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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165/192)

165화

아무스와 함께 날아갈까, 마차를 타고 갈까 고민하던 차에 앤이 나를 뜯어말렸다.

“날아가시면 바람 때문에 머리랑 옷이랑 다 엉망이 되잖아요! 안 돼요! 마차 타고 가 주세요!”

랏샤의 즉위식엔 내가 새로 만든 브랜드인 ‘산’을 입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간지가 철철 흘러넘쳐야 했다.

아무래도 앤의 말을 듣는 게 낫겠네.

아빠와 오빠들에게도 ‘산’에서 만든 코트를 입혔다. 물론 나도 입었고.

아무스는 불퉁한 얼굴로 마차 앞에 서서 발끝으로 잔디를 짓이기고 있었다.

“아무스. 왜 화났어?”

“너랑 날고 싶어. 인간들 많은 답답한 파티 가기 싫어. 너랑 하늘 산책하고 싶어.”

“아니, 그건…… 그래도 오늘은 랏샤의 즉위식이고…….”

‘하늘 산책’은 몸에 무리가 많이 가니까 오늘은 좀 쉬었으면 하는데.

내 난처한 표정을 본 아무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 볼을 감싸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괜찮아. 참을게.”

“크흠! 큼! 흠! 크흡!”

공작님이 금방이라도 피를 토해 낼 것처럼 헛기침을 해 댔다.

적당히 하라고 눈치를 주는 것 같았다.

티온은 죄수를 감방에 집어넣는 간수처럼 아무스를 다소 거칠게 마차에 태웠다.

“아가 불곰. 조금 감정적인 것 같은데.”

“착각이다.”

티온의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아무스 편을 들어 주고는 싶었지만 티온의 저런 모습을 보는 게 재밌어서 그저 웃기만 했다.

가족들에게 사랑을 받는 건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나는 일이었다. 이제라도 알게 돼 다행이었다.

모두 마차에 올라타 출발하려고 할 때였다. 마부의 ‘이야압!’ 하는 우렁찬 기합이 들렸다. 그런데 마차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압!”

다시 들렸다. 그래도 마차는 출발하지 않았다.

공작님은 마부와 통하는 쪽의 작은 창을 열고 그에게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공작님. 말들이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헤이먼이 수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얘들아……. 말들이 왜 그럴까.”

순식간에 마차 안이 밝은 빛으로 가득 찼다.

“분홍아! 우리가 물어보고 올게!”

“힝구 하지 마! 알아보고 올게!”

“분홍이 조금만 있어!”

정령들이 잽싸게 마차 밖으로 날아갔다.

어째…… 헤이먼이 정령들을 다루는 솜씨가 나날이 발전하는 거 같은데.

정령들은 몇 초도 안 되어 금방 마차 안으로 다시 날아왔다.

“용의 기운이 느껴져서 발이 안 떨어진대!”

“응! 무섭대! 마구간 가서 쉬고 싶대!”

“여섯 명 무겁고, 용의 기운 무섭대!”

모두의 시선이 아무스에게 향했다.

아무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짧은 탄성만 뱉어 냈다.

“아.”

그러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외투를 찢듯이 벗었다.

“어쩔 수 없군. 마차는 내가 몰겠다!”

금방이라도 변신할 모양인지 아무스가 바지 버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빠와 오빠들이 내 눈을 가리고 동시에 소리쳤다.

“나가서 벗어, 인마!”

나는 여러 개의 손에 시야가 막힌 채로 웃음을 꾹 참고 말했다.

“크흐흐, 큭. 아무스. 옷 안 찢고도 변신할 수 있잖아. 용으로 변했다가 황궁에서 옷 입은 채로 인간으로 돌아와. 이제 마력도 충분하잖아.”

아무스는 장난기 가득한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짝의 가족들은 나를 아무 데서나 옷을 벗고 다니는 변태로 보는 것 같아.”

내 시야를 가리고 있던 손들이 그제야 내려갔다.

아무스가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순식간에 변신했는지 어디선가 정원사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이고, 장미 새로 심은 건데! 아이고, 내 장미! 공작니이이임! 예산 다 날아가요!”

아빠가 창을 열고 정원사에게 소리쳤다.

“솔레아가 대신 충당할 거니 걱정 마라! 괜찮다!”

“어?”

내가 놀란 눈으로 바라봤지만 공작님은 태연했다.

“우리 딸 이제 돈도 버는데 아빠 좀 도와주렴.”

