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본부의 마법사들의 얘기를 들어 보니 이번 축제는 수도에서만 열리는 축제가 아니라 제르노아 제국의 도시 전체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열리는 축제라고 했다.
심지어 3일 내내 진행되는 축제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가 여기 온 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으니 내가 이 축제에 대해 모르는 건 당연했다.
“3일이나 축제를 한다고요? 그것도 전국에서……? 그걸 사람들이 좋아하나요?”
“그럼요! 평소엔 마력을 함부로 쓰지 않는 마법사들도 그 기간 동안은 아끼지 않고 펑펑 쓰지요! 공녀님도 보셨을 텐데요. 하늘에 온갖 색의 마력이 커튼처럼 펼쳐진 걸요.”
“아, 제가 기억을 잃어서요. 최근 몇 달의 기억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네요.”
“아이고, 참. 그러시지요. 죄송합니다.”
비꼬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깜빡했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마법사들이 말을 꺼낸 그 마법사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내 눈치를 살폈다.
“전 괜찮아요. 추억은 앞으로 쌓아 나가면 되니까요.”
내 말에 빙긋이 웃은 아무스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 왔다.
물론 키가 커서 허리를 옆으로 꺾다시피 해 몸이 기울어진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자칼이라는 마법사는 기묘한 자세로 내게 기대고 있는 아무스를 슬쩍 올려다봤다가 얼른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축제의 테마는 ‘용’이 어떨까 합니다.”
“뭐, 좋죠. 이달론에 의해서 사라진 문화를 다시 찾은 기념도 될 테고요.”
그런데 마법사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으며 나와 아무스를 끊임없이 힐끔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자칼 뒤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반갑습니다. 공녀님. 제 이름은 프라파노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공녀님께서 가져오신 임명장을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황제 대리인의 직인이 찍힌 임명장을 저들끼리 돌려 보던 마법사들은 또 한참 수군거리다가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용의 주인이시고, 정령들과 마물들을 길들이셨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용의 존재도 방금 눈으로 봤으니 당연히 믿습니다. 허나, 마법사 협회장이라는 자리는…… 아무래도 마력의 양이 중요하기 때문에, 용이나 정령, 마물들과는 관계없이 공녀님의 능력 여하에 따라 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주절주절 떠들고 있지만 요점은 그거였다. 내가 자격이 되는지 궁금하다는 것.
“마법을 보여 드리면 될까요?”
“예. 보여 주시기만 하면.”
프라파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법사들이 서 있던 바닥이 무너졌다. 건물 하나가 완전히 허물어지며 마법사들이 모두 아래로 떨어졌다.
물론 아무스와 나는 빼고. 난 이제 아래로 떨어지는 감각은 징글징글하니까.
“으아아악!”
깜짝 놀란 그들 중 몇 명은 공중 부양 마법 주문을 외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몇십 초가 넘는 시간 동안 아래로 떨어지던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을 즈음이 되었을 때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그들과 우리는 구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허, 흐억, 허억…….”
“공녀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답했다.
“여기서 보는 풍경이 아름다워서 다 같이 보고 싶었네요. 뭐, 마법도 보여 드릴 겸.”
프라파노를 비롯한 마법사들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쓰고 있던 안경을 벗는 이도 있었고, 높은 곳을 싫어하는지 옆에 있는 다른 마법사의 팔에 달라붙는 자도 있었다.
때마침 해가 지고 있었다. 눈이 멀 정도로 환한 노을빛이 구름 사이로 새어 나왔다.
마법사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고, 아무스는 날개를 꺼내 내게 그늘을 만들어 줬다.
“고마워, 아무스.”
아무스는 싱긋 웃더니 허리를 굽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나중에 뽀뽀해 줘. 네가 해 줘.”
“……알았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무스는 만족스럽다는 듯 활짝 웃었다.
우리가 꽁냥대며 닭살을 떨어 대는 동안 마법사들은 마치 퇴마라도 당하는 것처럼 강한 빛에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그들이 결국 내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공녀님! 이러다 눈이 멀겠습니다!”
“태양과 이리 가까이 있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공녀님의 마력의 양은 이제 알겠으니 그만둬 주십시오!”
