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162/192)

162화

돈을 달랜 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아직 퇴근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저택 안이 어수선했다. 사용인들이 뭔가를 품에 한가득 안아 든 채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얼떨결에 나도 같이 뛰면서 그들을 따라갔다.

“아르몬! 어디 가요!”

“아이고, 아가씨! 헤이먼 도련님이 지금 완전히……. 아이고, 몰라요!”

헤이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다급해진 마음에 헤이먼이 일을 하고 있는 집무실로 사용인들과 함께 들이닥쳤다. 이미 활짝 열린 문 안으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평소보다 박진감 있게 들어갔다.

“오빡!”

“깜짝이야. 왜 불러.”

“뭐야, 멀쩡하잖아.”

“뭐야. 내가 멀쩡해서 실망했어?”

헤이먼은 태연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실은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책과 집무실 소파에 빈틈없이 앉아 있는 사람들 때문에 전혀 태연해 보이지 않았지만, 최소한 아파 보이진 않았다.

“아르몬!”

“아이고! 아가씨! 지금 너무 바쁜데! 왜요, 왜 그러세요, 아가씨! 빨리 말해 주세요! 왜요!”

헤이먼의 하인인 아르몬의 얼굴에선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까 왜 그렇게 말한 거예요? 오빠가 일을 하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아가씨. 도련님이 베르고의 일만 하시는 게 아니에요. 자세히 보세요. 여기 앉아 계신 분들도 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신데요.”

“뭐, 뭐가?”

손에 쥐고 있는 종이들을 뚫어져라 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며칠 밤을 새운 듯 다들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공녀님, 처음 뵙겠습니다. 그림을 복구하는 일을 하는 세스틴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마크고요, 작곡가입니다.”

“데인입니다. 작사합니다…….”

“라 아트랑이라고 합니다. ……언어학자입니다.”

공통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이안!”

“고흐어엉녀어언님. 일을 하는 건 좋지만, 물론 좋지만, 집도 좋은데흐어어엉.”

내가 만든 솔리안 상단의 단주인 이안까지 왜 여기 있는 거야?

“헤이먼. 이 사람들은 대체 뭐야. 왜 모은 거야? 그리고 다들…… 안 씻으셨어요?”

“안이 아니고 못입니다.”

아르몬이 말하자 헤이먼이 덧붙였다.

“아무스뿐 아니라 다른 용들도 실존했다는 사료들을 찾고 있어. 실제로 얼마 전에 현세대에서 해석하지 못하는 상형문자들이 용의 언어였다고 주장하며 논문을 발표한 고고학자도 있었거든. 그 논문을 발표하자마자 학계에서 퇴출당했대. 근데 지금은 불가능한 주장이라고 볼 순 없잖아. 그래서 그 고고학자를 찾아서 모셔 왔어.”

아닌데. 고고학자라는 분 지금 잠옷 입고 있는 거 보니까 그냥 납치당한 거 같은데.

“그림 복구는 왜?”

“아. 카라샤펠 전하가 말씀해 주셨는데 황궁의 보물 창고에 있는 보물들 중에 덧칠한 흔적이 있는 그림들이 있대. 그걸 토대로 그 시대에 덧칠이 된 다른 그림들도 우리 가문에서 몇 개 찾았거든. 그걸 세스틴이 맡아서 분석해 보기로 했어. 저 사람의 제자들도 다 같이.”

“아……. 그럼 작사 작곡은? 너…… 진짜 아이돌 할 거야? 가수 할 거야?”

집안 좀 풀린다 싶으니까 이제 드디어 얼굴값 하는 거야? 제르노아의 별이 되어서 해외 진출도 할 거야?

헤이먼은 제 책상 위에 널린 종이들을 빠르게 살펴보며 내게 대답했다.

“노래. 새로운 문화를 퍼뜨리는 데에는 대중문화만 한 게 없으니까 노래를 이용하려고. 제르노아에 용이 있다는 사실을 전국, 아니 세계에 퍼뜨려야지.”

“아, 메가 히트곡을 만들어 보시겠다? 근데 그럴 거면 작사가, 작곡가가 한 명씩으로 되겠어?”

라고 말하는 순간, 넓은 집무실 구석구석에 있던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저희도…… 곡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러셨군요…….”

헤이먼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가사가 있는 것 중 가장 간단한 건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처럼 만들 거고, 화려한 건 오페라 쪽으로 다 돌릴까 해. 오페라가 있으면 귀족들한테 먹히니까. 그리고 연주곡도 있으면 좋겠더라고. 용의 비행이나, 용의 탄생 같은 주제로 만들어 보라고 했어.”

“와우…….”

