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넓은 홀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한 것 같았다.
몇 개의 계단 가장 위에 자리한 황좌에 현 황제가 고개를 숙인 채 졸며 앉아 있었고, 그 바로 아래에 카라샤펠 황녀 전하가 서 있었다.
우리가 온 걸 확인한 랏샤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본인이 생각한 것보다 늦어서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아니, 근데 우리도 일찍 온다고 온 건데. 사람이 여섯, 아니 사람 다섯에 용이 하나잖아요. 시간 맞추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라고요.
속으로 투덜거리며 입술을 삐죽거리자 랏샤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졸고 있던 황제가 슬그머니 눈을 뜨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시선이 제 딸을 향했다.
“랏샤. 오늘은 사람들이 많구나.”
“예, 폐하. 왜냐하면 오늘은 제 즉위식이거든요.”
“오! 그렇구나,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는 날이구나. 황제께 축하드린다고 전해 드리렴.”
“네, 그럴게요.”
황제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하자 귀족들의 소곤대는 소리도 커졌다.
‘정말로 폐하의 정신이 온전치 않으시군.’
하지만 황제와 랏샤는 그런 얘기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즉위식은 언제 시작하는 거니, 나도 보고 싶구나.”
“지금요. 폐하가 원하시면 시작해요.”
랏샤는 계단 아래쪽에 서 있는 시종에게 눈짓을 보냈다.
“즉위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느린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간 랏샤는 황제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황제가 활짝 웃으며 일어서자 그녀는 곧장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금황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황좌를 물려주게 되었으니 원래대로라면 즉위식에서 그가 긴 축사를 읽어야 했다.
원래의 절차는 그러했다.
물론 오늘 즉위식에선 하지 않겠지. 황제는 지금 여기가 어딘지도 정확히 모르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랏샤는 황제의 손을 잡은 상태로 그에게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아버지. 제가 황제가 된다면, 해 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세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던 황제는 몸을 웅크려 랏샤와 눈을 맞췄다.
“세상에. 우리 딸이 그런 큰 사람이 된단 말이오?”
“네, 열심히 해 보겠다네요. 해 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해 주세요.”
황제는 여전히 놀란 토끼처럼 눈을 끔뻑거리다가 이내 빙그레 웃고는 랏샤를 당겨 안으며 말했다.
“몸조심하렴.”
“……예, 폐하.”
짧지만 그 어떤 말보다 다정한 다섯 글자가 황제의 축사였다.
황제를 평생 보좌했던 보좌관이 계단을 한 칸씩 올라갔다. 아마 그가 황제를 대신해 황제의 왕관과 망토를 랏샤에게 전달할 모양이었다.
아무리 랏샤라도 제 아버지가 쓰고 있는 관을 벗겨서 직접 머리에 쓸 순 없으니까.
보좌관이 황제의 망토를 벗겨 내 랏샤에게 둘러 주었다. 그리고 황제가 머리 위에 쓰고 있던 금빛 왕관도 벗겨 냈다.
황제의 시선이 보좌관의 손에 들린 왕관을 따라 움직였다. 그것이 제 딸의 머리에 씌워지자 황제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랏샤가 몸을 일으켜 꼿꼿이 허리를 펴고 섰다.
넓은 홀에 모인 귀족들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던 새로운 황제가 황좌에 앉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함성이 터졌다.
제르노아에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는 순간이었다.
즉위식이 끝나고 큰 홀에서 무도회가 시작되기 전 랏샤 황녀, 아니, 폐하와 우리 가족들은 응접실에서 독대를 가졌다.
왕관을 쓴 랏샤는 평소처럼 득의양양한 표정이라 사실 황녀일 때와 썩 달라 보이지 않았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황제인 사람 같았다.
“폐하. 즉위를 경하드립니다.”
“오늘은 내가 주인공인데 용이 그렇게 휘황찬란하게 등장하면 어떡해.”
“말이 안 움직여서 어쩔 수 없었어요. 폐하가 늦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광고판이 너무 화려하잖아. 어쨌든 베르고에서부터 그걸 달고 왔다니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겠지.”
뜬금없는 랏샤의 말에 아빠와 우리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어리둥절해했다.
미소를 지은 랏샤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물었다.
“설마 몰랐어? ……메리.”
