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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화 (163/192)

163화

공장을 비운 지 몇 주나 지났기 때문에 걱정이 됐다. 직공들이 일을 그만뒀거나, 마리에가 동업을 파기하겠다고 할지도 몰랐다.

이안은 양모 사업에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안심하라고 했지만 그래도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마음은 모르는 법이니까.

내가 돌아갔을 때 직접 얘기하려고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쉽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양모 공장으로 가기 위해 아무스의 목에 올라탔다. 내가 뿔을 잡자 아무스가 날아올랐다.

도시 위를 지나고 있는데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저기 봐! 용이야!”

“어이구, 깜짝이야! 용이 있다더니 진짜였구나.”

퍼포먼스라도 보여 주고 싶었는지 아무스는 작은 목소리로 내게 ‘꽉 잡아.’라고 말하더니 공중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아래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사람이 타고 있어! 사람!”

“공녀님 아니실까? 공녀님이 용의 주인이시라던데.”

아무스는 작은 소리로 키득거리며 웃더니 내게만 들릴 정도로 소곤거렸다.

“처형이 만들어 준 광고판을 발톱에 계속 묶고 다닐 걸 그랬나 봐.”

“그걸 왜 달고 다녀.”

“재밌잖아. 그리고 내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이 너라는 걸 다들 알았을 텐데.”

“지금도 다 알고 있을걸.”

이후로도 아무스는 일부러 사람들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평소보다 낮게 날았다.

나와 아무스가 외곽에 위치한 양모 공장에 도착하자마자 공장 안에서 누군가 뛰어나왔다. 그레이와 마리에였다.

“마리에!”

“세상에, 공녀님! 이게 얼마 만이에요! 그간 많이 아프셨다면서요.”

“앗, 네. 그렇, 그랬죠.”

사람들에게 정확히 어떻게, 어디까지 알려져 있는지 몰라서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 마리에는 특유의 팔자 눈썹을 만들며 내 두 손을 부여잡았다.

“치료 과정에서 용을 깨우고 마법사가 되셨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이달론이 사람들을 죽여서 자기 수명을 늘리던, 아주 몹쓸 개새끼였다면서요!”

“네. 그랬죠.”

“이달론이 공격할 때 그레이 도련님이 몸소 나서서 막아 주셨다면서요!”

“어, 네, 맞아요.”

싸울 때 그랬던 것도 같기도 하다.

“그레이 도련님이 이달론과 맞서 싸우셨다고 들었어요.”

마리에 옆에 서 있는 그레이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의기양양하게 웃어 보였다.

“아니, 그런데 공작님도 엄청 고생하셨어요. 아빠도 목숨 걸고 저를 지키셨는데.”

“네, 그러니까요! 공작님도 이달론과 싸우다가 큰 상처를 입으셨다고요. 그레이 도련님은 강해서 티끌만큼도 다치지 않았다고 하시던데요.”

“야! 그러는 너도 목숨이 왔다 갔다 했으면서 무슨 아빠만 연약한 한 떨기 꽃인 것처럼 소문을 퍼뜨렸어!”

결국 참지 못하고 그레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입을 가리고 킥킥거리며 웃던 그레이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리고는 입꼬리를 얄밉게 옆으로 쭉 늘였다.

나랑 장난칠 때마다 보여 주던 그레이 특유의 ‘어쩌라고’ 표정이었다.

“근데 아무스. 내가 발톱에 달아 준 광고 천은 어디다 갖다 버리고 맨몸으로 온 거야?”

“솔레아가 갖다 버리래서 마법사 협회 본부에 두고 왔다.”

그레이가 나를 노려보자 나도 어깨를 올렸다 내리고는 입꼬리를 좌우로 쭉 늘였다. 어쩌라고요.

씩씩거리던 그레이가 일부러 불쌍한 척하며 마리에에게 말했다.

“마리에. 저건 은혜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용은 때려치우고 용맹한 나를 위한 로고를 만들어 주세요.”

“하하, 도련님. 물론 저도 옷을 디자인하는 예술쟁이지만, 장사꾼이랍니다. 킥이 먹히는 옷을 만들어야죠. 벌써 로고 디자인도 몇 개 뽑아 놨다고요.”

마리에는 언제나처럼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말투는 단호했다.

역시 하늘이 내린 서비스직이었다.

“그런데 로고라니, 무슨 말이에요?”