이 정도면 없는 문화도 만들겠다. 진작 건강했으면 나라도 세웠겠다.

“그럼 이안은 여기 왜 있는 거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안 여기 있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당연한 소리를 왜 하나 해서. 솔리안 상단을 주축으로 상품 판매도 해야지. 그건 일단 그레이가 담당하고 있어.”

“주인이 난데 그레이가 맡고 있다?”

“법적인 거나 자질구레한 것만 그레이가 해결했어. 상품 제작 승인부터 유통 같은 전반적인 건 네가 담당하면 돼.”

“상품 제작이랑 유통을 내가 하면…… 그레이가 맡았다는 법적인 거랑 자질구레한 건 뭐야?”

이안이 내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이번에 황녀 전하가 온 나라를 뒤엎으면서 뇌물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조사하셨잖아요. 그때 우란 상단뿐 아니라 뤼블러스랑 하이온까지 싹 걸렸거든요.”

“너희 집은? 너희 집도 엄청 큰 백화점 하잖아! 클레버는 괜찮아?”

“제 아버지가 다행히 뇌물은 안 쓰는 사람이랍니다.”

“다행이네. 아니, 그래서 그레이가 했다는 게 뭔데?”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쉴 새 없이 지시하던 헤이먼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걸어오며 대답했다.

“이거.”

그가 내민 종이를 읽어 내려갔다.

수기로 작성된 다소 성의 없는 보고서였다.

《도망간 놈들과 도망간 돈》

소설 제목 같은데. 하지만 그 밑엔 익숙한 이름들이 쓰여 있었고 그 이름들 옆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 게 보였다.

산체스 우란 ○ - 횡령 비자금 28억 제르/32억 5,000만 제르 탈세/뇌물수수/노예 불법 납치 및 매매/웬프론 협곡에서 노예들과 함께 게르투만으로 넘어가려는 걸 잡음.

마사 뤼블러스 ○ - 뇌물수수, 비자금 21억 5,000만 제르/밀항하려는 거 잡음.

테르시 키온 ○ - 횡령 및 탈세. 비자금 아무튼 존나 많음/잡음/이 새끼 나한테 활 쏨.

틸다 하이온 모르하임 × - 노예 불법 납치/과세 품목 밀수/도망치는 거 잡으려다가 실수로 죽임.

칼 루이자 × - 횡령 비자금 17억 제르/19억 2,000만 제르 탈세/뇌물도 존나 돌리고 비자금도 존나 쌓았으면서 일은 존나게 못해서 상단 크기 개작음/짐마차에 숨어 있던 놈인데 잡힐 거 같으니까 자살함. 퀴렐 황비의 편지 발견했음. 좀 더 조사해 보겠음.

일타하르 딘독 ○ - 뇌물 수수, 비자금 12억 2,000만 제르/7억 8,000만 제르 탈세/이 새끼 못 잡았으면 억울해 죽을 뻔. 남쪽 섬에 숨어 있던 거 잡음/☆도와준 사람 : 일타하르 엄마, 사르단 딘독. 나중에 보상해 주기로 함. 엄마를 자주 팼다고 함. 시발 놈임. 내가 몇 대 때림.

……이게 다 무슨 소리람.

“헤이먼. 이게 다 뭐야? 설마 여기 있는 동그라미랑 가위표가…….”

내가 종이를 읽고 있는 동안 뒤돌아서 또 다른 일을 살피고 있던 헤이먼은 내 질문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응, 그레이가 쫓다가 실수로 죽인 사람. 급하니까 그렇게 보고서 써서 보냈더라고. 내가 정리해서 다시 궁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이 자식이 애초에 두 장 써서 하나는 궁으로 보내고, 하나는 집으로 보냈다네.”

“그러면 이 엉망인 보고서를 황녀 전하도 보셨단 말이야?”

“어. 근데 뭐…… 괜찮지 않을까? 여태 아무 말 없으시니까?”

“나 오늘 궁에서 그레이 봤는데! 걔가 자기는 머리 쓰는 일 한다고 했단 말이야.”

헤이먼은 수없이 많은 종이들을 살펴보며 픽 웃었다.

“당연하지. 도망간 범죄자 새끼들 잡는 게 얼마나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일인데.”

“나나 아무스를 시키지! 그레이가 지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고생하고 있다는 거네!”

“아니야. 정령들 몇 명이랑 마물들 몇 마리랑 같이 움직이고 있어. 괜찮을 거야. 그리고 너랑 아무스도 바쁘고 정신없잖아. 레아 너는 축제 준비도 해야 되고.”

헤이먼은 종이를 읽으며 아르몬에게 명령했다.

