세상을 뜨고 나면 70년 동안은 책임지겠다는 소리를 어쩜 그렇게 해맑게 하세요.’
이안은 속엣말을 삼키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공녀에게 물었다.
“……그렇다고 이제 막 사업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그만두시겠다뇨.”
“아예 손을 떼겠다는 뜻이 아니야. 고문으로 있을 거고, 상단에서 내 도움을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도울 거야. 다만, 이제 솔리안 상단의 대표로 나가는 자리엔 내가 아니라 이안, 네가 나가게 될 거야. 단주로서.”
‘단주’
이안이 평생 그려 왔으나 결코 얻을 수 없던 직함이었다.
아버지가 이끄는 클레버 백화점에서 자라며 얼마나 꿈꿨던가.
언젠가 그 백화점의 주인이 되어 손님들을 맞이하고, 물건들을 직접 관리하는 일을.
그러나 어른이 된 후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막연히 불가능할 거라 생각한 꿈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공녀님을 만나고 모든 것이 변했다.
공녀의 입에서 달콤한 제안이 또 흘러나왔다.
“그리고 베르고 영지 내의 부지를 샀어.”
“네?”
“솔리안 백화점, 이제 세워야지. 거기서 우리 상단에서 직접 제작한 물품들을 팔 거야.”
“……네? ……백화점. 아, 네. 있어야죠. 그럼요.”
공녀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이안은 조금씩 정신이 멍해졌다.
백화점.
백화점을 세운다고?
“응. 사무실도 필요할 테니까. 매번 공작저로 와서 보고할 순 없잖아. 공장장들이랑 직원들도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불편했을 거야.”
“아, 네…….”
“거기 주인은 너야, 이안.”
이안은 문득 공녀가 제 정체를 밝힌 날, 사방이 막힌 방에서 제게 건넸던 제안이 떠올랐다.
‘네 스스로 네 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돕겠다. 나를 이용해.’
귀에서 이명까지 들려왔다.
이안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솔레아에게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공녀님. 저는 아직 혼자서 백화점을 이끌 만한 재목이 아니고…….”
“이안. 내가 긴 여행을 하는 동안 솔리안을 이끈 건 너야. 너 아니면 없어.”
“그럼 제가, 제가 솔리안 백화점의…….”
“예, 우리 이안이 이제부터 사장님이세요.”
이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솔레아는 느긋한 목소리로 말하며 여러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건축가들과 조각가들의 이력서와 건축 설계 도면, 완공 시의 예상 도안들이었다.
“감격은 백화점 완공되고 나서 해. 건축가는 몇 명 추려 봤는데 이 중에서 네가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고르고. 비용은 신경 쓰지 말고 골라. 건물까지 내 은퇴 선물이야.”
“누가, 누가…… 은퇴하면서 선물을 주고 가요…….”
“날 이용하라고 했잖아, 이안.”
씩 웃는 공녀님의 얼굴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안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스스로를 향한 의심이 가득했다.
이안은 간신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상단을 받을 순 없다.
베르고의 자본과 공녀님의 인맥, 아이디어와 추진력이 없었으면 결코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제가 공녀님의 빈자리를 몇 주 채웠다고 해서 상단을 물려받을 순 없습니다. 아직은 공녀님이 필요해요.”
생글생글 웃고 있던 솔레아의 입꼬리가 차분하게 내려갔다.
“이안. 네 꿈이 큰 백화점의 주인이 돼서 호의호식하는 거라면 내가 한 10년 더 일할게. 솔리안이 완전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그런데 그게 정말 네 꿈이 맞아?”
이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네 능력을 마음껏 펼치고, 그에 합당한 결과를 돌려받는 것. 그게 네가 바라는 거 아니었어?”
“…….”
솔레아의 맑은 보라색 눈을 보며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날 도와준 널 위해 판을 깔아 줄 뿐이야. 이제 판을 키우는 건 네 몫이야.”
“……네.”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안은 하릴없이 솔레아가 내민 각종 문서들을 품 안 가득 안고 집무실을 빙 돌아 나왔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벅차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손이 떨려 오고,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함부로 입을 열었다간 소리를 지를 것 같아서 이안은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때마침 계단 아래에 서 있던 라트엘이 이안을 발견했다.
“마차를 준비해 뒀습니다.”
“마차요?”
라트엘은 당연한 걸 뭘 묻냐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백화점을 세울 부지로 가 봐야 될 거 아닙니까. 사장님.”
“……네. 알았어요.”
이안은 벌렁대는 심장을 겨우 가라앉히고 라트엘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대기 중인 마차 앞에 익숙한 이가 서 있었다.
무난한 검은 정장을 입고 남색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옆으로 넘긴, 서대륙의 마법사였다.
통롤러를 신나게 팔아 치우는 동안 안 보여서 그만뒀나 했는데.
이름도 모르는 저 남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또 저이와 같이 일하게 되는 건가?
이안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전과 달리 유순한 눈으로 이안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옆에 서 있던 라트엘이 입을 열었다.