마리에는 나를 공장 쪽으로 잡아끌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용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제국 전체가 들썩거리고 있잖아요. 공녀님이 용의 봉인을 어떻게 푸셨는지 자세히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예, 그렇죠.”

“이 좋은 홍보 기회를 그냥 지나칠 순 없죠. 직공들도 이젠 이름이 꽤 알려져서 다들 장인으로 불리고 있다고요! 그러니 이제 본격적으로 브랜드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장인으로 불린다고요? 다들 아직 남아 있어요? 아무도 그만둔다고 말 안 했어요? 그동안 제가 자리도 못 지켰고…….”

그레이와 마리에가 씩 웃으며 공장의 양쪽 문손잡이를 하나씩 잡고 동시에 문을 열었다.

공장의 뜨거운 열기가 내 얼굴을 스쳤고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한꺼번에 들려왔다.

“린다! 디자인한 종이 좀 아무 데나 놓지 마!”

“아무 데나 놓은 거 아니야! 그 부분 마무리만 너한테 맡기려고 거기 둔 거라고!”

“제이미! 이거 가져가!”

“제닌, 제닌 어디 있어! 제닌! 주문한 검은색 양모 왔어!”

어느새 인간으로 변해 내 뒤에 서 있는 아무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모두 네 곁에 남겠다고 했나 봐.”

감격스러운 마음에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천천히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를 발견한 직공, 아니 장인들이 모두 달려왔다.

“공녀님!”

“샬롯. 유치하게 공녀님이 뭐니, 사장님이라고 해야지!”

“공녀님이라 부르는 게 틀린 말도 아닌데 왜 그래. 안 그래요, 공녀님?”

다들 쾌활하고 명랑했다. 내가 떠나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사장이, 사장인 제가 자리를 오래 비워서 죄송합니다. 다들 떠나지 않고 여길 지켜 주셔서 더 감사하고요.”

다들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빙그레 웃었다.

“사장님이 저희를 믿어 주셨잖아요. 저희도 사장님이 돌아오실 거라고 믿었어요.”

“네. 게다가 월급도 밀리지 않았잖아요.”

내가 없는 동안 누가 월급을 줬다는 거지? 당황한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는데 구석에서 종이 뭉치를 든 라트엘이 나타났다.

“월급은 제가 드렸습니다. 물론 공작님 돈에서요. 아, 헤이먼 도련님의 허가를 받았습니다.”

내 직원들의 월급을 공작님 돈으로 줬다고? 근데 허가는 헤이먼한테서 받고? 뭔가 이상하게 꼬여 있긴 했지만 일단은 월급을 밀리지 않고 줬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고마워요, 라트엘. 믿고 기다려 줘서.”

라트엘은 무덤덤한 얼굴로 얇은 검은 테 안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원래 공장은 일할 때 사장이 없어야 잘 돌아가는 겁니다.”

하여간 말하는 본새하고는.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라트엘은 내 얼굴을 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곤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시계를 바꿀 때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슬슬 팔찌도 주렁주렁 차고 싶어서요.”

“하하하. 벌써 팔찌까지 계획에 넣었어요?”

“베르고가 망하면 팔찌라도 팔아서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경제가 불안정할 때는 금붙이가 최고입니다.”

나는 두 팔을 걷어붙이며 라트엘과 장인들에게 말했다.

“팔찌 그거 대대손손 가보로 물려줄 수 있게 아주 고급으로 만들어 주죠. 마리에. 준비했다는 로고 좀 보여 줄래요?”

“그럼요!”

마리에뿐 아니라 다른 장인들도 제 작업 책상으로 달려가더니 종이와 천 같은 것들을 한 보따리씩 들고 내게 찾아왔다.

“사장님! 새 브랜드를 론칭할 때 시그니처 라인을 만들어 보려고 저희가 따로 디자인한 것도 있거든요. 사장님이 뽑아 주세요.”

“저는 일단 용의 날개에 초점을 맞춰서 이런 디자인으로 옷을 가봉해 봤어요!”

“전 용을 타고 다니는 공, 사장님을 생각하면서 활동성이 좋은 옷을 만들었어요. 시착해 보시겠어요? 물론 용을 타는 분은 사장님뿐이시지만 활동성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기존의 승마복을 대체하는 라인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고, 평민들에게도…….”

“공, 사장님! 저는 검은 원단을 이용했고, 자수는 이렇게 박아 봤는데요. 이런 식으로…….”

