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동이 터 올 때쯤이 되어서야 아무스는 나를 놓아주었다. 내가 춥지 않도록 온몸을 끌어안은 아무스가 작게 속삭였다.
“눈 감고 있어. 바로 방으로 가자.”
“……응.”
목소리가 잠겨서 ‘응.’이라는 짧은 대답조차 쉽게 나오지 않았다.
몇 초 뒤 꼭 감고 있던 눈을 뜨자 내 방 안이었다. 아무스는 나를 침대에 내려놓고 화장실로 가 수건을 물에 적셔 왔다.
“미안. 내가 닦아 줄게.”
“……응.”
“자도 돼. 옷 갈아입혀 놓고 나갈게.”
자꾸만 눈이 감겼다. 온몸이 무거워서 축축한 수건으로 내 몸을 구석구석 닦아 주는 아무스의 손길에도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누군가 방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에 겨우 눈을 떴다.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누구, 누구세요.”
본능적으로 이불을 끌어 올려 몸에 덮으며 대답했다. 부은 눈을 떠서 몸을 살펴보니 다행히 잠옷이 입혀져 있었다.
언제 집에 돌아왔는지도 가물가물했다. 기억을 더듬어 아무스가 나를 옮겨 준 걸 겨우 상기해 냈다.
“야. 너 어제 집에 몇 시에 들어왔어? 아무스랑 둘이서 따로 갔잖아! 집에 몇 시에 왔어!”
“그레이! 솔레아 자는데 괴롭히지 마라!”
“아무스 그거 어제 공장에서 나갈 때부터 눈알이 번뜩거렸다고! 형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 야! 솔레아! 언제까지 자는 거야! 어제 몇 시에 집 들어왔어!”
“……다, 다, 다 큰 어른이! 집에 좀 늦게 들어올 수도 있지! 그레이! 동생의 사생활을 지켜 줘야지!”
“아빠 목소리 떨리는 거 티 나요. 솔직해지세요.”
잠깐 침묵이 흐르다가 다시 세차게 문이 흔들렸다.
“솔레아! 적어도 결혼은 하고! 결혼은 하고 외박을 해야지! 솔레아! 자니? 아직 자니? 어제 뭘 하면서 밤을 새웠길래 아직까지 자니? 아빠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솔레아!”
네,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내세요. 신문에도 기사를 싣지 그러세요.
[속보] 베르고의 공녀 솔레아, 용과 핑크빛 열애 중 뜨거운 밤 보낸 것으로 밝혀져…… 유교 보이 가족들 충격 금치 못해……
솔레아, “친한 오빠 동생 사이라 밖에서 만난 것뿐.”
아무스, “뜨거운 관심에 감사할 따름, 좋은 비행으로 보답하겠다.”
그때 마침 반가운 목소리가 방문 밖에서 들려왔다.
“인간들아. 들려줄 얘기가 있다.”
“아무스. 물론 자네가 우리 딸을 살려 주고, 나도 구해 주고…… 고맙게 생각하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솔레아의 전생과 전 전생에서부터 내려오는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지금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용과 인간 소녀의 만남. 절찬리 구연동화 중.”
아무스는 빠르게 말을 뱉은 후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아무스의 말이 아빠와 오빠들에게 먹힌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윤이 말고도 또 있었다고?’ 하며 소란스럽게 아무스를 따라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방 앞이 조용해졌다.
피리 부는 사나이도 아니고 구연동화 하는 용을 따라가다니. 다음에 가족들한테 다른 사람이 내 얘기 해 준다 해도 함부로 따라가지 말라고 따끔하게 교육을 시켜 둬야겠어.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누이고 지지다가 깜빡 졸아 버렸다. 눈을 뜨니 또 아무스가 앞에 있었다.
“등 닦아 줄까?”
“됐어.”
“……미안해. 나도 처음이라서 조절하는 방법을 몰랐어.”
미안한데 네 다리 사이는 지금도 조절이 전혀 안 되는 것 같거든.
나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비누 거품을 묻히며 말했다.
“용이었다가 인간으로 마음대로 변할 수 있잖아. 뱀으로도 변하고.”
“응.”
“그럼 그것도 크기를 조금 줄여 주면 안 될까? ……차근차근 커지는 방향으로 해 주면 나도 어떻게든 차근차근 노력을 해 볼 텐데…… 갑자기 막 짠! 그러면…….”
욕조 테두리에 걸터앉아 있던 아무스의 시선이 흘긋 제 아래쪽을 향했다.
“이건 원래 차근차근 커지잖아.”
“양심 없어? 지금도 존나 불쑥불쑥 커지고 있잖아.”