랏샤의 시녀가 황제의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녀가 커다란 붉은 천을 들고 들어왔다.
……설마.
메리는 다른 시녀의 도움을 받아 응접실의 큰 테이블 위에 천을 펼쳤다.
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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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카라샤펠 로즈 폰 사파테아도 드 제르노아 황제 즉위》
(역대 최고 긴 이름! 기록 경신!)
28년 전통/정치 전문/황제 폐하
☞ 새로운 황제 폐하가 인정하신 용의 존재! 설마 아직도 못 믿으십니까?
☞ 새로운 황제 폐하가 인정하신 마법사 솔레아의 마력! 설마 아직도 못 믿으십니까?
베르고 공작저로 문의 바람.
확인 못 할 시 명예 100% 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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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저게 뭐야!”
설마가 사람을 또 잡네.
온 가족이 고개를 휙 돌려 그레이를 바라봤다.
어쩐지 직접 고삐를 묶겠다고 밖으로 튀어 나가더니.
그레이는 입을 막은 채 킥킥거리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아니, 웃기잖아.”
“폐하가 언짢아하셨으면 우리 다 죽은 목숨이야!”
“넌 어떻게 생사고락을 함께한 폐하를 그렇게 옹졸하신 분으로 판단할 수가 있니.”
그레이가 오히려 나를 나무라듯 눈썹을 찡그리고 바라봤다.
랏샤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둘 다 나를 놀릴 생각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러게 말이야. 날 뭘로 보고.”
헤이먼이 얼른 끼어들었다.
“저는 재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공자는 처세술에 능하군. 마음에 들었어.”
갑자기 아빠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헤이먼이 왜 마음에 드십니까!”
“깜짝이야. 공, 아직 감이 안 오나 본데 나 이제 황제입니다?”
“황, 황제이셔도! 황제이셔도……!”
“아들들을 언제까지 끼고 살 겁니까. 이제 슬슬 하나씩 보낼 준비도 하셔야지.”
“안 됩니다!”
“그럼 딸은 괜찮고?”
“폐하!”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네.”
랏샤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좌우로 도리도리 저었다.
아빠를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지만 말리지 않았다.
……내가 놀림당하는 것보다 아빠를 내어 주는 게…….
아니야. 효녀가 돼 보기로 결심했잖아.
나는 빠르게 마음을 고쳐먹고, 억울한 듯 주먹을 움켜쥔 아빠의 팔을 붙잡았다.
“아빠. 우리 이제 그만 게스트 룸으로 가서 쉬어요. 조금 있다 무도회에도 참석해야 하잖아요.”
“공녀. 춤은 좀 늘었어?”
“……예. 나름 늘었습니다.”
오늘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속성으로 아빠와 오빠들에게 돌아가며 배우긴 했다.
심지어 아빠와 오빠들이 바쁠 땐 라트엘이 내 파트너가 되어 줬다.
‘아가씨는 확실히 재능이 있으십니다.’
‘정말요?’
‘예. 배운 걸 정확히 반대로 하시는 재능이요. 뛰어나십니다.’
‘……라트엘. 내가 마법사가 된 걸 잊었나요?’
‘유능한 제가 없을 공작가를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미어지네요.’
‘……앞으로는 좀 덜 유능한 사람을 뽑아야지, 안 되겠어.’
쉴 새 없이 놀림을 당하긴 했지만 어쨌든 라트엘에게서도 열심히 배웠다.
“그런데 왜요? 저랑 춤을 추시게요? 참. 제일 먼저 같이 춤을 출 사람은 정하셨어요?”
“안 그래도 고민 중이야. 일등 공신인 용과 출까…….”
“으. 싫어.”
아무스가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인간. 나는 너와 춤을 추기 싫다.”
호위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지만 아무스는 여전히 냉정한 얼굴이었다.
“폐하. 아무스가 사람을 좀 가려요. 한 번만 봐주세요.”
“그럼 그대의 아버지와 춤을 춰야겠어. 이쯤 되면 내 취향에 연상도 추가해야 하나…….”
“아무스도 사교계에 발을 들여야죠. 아무스, 폐하랑 춤을 추는 건 큰 영광이야.”
“……짝.”
아무스가 울상이 되어 내 손을 잡았다. 하지만…… 아빠는, 아빠는 조금 그렇잖아.