“아니, 아빠도 일하시잖아요.”

“너는 상단이 있고 아빠는 없잖니.”

“……아빠는 작위가 있지만 전 작위가 없잖아요.”

“넌 돈 잘 벌잖아. 내가 받아 온 횡령 자금 중 일부분이 네 브랜드 투자금으로 들어갔다던데.”

그레이가 깐죽거리며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랏샤는 용을 테마로 브랜드를 론칭한 내 사업을 국가사업으로 밀어줄 심산인지 꽤 많은 돈을 투자해 줬다.

나랏돈으로 이래도 되는 거냐고 묻자 랏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럼 세금도 안 낼 작정이었어? 너 돈 벌면 투자금에 이자 붙여서 회수할 건데?’

‘……장사를 하시지 그러셨어요.’

‘뭐 하러. 황제가 되면 친구가 하는 장사로 앉아서 돈 벌 수 있는데.’

‘어우, 얄미워.’

이제 랏샤에게 눈을 흘기며 얄밉다고 말해도 그녀의 호위 기사들은 내게 검을 들이대지 않았다.

그만큼 막역한 사이라는 걸 이젠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나는 오늘 즉위할 새로운 황제의 최측근이었다.

마부가 마차 밖에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공작님. 고삐가 말 전용이라 용 님에게 맞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레이가 쏜살같이 마차에서 내렸다.

“내가! 내가 좋은 거 갖고 있어! 내가 할게!”

그레이가 밖에서 요란스럽게 뛰어다니자 티온이 불안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마차를 그레이가 모는 건 아니겠지.”

“형은 무슨 그런 소리를 해. 그레이가 미친 것도 아니고.”

다행히 그레이는 금방 다시 마차에 올랐다. 창문을 연 그레이가 마차 외벽을 탕탕 두드리며 아무스에게 외쳤다.

“출발!”

그레이의 외침과 함께 마차가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윽!”

맞다. 안전벨트가 없지.

마차가 급경사를 이루며 위로 솟아오르듯 떠올랐다.

그 바람에 아빠와 티온이 의자에서 떨어져 그레이와 나, 헤이먼이 앉아 있는 쪽으로 굴러떨어졌다.

“아, 형! 징그러워!”

“미안.”

티온의 양팔 사이에 갇힌 그레이가 질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티온은 마차가 수평을 찾자마자 얼른 원래 자리에 앉았다.

마차 천장에 머리를 쿵 박은 아빠 역시 자리에 다시 앉고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분노를 삼켰다.

“……솔레아.”

“네.”

“아빠는 이 연애 반대다.”

“아하하하!”

깔깔 웃고 있는데 헤이먼이 진지하게 끼어들었다.

“옛날부터 말을 험하게 모는 자는 성질이 더럽다고 했어.”

“어? 우리나라에도 그런 말 있는데. 운전할 때 나오는 성질이 본래 성격이라고.”

티온은 부드럽게 웃으며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예전에 네가 살던 나라 말이지? 이제 너는 여기 있으니까.”

나는 빙긋이 웃으며 티온의 두껍고 큰 손을 잡아 내렸다.

“응. 내가 살았던, 우리나라. 다음에 더 많이 얘기해 줄게. 또 밤새워 놀자. 다 같이.”

공작님이 창밖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아빠도 끼워 줄 거니?”

“아, 아빠 눈치도 없이. 애들끼리 노는데.”

그레이가 팔짱을 끼며 공작님을 놀리기 시작했다.

흉터가 있는 아빠의 오른쪽 눈이 움찔거렸다. 헤이먼도 공작님을 놀렸다.

“아무래도…… 형제끼리 노는데 아빠가 끼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공작님이 입술을 꾹 다물고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말했다.

“그냥 조용히 있을 건데 뭐 그렇게 대놓고 사람을 따돌리고 그러니, 너희는…….”

결국 아빠만 빼고 우리 모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나는 시무룩해진 공작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빠. 텐트 사 주세요. 엄청 큰 거. 저 캠핑 한 번도 안 가 봤거든요. 정원에서 텐트 치고 놀아요. 아빠도 같이.”

그제야 굳어 있던 공작님의 표정이 풀렸다.

“아빠가 그런 건 잘하지.”

“뭘요? 텐트 치는 거요?”

“아니. 돈 쓰는 거. 아빠가 그거 하난 기가 차게 잘한단다.”

