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파티의 주인은 참석한 초대객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과 먼저 춤을 추는 게 보편적인 규칙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랏샤는 당연히 우리 아빠와 춤을 추는 게 맞지만 아직 미혼이니, 또래의 남성과 춤을 출 수도 있었다.
또는 정치적 의미를 담아 황권 강화에 도움이 될 가문의 영식을 골라 춤을 출 수도 있다.
물론 그 어떤 예시에도 공녀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그 누구보다 간절했다.
“예! 저랑 추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사람들의 관심이 우리 아빠와 오빠들에게 너무 몰려 있었다.
아직은 우리 가족끼리 시간을 더 보내고 싶은데.
나보고 돌도 안 지났다고 할 땐 언제고 다들 장가갈 각을 재고 있는 거냐고! 물론 본인들 생각은 아직 안 들어 봤지만 이렇게 관심이 쏟아지면 그렇게 되는 건 시간문제 아니겠냐고.
급기야 머릿속에서 스스로를 돌도 안 지난 아기로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랏샤는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답했다.
“말을 하지 그랬어. 공녀와 나, 둘 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춤추기엔 영 불편할 텐데.”
“그, 그래도…….”
당황한 내가 얼버무리는 사이에 아빠와 오빠들이 인파를 헤치고 다가와 랏샤와 내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가 왜 전, 폐하랑 춤을 춰!”
“전 폐하라니. 현 폐하인데. 그레이 공자 말이 심하네.”
랏샤의 농담을 또 가볍게 넘겨 버린 가족들이 랏샤와 내 사이를 가로막고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아가, 왜 갑자기 폐하와 춤을 추겠다는 거니.”
“막내야. ……국법상 아직은 안 돼. 그리고 국법이 통과돼도 내 생각에 그건…… 좋은 결정이 아닌 것 같아.”
“레아. 혹시 이것도 누가 시킨 일이야? 누가 널 조종하고 있어? 내가 출게. 내가 폐하와 춤을 출 테니까 너는 그러지 마.”
“헤이먼 공자. 그대는 나와 춤을 추는 게 무슨 큰 희생이라도 되는 양 말하는군. 그대의 처세술이 마음에 들었는데 이렇게 본심을 드러내다니.”
그 와중에 아무스는 멀찍이 선 채 생전 본 적 없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랑 춤추는 게 아니었어?’
딱 그런 표정이었다.
서운함과 약간의 배신감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잘난 이목구비.
어쨌든 내 폭탄 발언에 가족들이 모조리 달려온 걸 보니 오빠들이 아직은 연애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레이가 내 두 어깨를 붙잡고 조용히 물었다.
“산윤솔. 왜 폐하랑 춤을 추겠다고 한 거야?”
“아니, ……물론 결혼한다고 가족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랑 조금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 가면 좋잖아.”
“누가 결혼을 한다는 거야?”
“……아니, 방금 사람들이 아빠랑 오빠들한테 말 걸었잖아.”
내 얘기를 들은 헤이먼이 애써 세팅한 내 머리를 아프지 않게 콩 때렸다.
“아!”
“네가 우리 평판 올려 주겠다고 할 땐 언제고, 사람들이 우리한테 관심 가지니까 자기한테 관심 가져 달라고 하네. 으이구, 누구네 집 막내가 이렇게 제멋대로야.”
“알아, 아는데. 그래도 이제…… 우리 가족은 이제 시작이잖아.”
헤이먼이 입꼬리를 올려 환하게 웃었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입을 틀어막으며 ‘헙!’ 하고 탄성을 삼키는 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음의 짐을 완전히 덜어 버린 헤이먼은 나날이 미모를 갱신하고 있었다.
밝은 분홍색 머리카락은 햇빛을 받은 듯 반짝거렸고 투명한 분홍 꽃잎 색 눈은 곱게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그래. 우리 가족은 이제 시작이지.”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우웩, 헛구역질을 한 랏샤가 티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난번 자네의 귀환 파티에서 날 깠으니 이번엔 까지 않았으면 좋겠네.”
“영광입니다, 폐하.”
티온은 전처럼 심하게 낯을 가리지 않았다.
저번에 하루 날 잡아 내 방에서 수련회 컨셉으로 왁자지껄하게 논 뒤로 적어도 랏샤에게만큼은 경계심을 많이 푼 것 같았다.
티온과 랏샤가 음악에 맞추어 왈츠를 추고 난 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파트너와 함께 춤을 췄다.