“……미안.”
아무스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아주 옛날, 우리가 산에서 함께 뛰놀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미소였다. 세상에 오직 서로뿐이던 그 시절 말이다.
“아무스!”
밖에서 티온의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큰오빠가 저렇게 큰 목소리로 아무스를 부른 건 처음이었다.
“아빠랑 오빠들은 어쩌고 왔어?”
“자료 화면을 띄우고 왔는데 끝났나 봐. 가 볼게.”
아무스는 거품이 묻은 내 머리를 쓸어 넘기고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후 사라졌다.
목욕을 끝내고 나와서 앤을 불렀다. 앤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산……. 어흐흑. 흐윽. 산.”
“……뭐야, 너도 들었어?”
“후원에서 용 님이 공작님과 도련님들께 뭔가를 얘기하고 계시길래 저택에 상주하는 최측근 사용인들도 다 같이 듣고, 자료 화면도 봤어요. 아, 나 원래 비극 엔딩 안 보는데. 어흑, 흑. 진짜 시발 놈들이야. 이달론 시발 새끼 백 번은 더 죽어라. 흑.”
앤은 내 머리를 빗겨 주면서도 계속 욕을 하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그날 이후로 그레이가 저택 안에서 나를 이상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야! 산윤솔! 야, 빨리 와 봐! 나 급해! 빨리, 빨리! 지금! 당장!”
“설마 그거 나 부르는 거야?”
복도를 지나다가 그레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레이는 한가로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 산, 윤, 솔. 한 글자씩 땄어. 입에 쫙쫙 붙고 좋지?”
“하…… 그래. 좋네. 왜 불렀어?”
“불 꺼 줘.”
뭐지. 그레이 새끼 이놈 진짜 내 혈육 아닐까?
“빨리. 나 지금 딱 이불 기분 좋게 덮고 있어서 불만 끄면 바로 잘 수 있을 거 같단 말이야. 동생을 불러야지, 형을 부를 순 없잖아. 빨리 불 끄고 나가. 산윤솔. 너도 잘 자고. 오빠 꿈은 꾸지 마라. 징그럽다. 뭐 해. 빨리 불 꺼. 안녕. 내일 보자.”
그레이 방의 불을 끄고 나오며 생각했다.
그레이 저거는 분명 밝혀지지 않은 내 전생 어딘가에서 피로 묶인 내 혈육이었던 게 분명했다. 최소한 대한민국 태생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있어.
심지어 황녀님까지 나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산윤솔. 왔어? 새 브랜드 론칭을 기획하고 있다며.”
“……랏샤. 이쪽 세계관에선 그런 이름은 낯설어요.”
“랏샤는 좋으니 됐어.”
언제나처럼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랏샤는 마치 일거리를 주듯 내게 작은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가져가.”
“뭔데요.”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네 친구 즉위함. 다음 달 15일. 참석 바람. 가족 다 데리고 와도 됨. 마물 데리고 올 거면 목줄 하고 오고, 용도 목줄 해도 되는데 사회적 시선이 있으니 참길 바람.’
“전하! 아니, 랏샤! 즉위하세요? 아니, 하실 줄은 알았지만…… 즉위식을 한다는 거죠?”
랏샤는 아까 내가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건넨 마법 축제 기획서를 살펴보며 대답했다.
“나 말고 누가 하겠어. 당연히 즉위식 해야지. 성대하게.”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이거 설마 초대장이에요?”
초대장이라기엔 너무 초라했다.
그냥 빈 종이에 글씨를 마구 휘갈겨 쓴 것 같았다. 물론 종이 구석에 황제 대리인인 랏샤의 인장이 찍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좀…… 초라했다.
“이렇게 줘도 돼요?”
랏샤의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장난을 쳐 놓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갑자기 랏샤가 손을 내밀었다.
“참. 그렇게 주면 안 되지. 이리 다시 줘 봐.”
내게서 도로 초대장을 가져간 랏샤가 글을 추가로 적고 다시 내밀었다.
‘용은 옷 입혀서 와야 함.’
“랏샤! 당연한 얘길 해요! 우리 아무스 이제 옷 잘 입고 다닌다고요!”
“아, 그래? 그럼 그동안은 그대에게 매력 어필하느라 옷을 안 챙겨 입었나 봐?”
“아니, 너무 오래 잠들어 있는 바람에 사회생활을 잘 못해서, 그리고 저랑 오빠들이랑 아빠가 잔소리도 엄청 했고…… 내가 왜 이걸 설명하고 있어야 돼? 아무스 이제 옷 잘 입어요!”