티온이 곱게 눈을 접어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막내야. 앞으로도 하고 싶은 거 있으면 그때그때 바로 말해.”

“……응.”

어쩐지 쑥스러워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다시 마차가 아래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나와 헤이먼, 그레이가 아빠와 티온 쪽으로 우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티온은 양팔을 벌려 그레이와 내 허리를 붙잡았고, 아빠도 헤이먼을 잡아 주려 했지만 정령들이 먼저 끼어드는 통에 그럴 틈조차 없었다.

정령들은 헤이먼의 몸이 공중에 뜨자마자 나타나 마력으로 헤이먼을 안정적으로 다시 앉혔다.

“우리 분홍이, 안 다쳤어?”

“분홍이 조심!”

헤이먼은 꽃같이 웃으며 정령들에게 답했다.

“응, 고마워.”

이상하게 정령들은 헤이먼이 ‘고마워.’라는 말만 하면 눈물을 흘리며 저들끼리 끌어안고 난리를 쳐 댔다.

‘우리 애 다 컸네.’

‘장가가도 되겠네.’

‘정령은 이제 여한이 없네.’

같은 소리를 해 대며.

아빠는 허공에 뻗었던 두 손을 머쓱하게 내리고 바지춤에 스윽 문질러 닦았다.

“와! 용이다!”

“하늘에서 내려왔어!”

밖에서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오는 걸 보니 황궁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급강하했겠지.

이윽고 마차가 쿵 소리를 내며 착륙했다.

바닥에 부딪친 충격으로 마차가 꽤 흔들린 탓에 나나 가족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래서야 앤은 물론이고 랏샤에게까지 핀잔을 듣게 생겼네.

흘러내린 은발을 쓸어 올리던 아빠의 시선이 둘째 아들에게 향했다.

“……너는 멀쩡하구나. 그것도 평소보다 더.”

헤이먼은 말 그대로 티 하나 없이 아름다웠다.

피부과에서 관리받는 연예인마냥 빛나는 얼굴과 방금 청담 숍에서 세팅받고 나온 것 같은 헤어스타일까지. 완벽 그 자체였다.

“집중의 박수.”

“짝! 짝! 짝!”

“응! 왕주인 왜?”

“왕주인 왜 불렀어?”

바깥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용 님이야!”

“나 용 실제로 처음 봐!”

“시종장님을 모셔 와야 되는 거 아니야?!”

바깥의 시끌벅적한 소리와는 전혀 관련 없다는 듯 마차 안의 정령들은 순진무구한 표정이었다.

“얘들아. 헤이먼도 예쁘고 좋지만, 헤이먼의 가족인 우리한테도 가끔 좀 신경 써 주지 그러니?”

정령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내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왕주인은 바보야?”

“뭐?”

“왕주인도 힘이 있으면서 왜 우리한테 일을 시키는 거야? 우리 아기 분홍이는 마력이 충분치 않잖아. 왕주인은 힘 넘치면서 왜 그래!”

정령들은 쌜쭉 혀를 내밀곤 휙 사라져 버렸다.

아니, 저것들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미처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정령들이 하는데 내가 못 할 리 없지.

나는 마차 문을 엶과 동시에 온 가족들의 옷과 머리를 새롭게 세팅하고 피부도 살짝 광이 나도록 만들었다.

열린 문 앞에는(진짜 졸라 다행히도) 멀쩡히 옷을 입은 아무스가 서 있었다.

‘산’에서 만든 망토가 바람에 휘날렸다.

검은 천의 아랫단 부분에는 얇은 금사로 용의 비늘처럼 촘촘히 무늬를 박았다. 그리고 망토의 단추 역시 금색으로 가운데에 가늘고 긴 블랙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어 용의 눈을 연상시켰다.

망토의 왼쪽 가슴 부분에는 ‘산’이라는 글씨가 필기체로 적혀 있었다.

아무스의 검은 긴 머리가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천천히 마차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가자, 산.”

……내디디려는데 뒤에서 그레이가 잡아당겼다.

“아빠 먼저 내리셔야지, 산윤솔!”

“아! 세팅한 머리를 왜 잡아당겨!”

“넌 예의가 없어? 너네 나라에선 예의를 그렇게 가르쳤어?”

“이 그레이 새끼가 나라를 들먹거려? 내 애국심을?”

그레이와 내가 마차 안에서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하자 아빠와 티온, 헤이먼은 익숙한 일이라는 듯 우리를 두고 먼저 내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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