나는 아빠와 제일 먼저 춤을 췄고, 그레이는 사라와, 티온과 헤이먼은 각각 다른 영애와 춤을 췄다.
마음이 이상했다.
내가 처음 이 세상으로 왔을 때는 오빠들이 파티엔 참석해도 춤을 추진 못했다고 했는데.
이젠 다들 우리 베르고에 관심을 가지고, 오빠들과 춤을 출 때 저렇게 밝게 웃고 있다니.
이 모든 상황이 나로 인해 바뀐 결과라는 게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때, 연주가 끝났고 공작님이 내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네 짝에게 가 보렴. 좀 있으면 용으로 변해서 궁을 때려 부수겠구나.”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아무스가 무도회장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심지어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말을 걸고 있는데도 대답을 하지 않는 듯했다.
아무스의 샛노란 눈은 오직 나만을 향하고 있었다.
“아무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환하게 웃으며 빠르게 아무스에게로 걸어갔다.
아무스는 언제 삐져 있었냐는 듯 내 웃는 얼굴을 보자마자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두 팔을 벌려 왔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스에게 안겼다.
“이제 나랑 춤출까, 산윤솔?”
“그래.”
춤을 추자던 아무스는 나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갔다.
“……짝. 혹시 그거 기억나? 산에서 추던 거, 호수 옆에서…….”
“응? ……아!”
그와 나에게 서로밖에 없던 그 시절, 마을 축제 현장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맞춰 손을 맞잡고 춤을 춘 적이 있었다.
춤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손만 잡았을 뿐 마구잡이로 발을 움직이는 막춤이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우리는 1,000년도 더 전의 그때처럼 서로 손을 맞잡고 큰 원을 그리듯 빙그르르 돌았다.
“하하!”
아무스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소리로 웃으며 내 허리를 붙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곤 한 바퀴 돌더니 나를 다시 내려놓았다.
우리는 두 다리를 번갈아 움직이며 두서없이 돌고, 또 돌며 깔깔 웃었다.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하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 내가 오른쪽으로 가면 네가 왼쪽으로 가야지!”
“아니지! 내가 팔을 올렸으니까 네가 제자리에서 돌았어야지!”
눈가에 주름이 질 정도로 밝게 웃으며 아무스와 나는 달빛 아래에서 오래도록 춤을 췄다.
* * *
이달론이 그간 저질렀던 악행이 실린 신문이 발행되어 제르노아 전체에 널리 퍼졌다.
내가 새로운 마법사 협회장이 된 지도 벌써 석 달이 지났다.
그동안 정말 안팎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나는 협회장이 됐기 때문에 전국 각지의 여러 마법사들을 하나하나 만나야 했다.
각자의 일정상 만나지 못하는 마법사들과는 편지, 또는 마력석으로 교류하며 인사를 나누고 축제를 준비했다.
대부분 내게 우호적인 반응이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었던 이달론과 달리 나는 베르고의 공녀이기에 신원이 확실했고, 언제나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해 믿음직하다는 평가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너무 어리고 세상 물정을 모르며, 마력의 양도 확실치 않다는 비판적인 의견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이달론이 조져 놨던 지방의 마법지부 예산 문제 재정비나 마법사들 보조금 및 인원 관리, 인구수가 적은 마을의 축제 홍보 등에 대한 일들 때문에 연락을 계속 주고받다 보니 그들도 곧 납득하게 됐다.
과중 업무에 미쳐 버린 K-직장인의 힘을.
‘확실히 솔레아 님이 협회장이 되시고 나서는 일처리가 빠르죠.’
‘……빨리해라, 아직 안 됐냐, 지난주에 준 건데 왜 아직 검토 중이냐, 시장 조사는 나가 봤냐. 다 같이 즐기는 축제인데 마법사들만 좋으면 그게 무슨 축제냐, 하면서 달달 볶아 대니 그렇지요.’
‘그래도 이달론이 협회장이었을 때보다는 더 사람 사는 맛이 나지 않습니까?’
‘……거야 그렇지요.’
탱자탱자 놀던 지방 마법사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들은 드디어 일 좀 하는 것 같다며 축제를 준비하는 내내 꽤 신나 했다.
아무스 역시 그레이와 헤이먼에게 끌려다니며 곳곳의 지워진 벽화를 재건하고, 돌에 새겨진 알 수 없는 문자를 해석해야 했다.