“그럼 다행이지. 아무튼 와. 내 즉위식. 다른 사람은 못 와도 너는 와야지.”
“……황궁에 들어갈 때 초대장 보여 줘야 하는데 이걸 내밀면…….”
“무슨 소리야. 베르고에 주는 초대장은 당연히 정식으로 준비할 거야. 그건 그냥 너한테 먼저 주는 거야. 원래 친구끼리는 장난도 치고 그러잖아.”
낄낄 웃는 랏샤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하지만 곧 황제가 될 사람의 머리를 갈길 용기는 없어서 일단 참았다.
“……폐하는 좀 어떠세요?”
“좋으시지. 내가 왕관 쓴 모습을 보고 싶으시대. 날 알아볼 때보다 못 알아보실 때가 더 많지만, 종종 옛날얘기도 해 주시고 그래. 아버지 같아서 난 좋아. 걱정하지 말고 니네 아빠나 챙겨.”
“말을 하셔도 꼭…….”
때마침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폐, 전하. 부르셨습니까.”
아빠 목소리였다.
공작님이 집무실로 들어오자마자 랏샤는 턱을 괴고 눈을 아래로 축 내리깔았다.
“아직 즉위도 안 했는데 폐전하라니, 벌써 나를 폐위시킬 생각부터 하고 있는 거야? 공, 실망이 크네요.”
“……실언했습니다. 전하.”
픽 웃은 랏샤는 공작님에게 손을 흔들었다.
“공. 오늘은 따님이랑 같이 일찍 돌아가세요. 난 정말 착한 상사야. 그렇죠?”
“즉위식 준비하라고 3일이나 집에 안 보내 주셨는데 오늘 드디어 퇴근을 할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폐, 전하.”
“한 번은 그렇다 쳐도 두 번은 고의 같은데.”
“그럴 리가요. 오해이십니다. 가자, 레아.”
“네!”
공작님은 내 손을 잡고 재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황궁이 너무 넓어서 궁내에서도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게 국룰이었지만 오늘은 아빠와 걷고 싶었다.
아무스는 축제 때 입어야 할 옷을 맞추기 위해 마리에의 살롱에 끌려가 있는 상태였다.
물론 보호자로 그레이가 함께 갔다. 혼자 갔다가는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니.
아빠와 함께 이렇게 평화롭게 걷고 있는 게 기분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빠 역시 같은 생각인지 잡고 있는 내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레아.”
“네.”
“아무스에게 네가 겪었던 일들에 대해 들었단다. 물론 들은 것만으로 그 당시 네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다 알 순 없겠지만 그래도…….”
황궁 정원은 해가 져 어둑어둑했지만 마력으로 밝혀 놓은 곳곳의 가로등 덕분에 환했다.
그래서 올려다본 아빠의 꾹 다문 입술과 빛나는 보라색 눈이 잘 보였다.
약간의 물기가 맺혀 있는 아름다운 보라색 눈. 내 것과 꼭 닮은 아빠의 눈.
아빠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하는지 모르는 듯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아빠에게 잡힌 손을 빼내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저 너무 힘들었어요, 아빠. 다독여 주세요.”
“……그래. 우리 딸. 참 많이 돌고 돌아서 우리에게 왔구나.”
아빠의 크고 두꺼운 손이 내 등을 오래도록 다독였다.
“앞으로는 힘든 일 있으면 아빠한테 말하고, 누가 괴롭혀도 아빠한테 말하고, 기쁜 일이 있어도 아빠한테 말해 주렴.”
“당연하죠.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말씀드릴 거예요. 화도 내고, 삐지기도 할 거고, 가끔 아빠랑 싸우기도 할 거예요.”
“좋지. 네 오빠들은 점잖기만 해서 심심했…… 아니, 그레이는 조금.”
“하하하!”
아빠의 너른 가슴에 안겨서 웃었다. 아빠도 나를 따라 웃었다.
랏샤의, 아. 새로운 폐하의 즉위실 날 아침이 밝았다.
“산윤솔! 야! 너 화장을 내일까지 할 거야?!”
“아, 다 했다고! 재촉하지 좀 마!”
“막내야. 괜찮아.”
“오빠! 외투는 어디 갔어?”
“아. 까먹었다.”
“산윤솔. 구두는 이게 더 나을 것 같은데.”
“헤이먼까지 그렇게 부르기야?”
2층 복도가 시끌벅적했다.
1층 현관에서 공작님이 소리를 질렀다.
“아빠 먼저 간다!”
우리는 아빠에게 외쳤다.
“다 했어요! 아빠 잠깐만!”
우리 네 형제는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