“산소가 부족합니다! 숨이 찬다고요. 공녀님! 제발!”
몸을 움츠린 채 와들와들 떨고 있는 그들이 이젠 불쌍해 보여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눈을 뜨세요.”
“그럴 순 없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눈을 떠 보세요.”
마법사들이 하나둘 눈을 뜨기 시작했다. 본부 안이었다. 건물은 무너지지 않았고, 바닥 역시 멀쩡했다.
“무, 무슨…….”
“우리가 방금까지 본 게 모두 환상이었습니까?”
믿기 힘든지 마법사들은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네. 마법이었죠. 보여 달라면서요?”
“그래……앴죠.”
마법사들은 말끝을 흐리며 탁자를 두드려 보고, 벽을 만져 보기도 하고, 제 눈을 비비기도 했다.
이번엔 프라파노가 아닌 마치안토가 언성을 높였다.
“혹시 용이 옆에서 도와준 것 아닙니까? 인간이 주문도 외우지 않고 마법을 부리는 건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왜? 이달론이 한 걸 나는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마치안토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그러곤 그의 어깨에 손을 살짝 가져다 댔다. 공간의 틈에 다녀온 뒤로 내겐 특별한 능력이 생겼다. 바로 사람들의 과거를 빠르게 훑어볼 수 있는 능력이었다.
“마치안토. 베겔랑에게 뇌물을 주고 그 자리에 앉은 것치고는 꽤나 자신감이 넘치네. 임신한 아내한테나 잘하지 그래? 멜론이 먹고 싶다는데 왜 화를 냈어. 사다 주면 될걸.”
“……자고 있는데 깨우니까 저도 모르게 그만……. 아니! 왜 남의 사생활을 마음대로 발설하십, ……그런 것도 보이십니까?”
벌컥 화를 내던 마치안토는 이내 깨달았다는 듯 놀란 눈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용의 시험을 통과하셔서 그러신 겁니까?”
용의 시험을 통과하면 본인도 나처럼 될 수 있는지 궁금한 듯했다.
“용의 시험이라는 거…… 저도 받을 수 있습니까?”
탐욕으로 물든 눈동자가 아무스를 향했다. 아무스는 고개를 까딱 기울인 후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노란 눈동자에 살기가 어렸다.
“너는 죽을 것이다. 한 나라의 황제는 많은 인간을 돌보는 게 업이었기 때문에 죽지 않고 돌아온 것이지. 너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으니 죽겠구나. 그래도 괜찮다면 보내 주지.”
마치안토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마치안토를 제외한 다른 마법사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다 동시에 허리를 굽혀 내게 깍듯이 인사했다.
“저희는 새로운 협회장님을 환영합니다.”
“공녀님을 협회장님으로 모시게 되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우리 마법사 협회를 이끌어 주십시오.”
이제야 말을 듣네. 흡족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그러자 금이 가 있던 벽이 저절로 보수되고, 오래된 의자들이 마치 새것처럼 고쳐졌다.
건물을 빠져나와 외벽에 걸려 있는 간판을 바라봤다. 바탕색이 화려한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게 시발 제일 마음에 안 드네.
“간판 색도 바꿔도 되죠?”
“아유, 예! 그럼요! 당연합니다!”
“간판 바꾸는 김에 이달론을 칭송하는 의미로 세워진 석상도 없애도 되나요? 그 왜, 수도 중앙광장에 있는 거요. 제가 바빠서 아직 못 부쉈어요.”
마치안토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여기서 꽤 떨어진 곳인데 거리도 계산하지 않으시고 그게 가능합니까?”
“그게 가능하니까 황녀 전하께서 저를 협회장으로 임명하신 게 아니겠어요?”
간판의 배경색을 진한 붉은색으로 바꾼 뒤 한쪽 눈을 감았다. 감은 오른쪽 눈 안에서 수도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 세워진 이달론의 석상이 보였다.
“다이탄, 게르온, 크론토파즈, 일리다겔. 많이도 세워 뒀네. 게다가 비석도 있네. 다 부술게요.”
“네!”