물론 그다지 성실하진 않다고 들었다.
‘음, 꽤 옛날 안료 같아.’
‘흠, 읽어 보니 썩 중요한 내용은 아닌데 굳이 해석해야 하나.’
결국 아무스의 그런 태도에 빡이 친 그레이가 중요 유적지에서 이 건방진 뱀 새끼의 눈을 파 버리겠다고 소리를 질렀고, 아무스도 참지 않고 용으로 변해 그레이와 대판 싸웠다고 들었다.
물론 지금 아무스는 성실하게 변했다.
아니, 내가 성실해지게 했다.
‘하……. 오빠. 아무스. 지금 온 가족이 이렇게 바쁜데 왜 싸우고 그래.’
‘아니, 이 새끼가 뺀질거리면서 처놀잖아! 일하는 놈 따로 있고 노는 놈 따로 있나.’
‘솔레아. 나는 그냥 좀 더 자고 싶을 뿐이다. 매일 새벽같이 나가서 지방까지 날아가는 게.’
나는 주먹으로 책상을 쿵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그레이! 그래도 뱀 새끼 눈깔을 파 버린다고 하면 안 되지! 얘가 이래 보여도 나이가 천 살이 훌쩍 넘는데! 어르신 데리고 다니면서 그런 건 좀 배려해야지!’
‘……산. 이럴 때 노인 우대는 필요 없다.’
‘아무스! 너도 인마! 어? 평생 잘래? 앞으로 영원히 처자게 해 줄까?!’
‘……미안.’
‘둘이 손잡고 화해해. 다음에 또 유적지에서 싸웠다는 소리 들리면 둘 다 황궁으로 보내 버릴 거야. 아빠는 퇴근할 수 있어서 좋아하시겠다.’
황궁으로 보낸다는 소리에 두 사람은 조용히 손을 잡고 서로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방을 나갔다.
……아빠는 황궁에서 퇴근을 못 하고 있었다.
‘폐하! 우리 아빠 퇴근 좀 시켜 주세요!’
‘아이고, 불쌍한 우리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용의 시험 받다가 치매 오셨네.’
‘……이 씨발.’
마법 협회 일 때문에 황궁에 찾아갈 때마다 랏샤는 매번 그런 식으로 빠져나갔다.
가끔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들른 공작님은 나와 오빠들에게 인사를 하고 애잔한 얼굴로 애써 웃어 보였다.
‘그래도 침대는 아주 좋단다. 잠도 매일 꾸준히 자고 있어. 왔다 갔다 할 시간이 부족할 뿐이지. 아빠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렴, 얘들아.’
……하지만 아빠. 원래 휴게실에 라꾸라꾸 있는 직장은 가는 게 아니라고 했단 말이에요.
헤이먼과 그레이가 문화 부흥 및 재건 사업 때문에 바쁘고, 나는 나대로 ‘산’ 사업과 솔리안 상단, 마법사 협회 때문에 공작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 티온이 자연스럽게 베르고의 대외 활동에 전면으로 나서게 됐다.
티온은 사나운 인상을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만들어 보려는 노력으로 파티나 오찬에 참석할 때마다 안경을 쓰고 갔다고 들었다.
‘가족들이 모두 바빠 장남인 제가 대표로 왔습니다. 베르고 공작가의 티온입니다.’
라는 말을 거울 앞에서 밤새 연습하는 걸 정령들이 엿보고 귀여워 죽으려 하는 통에 나도 알게 되었다.
‘잠 좀 자자. 얘들아!’
‘하지만 아가 불곰 너무 귀여운걸!’
‘누가 우리 아가 불곰 훔쳐 가면 어떡하지!’
나는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겨우 잠이 들었다.
이제 티온에게도 화려한 색의 초대장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제 이름이 찍힌 예쁜 초대장을 손에 든 티온은 티 나지 않게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볼을 발그레 붉히며 웃었다.
그리고 헤이먼의 문화 부흥 과중 업무 어벤져스 군단이 만든 노래들 중에는 동요도 있었는데 아직 듣지 못했다.
축제 날 음악회에서 들려준다고 해서 기다린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매일 지휘봉을 들고 연습을 하러 가길래 ‘너 음악회 지휘도 해?’ 하고 물었더니 헤이먼은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렸다.
“난 체력만 있으면 다 잘해, 솔레아.”
어우, 재수 없고 너무 잘생겼네. 우리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