아무스가 내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일단 다들 진정하지. 산, 지윤, 아니, 솔레아는 눈이 두 개뿐이다. 한 명씩 가져오도록 해.”

아무스의 말에 다들 조용해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장인들은 아무스를 보더니 이번엔 그에게 요란하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용 님! 생각보다 더 키가 크시네요! 가봉을 새로 해야겠어!”

“하! 내가 가봉할 때부터 알아봤지. 용 님! 저는 일단 디자인만 그려 봤습니다. 남성복의 새로운 유행을 이끌어 나갈…….”

이러다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한 명씩! 한 명씩 발표합시다! 그리고 회의해요!”

라트엘의 제비뽑기로 순서가 정해졌다. 넓은 공장에서 모두 자기가 준비한 의상들을 순서대로 발표했다.

다들 몇 달 전과 달리 자신감이 넘쳤다. 그동안 수많은 성취의 순간을 맛보고 주변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인지 자기 재능에 대한 열의와 강한 믿음이 느껴졌다.

해가 질 때까지 회의를 하고, 또 했지만 그들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저녁 시간이 되고 나서야 겨우 브랜드명과 로고를 정하고 공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시그니처 라인은 고르지도 못해서 내일 또 출근해야 했다.

게다가 옷뿐 아니라 신발과 가방까지 생산 라인을 늘리기로 결정했다.

일, 일, 일. 또 새로운 일.

……이상하다. 분명 나는 이세계로 차원 이동 했고, 잘나가는 집안의 공녀로 사업도 성공했는데 왜 출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지?

아무스의 뿔을 잡은 채 하늘을 날아가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런 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산.”

“응. 아무스.”

“……왜 산으로 한다고 했어?”

밤하늘을 천천히 유영하듯 날고 있는 아무스의 목소리가 약간 떨려 왔다.

나와 마리에, 장인들이 새롭게 만들 브랜드의 이름은 ‘산’이었다.

다들 왜 갑자기 뜬금없이 ‘산’이냐고 했지만 내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날고 있는 아무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마리에도 그렇고, 다른 장인들도 거의 다 용을 모티브로 해서 디자인을 뽑아냈잖아. 용은 산에 사니까.”

“아, 그래서 그런 거야?”

차가운 밤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내가 안고 있는 아무스의 온도는 여전히 따듯했다.

“그리고…… 산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었잖아. 우리 둘만 아는 비밀이지만 이렇게라도 이루고 싶어.”

아무스는 아무런 말 없이 바람에 몸을 실으며 느리게 날아다녔다. 날개의 움직임이 크지 않아서 마치 바람이 흐르는 대로 공중에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아무스가 갑자기 인적이 드문 나무 아래로 날아가더니 인간으로 변했다. 아무스는 내 허리를 꼭 안은 채 빛나는 노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솔레아.”

“응.”

“지윤아.”

“왜.”

“……산.”

“왜 자꾸 이름을 바꿔 가면서 불러. 왜 그래?”

아무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나를 뚫어지게 보다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오직 아무스에게서만 느껴지는 젖은 흙냄새와 나무의 시원한 향이 우리 사이를 가득 채웠다.

“무슨 생각 해?”

“너 체향 좋다고.”

“이거 네 냄새야.”

“어?”

“산. 이거 네 냄새야.”

“……나한테서 이런 냄새가 났어?”

아무스는 나를 더 꼭 끌어안고서 시를 읊듯이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갔다.

“손끝에선 비를 맞은 흙냄새가 났고, 손바닥에서는 풀뿌리의 독한 냄새가 났고, 몸에서는 낙엽과 나무줄기를 닮은 굵직한 가을의 냄새가 났어. ……네가 가고 나서, 네가 보고 싶어서 네 냄새를 따라 했어. 흙을 손에 쥐고, 풀뿌리를 캐 보고, 낙엽 위에 한참 누워 있었어. 이젠 나한테서도 너랑 같은 냄새가 나.”

소중한 것을 보듬듯 아무스는 천천히 내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나를 살짝 떼어 내곤 말했다.

“하늘 산책할까?”

입술이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나는 아무스의 옷을 잡아당기며 발뒤꿈치를 들어 입술을 맞댔다.

서로의 달뜬 숨과 뜨거운 체온이 한참을 오갔다.

아무스는 커다란 손으로 달아오른 내 뺨을 어루만지고 흉터가 있었던 부분마다 입을 맞추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산.

나의 작은 산.

사랑하는 나의 산.

용은 소녀의 지나간 이름을 조용히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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