“이안 사장님의 비서로 일할 사람입니다.”
“네? 하지만 저분은 서대륙의 마법사라고 들었는데요.”
게다가 함께 일을 하는 동안 미심쩍은 부분들도 많았다.
마법사라곤 하나 눈앞에서 마법을 부리는 걸 직접 본 적이 없었고, 마법사치고는 손이 너무 거칠었다.
마치 일평생 험한 일을 한 것처럼.
눈썰미 좋은 이안이 그걸 모를 리는 없었지만 공녀님이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껏 모른 척했었다.
어느 순간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길래 공녀님이 저 ‘마법사’에게 부여한 역할이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제 비서라니.
“안녕하십니까. 돈입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말을 할 줄 알았어요?!”
돈은 쑥스럽다는 듯 빙긋이 웃으며 마차 문을 열었다.
이안과 라트엘을 마차에 태운 후 돈 역시 마차에 올라탔다.
어지간해선 놀라지 않는 이안은 빠르게 평정심을 찾으려 했지만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대륙 마법사라는 것도 거짓말인 것 같았다.
이안은 머릿속으로 재빨리 상황을 정리하고 물었다.
“……서대륙 마법사라고 하고 다닐 때는 그래야 했으니 그랬겠죠. 공녀님이 지금 그쪽을 제게 붙이신 것도 이유가 있으실 거고요. 또 뭔가 그쪽을 이용하는 계획이 있는 건가요?”
판을 바꾸려는 공녀님의 큰 그림이라면 자신도 알고 함께 대비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돈은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짤짤 흔들었다.
몇 달 전과는 달리 순박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때보다 지금이 더 자연스러운 걸 보니 이게 본모습인 듯했다.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원래는 마법사가 아니라 노예였습니다. 아, 지금은 자유인이지만…….”
이안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공녀님은 이달론과 대적하기 위해 용과 계약을 했다고 하셨다. 적당한 시기에 밝히기 위해 그간 마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셨겠지.
그래서 저자를 대리인으로 세운 거고.
제국어를 할 줄 모르는 서대륙 마법사라고 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모든 일이 끝난 지금, 굳이 저자를 곁에 두시는 이유가 뭐지?
이안의 심각한 표정을 본 라트엘이 늘 들고 다니는 수첩을 펼쳤다.
“짜잔. 이게 뭘까요.”
짜잔이라고 말한 것치곤 지나치게 무미건조한 말투로 라트엘은 말을 이었다.
“베르고의 유능한 보좌관인 제 일정표입니다.”
빽빽했다.
과하게 빽빽해 글씨가 아니라 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디에르고 공작님의 보좌관이 왜 저를 따라 백화점 부지까지 함께 가는지?
그제야 이상한 걸 알아챈 이안이 라트엘에게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라트엘은 수첩과 함께 들고 있던 여러 장의 종이를 돈에게 넘김과 동시에 먼저 입을 열었다.
“베르고의 유일한 단점은 라트엘이 한 명뿐이라는 것이죠. 참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물론 돈이 저만큼 완벽하진 않지만 노력하는 인재니까 잘 써먹어 보십시오.”
“열,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트엘은 무신경하게 말을 이었다.
“공녀님의 전언입니다. ‘이안. 널 못 믿어서 내 사람을 심어 놓는 게 아니야. 꼼꼼하고 의심 많은 네가 혼자 무리할까 봐 걱정이 돼 내 사람을 네 곁에 붙이는 거야. 넌 내가 검증한 사람에겐 날을 세우지 않으니까.’라고 하셨습니다.”
“아…….”
확실히 그랬다.
공녀님이 믿는 사람이라면 괜찮은 자겠지, 라는 막연하고도 강한 신뢰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완성된 인재를 찾아 고용하는 것보다 돈이 훨씬 나았다.
일이야 가르치면 되지만 타고난 성품은 고칠 수 없고, 낯선 사람과 신뢰 관계를 쌓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인 후 돈에게 악수를 건넸다.
“자유인이 되고도 베르고를 떠나지 않는 걸 보니, 그쪽도 어지간히 베르고를 사랑하나 봐요.”
“……!”
눈을 동그랗게 뜬 돈은 이내 배시시 웃으며 이안의 손을 맞잡았다.
“예.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열심히 일해 보고 싶습니다.”
라트엘은 티벳 여우 같은 무심한 눈으로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사랑이 무슨 소용입니까. 월급만 밀리지 않고 잘 받으면 되지.”
디에르고가 곁에 있었다면 ‘그 쪼그맣던 너를, 어? 내가 키우다시피 했는데 너 나 안 사랑하니? 라트엘!’ 하고 서운한 티를 팍팍 냈겠지만, 아쉽게도 마차 안에 디에르고는 없었다.
세 사람이 미래를 얘기하는 동안 마차는 솔리안 백화점 부지에 도착했다.
솔리안 상단이 백화점을 세운다는 소문은 빠르게 수도를 돌아 그에게까지 흘러 들어갔다.
이안의 약혼자가 될 뻔했던 남자.
골드먼트 남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