“아르몬. 불공정 계약으로 인해 피해를 받은 점주들 증언 더 받아 오고, 중간 매매업자들 증언도 받아 와. 숨겨진 비자금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법정에 세울 만한 사람 위주로 추려. 다른 사람들이랑 좀 나눠서 찾아봐.”

“예에…….”

아르몬은 죽을 거 같은 표정으로 다시 집무실을 나갔다.

정신은 없었지만 일단 대충 알아들을 순 있었다. 덩치 큰 상단들이 다 쓸려 나갔다는 거잖아?

나는 옆에 서 있는 이안을 붙잡고 말했다.

“이안.”

“네.”

“상단주들이 모조리 잡혀가서 지금 시장 상황이 혼란스러울 거야. 이럴 때 얼른 접촉해서 다 우리랑 계약하도록 작업해.”

“그건 이미 했습니다.”

“아, 그래?”

“네. 여기서 실시간으로 보고받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어떤 상단이 붕괴됐는지 빠르게 알면 알수록 빈자리를 차지하기가 좋으니까요. 힘들지만…… 저 지금 너무 재밌고 즐거워요. 아가씨.”

그래. 이래서 이안을 뽑았었지.

진심으로 행복한 듯 당당하게 미소 짓는 이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아무스가 슬쩍 이안의 옆으로 가 무릎을 굽혀 머리를 나란히 했다.

귀여워 죽겠네. 나는 활짝 웃으며 아무스의 머리도 부스스해질 정도로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스가 내 손바닥에 볼을 부비며 애교를 떨어 대자 참을 수가 없어져서 두 손으로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무릎을 굽혀 나와 눈높이가 비슷해진 아무스는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노란 눈을 예쁘게도 깜빡이며 나와 눈을 마주쳐 왔다.

“우리 하늘 산책할까?”

이건 뽀뽀하자는 신호였다.

뭐야. 파충류가 왜 이렇게 앙큼한 폭스처럼 구는 거야.

광대가 스멀스멀 올라가려는 찰나, 헤이먼이 나를 불렀다.

“산책은 다음에 하고 공장부터 가 봐. 마담 마리에가 널 찾아.”

“……아, 그래. 어, 공장 가야지. 가 봐야지. 응.”

집무실에서 나가려는 순간 허공에서 정령들이 나타났다.

용과 마물들이 세상에 드러난 이상, 정령들도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어져 이제 사람들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또 피로가 쌓였네!”

“얼굴에 기미 생기면 어떡하려고 자꾸 밤을 새우는 거야!”

“아프지 마!”

“피곤하지 마!”

“건강해야 돼!”

집무실 안의 사람들은 정령들의 요란법석에 익숙해진 듯 제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정령들은 저들끼리 왁자지껄 떠들다가 동시에 헤이먼에게 분홍색 가루 같은 것을 뿌려 줬다.

그러자 아주 약간,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티도 안 날 정도로 피로해 보이던 헤이먼의 안색이 한결 더 밝아졌다. 그뿐 아니라 머리도 찰랑찰랑 윤기가 흘렀고 피부에서도 광이 나기 시작했다.

……역시 정령들의 사랑을 받는 인간은 다르구나. 쟤는 재수 좋으면 아무스보다 오래 살겠는데?

집무실에서 나가자 현관으로 들어서는 티온과 마물들이 보였다.

목줄을 착용한 마물 여덟 마리가 티온과 보폭을 맞춰서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오빠!”

“막내야!”

티온은 활짝 웃으며 목줄을 쥐고 있는 오른손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얼른 계단을 내려가자 마물들이 내게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멈춰.”

티온이 명령하자 제자리에 멈춰 선 마물들은 꼬리를 흔들며 내게 애타는 눈빛을 보냈다.

인사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주인의 명령에 참고 있는, 훈련이 잘된 대형견들 같았다.

“세상에. 얘들 힘이 보통이 아닌데 어떻게 여덟 마리를 한 번에 산책시키고 훈련까지 시켰어?”

“목줄 적응시킬 겸 천천히 하고 있어. 그리고 얘네들도 집중하면 잘 따라와 주고, 좋아. 난 괜찮아. 얘들 다 착하고 귀여워.”

어째 사람들을 대할 때보다 편해 보였다.

마물들 역시 티온의 말을 따르는 것에 조금의 불편함도 없는 듯했다.

그리고…… 물리적으로도 마물 여덟 마리를 끌고 다니며 제어할 인간은 우리 큰오빠밖에 없겠지.

티온이 목줄을 풀어 주며 ‘좋아.’라고 말하자 마물들은 꼬리를 흔들며 티온에게 안겼다가 내 품에도 달려들었다.

그리고 아무스가 은근슬쩍 마물들 옆에서 나를 끌어안았다가 티온에 의해서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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