그 이후로도 한참을 옥신각신 서로를 놀려 먹다가 겨우 응접실에서 나왔다.
무도회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진이 빠지는 것 같았다.
아까 즉위식에서 입었던 옷보다 조금 더 화려한 디자인으로 갈아입고, 아빠와 오빠들의 옷에도 장신구를 더했다.
아무스에게도 철저히 말해 뒀다.
“절대, 절대로. 아무리 답답해도 변신하면 안 돼. 황궁을 부수면 안 되니까. 알았지?”
“응. 그럼 옷은 벗어도 돼?”
“외투만! 외투만 벗는 거야. 정 답답하면 외투만 벗어!”
“당연하지. 누굴 기본 상식도 없는 용으로 보는 거야?”
“…….”
말없이 아무스를 노려보고 있는데 티온이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러곤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막내야, 걱정 마. 기사 몇 명을 데려왔어. 아무스가 단추만 풀어도 양모에 둘둘 말아서 밖에 내다 버릴게.”
“아니, 그건…….”
“아가 불곰 처형은 말이 심해.”
“주먹이 더 심하니 괜찮아.”
어? 우리 오빠가 언제부터 이렇게 험악해졌지.
생각해 보니 아무스가 내 옆에 붙어 다닌 뒤부터였던 것 같다.
막냇동생의 연애. 순둥한 큰오빠를 진짜 짐승으로 만듭니다.
무도회가 열리는 홀로 다 함께 걸어갔다.
공작님이 시종에게 초대장을 내밀자 그는 종이를 확인한 뒤 문을 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베르고 공작가분들과 용 아무스님이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큰 목소리와 함께 우리가 홀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게 대체 몇 달 만의 파티인지.
체감상으로는 수백 년 만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빛이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전의 파티에선 신기한 걸 바라보듯 힐끔힐끔 관찰했었는데, 이번엔 대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용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지만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공녀님!”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깜짝 놀라 대답하며 뒤돌았다.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내게 몰려들어 와 질문을 퍼부었다.
“용의 마력을 받으셨다는 게 사실인가요?”
“이달론이 그렇게 나쁜 놈이었다면서요? 전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세상에. 이게 공녀님이 이번에 새로 만드셨다는 브랜드의 옷인가요? 너무 멋져요! 어디서 살 수 있나요?”
“마법사 협회장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예술 지원 사업도 하신다면서요? 이번에 저, 그롤릭 린체르타가 음악회를 여는데 참석해 주시겠어요?”
“복지 재단도 운영하신다고 들었어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제가 후원하는 극단에서 자선 공연을 여는데 혹시…….”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에 당황해 가족들을 돌아봤지만 다들 비슷한 상황이었다.
“티온 공자님! 어쩜 그렇게 큰 마물들을 잘 길들이세요?”
“어릴 때 우유를 많이 드셔서 키가 크셨나요?!”
“공자님은 검술 훈련을 하루에 얼마나 하세요?”
“공자님 여자 친구 있으세요?!”
잠깐. 마지막 질문 누구야. 난 아직 우리 큰오빠를 보내 줄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다급히 시선을 돌려 봤지만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누가 방금 그 질문을 던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헤이먼 공자님이 만드신 메트로놈 너무 잘 쓰고 있어요!”
“헤이먼 공자님 어쩜 그렇게 명석하세요?”
“공자님은…… 정말, 제가 본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우세요.”
안 돼. 난 아직 둘째 오빠도 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그레이 공자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럼 저는 공자님의 애인이 되고 싶어요.”
“그레이는 나랑 제일 친하지!”
……빌 목소리가 들린다. 저긴 빌이 막아 주겠군.
“베르고 공작님. 얼굴에 이리 큰 흉터가 생기셔서 어떡해요…….”
“그래도 공작님 특유의 냉기 어린 차가운 시선과 다정한 미소는 그대로시네요. 저는 사실 예전부터 공작님을…….”
마침 랏샤가 등장했다. 나는 사람들을 미친 듯이 헤치며 랏샤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폐하아아아! 오셨습니까! 춤을! 춤을 춰 주세요!”
“……그대와? 지금?”
뭐든 좋으니까 이 상황을 좀 끊어 가 주세요. 제발. 난 아직 우리 가족들 중 그 누구도 보내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