처음으로 놀이공원에 간 어린이처럼 마법사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기대를 좀 채워 줄까 싶어서 허공에 석상과 비석이 세워진 곳을 실시간으로 보여 줬다. 마치 스크린처럼 영상이 재생되는 허공을 보며 마법 주문 대신 지명을 순서대로 말했다.
“다이탄.”
다이탄에 세워진 석상이 순식간에 박살 났다. 머리부터 터지며 부서졌지만 돌의 파편은 시민들에게 조금도 튀지 않았다.
“게르온.”
게르온에 세워진 석상도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크론토파즈. 일리다겔.”
석상이 모두 부서지고 비석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비, 빈 자리엔 뭘 채우실 계획입니까? 공녀님의 석상을 세울까요? 역대 가장 강력한 마법사의 등장이니까요.”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예의는 차리되 다소 의심스러운 눈길로 날 살피더니, 이젠 두 손을 모으고 내가 뭘 할지 기대된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마법사들이었다.
“제 석상은 됐고, 사라진 용들을 위해 그 지역에 살던 용들의 모습을 석상으로 재현해서 남길까 해요. 축제 날에 한꺼번에 팡! 하면 신나겠죠?”
“오오! 네! 네!”
제르노아에 찾아올 변화에 들뜬 마법사들은 벅찬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럼 축제 기획서를 다음 주까지 준비해 주세요. 전에 했던 축제들에 대한 보고서도 같이 준비해 주시면 파악하기 좋겠네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예!”
마법사들을 두고 그 자리에서 아무스와 함께 날아올라 집으로 돌아왔다.
양모 공장에도 가 봐야 하지만 일단 집에 들러서 그간의 실적에 대한 보고서를 직접 챙겨 갈 생각이었다. 간 김에 헤이먼이랑 티온도 보고.
오빠들 얼굴을 제대로 못 본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보고 싶은지. 가족이 이런 거구나, 싶어서 웃음이 났다.
아무스와 함께 공작저 정원으로 내려가는데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돈이었다.
이젠 돈이 혼자 있는 모습만 보아도 불쑥 걱정부터 들었다.
“돈! 왜 혼자 나와 있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지 정원 벤치에 앉아 있던 돈이 나를 발견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옷차림이 평소와 달랐다. 그레이와 내가 이혼한 부부의 양육권 다툼 상황극을 한 뒤로 그레이는 늘 비싸고 좋은 고급 원단으로 된 옷만 돈에게 입혔었다.
마법사 행세를 시킬 때도 내가 일부러 휘황찬란한 색감으로 옷을 입혔기 때문에 저런 무채색의 옷을 입은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어디서 주워 온 건지 옷이 커서 맞지도 않아 보였다.
“……공녀님, 오셨어요.”
나는 아무스에게서 내려와 빠르게 돈에게 다가갔다. 아무스도 곧바로 인간으로 변해 내 뒤에 섰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서서 나를 지킬 태세인지 잔뜩 긴장한 게 느껴졌다.
돈은 그런 아무스를 힐긋 올려다본 뒤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어깨 펴. 용써서 거북목 집어넣고 어깨 펴 놨더니 왜 다시 쭈그렁탱이가 됐어?”
내 말에도 돈은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저, 여기서 나가려고요. 공녀님. 그래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고 기다렸습니다.”
“뭐? 나가긴 어딜 나가. 아니, 근데 무슨 나간다는 사람이 짐 하나가 없어?”
돈은 맨몸이었다. 그간 제 방에서 쓰던 물건들이 있을 텐데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가방 비슷한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원래 제 것이었던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뻔뻔하게 이 집에서 계속 살 수가 없어요.”
대충 짐작은 했지만 역시나였다. 이달론에게 몸을 뺏겨 우리 가족들과 나, 아무스에게 상처를 준 게 죄송해서 나가겠다는 거잖아.
몇 주 내내 조용히 방 안에 틀어박힌 채 물 조금, 빵 조금만 먹으면서 지냈다더니 결국 그런 결정을 내렸구나.
나는 돈의 어깨를 짚고 똑바로 보며 말했다.
“돈. 그건 사고였고, 나도 네게 새로운 이름을 줬기 때문에 내 잘못도 있는 거야.”
“아니에요! 공녀님은 잘못 없으십니다! 제가 정신을 빼놓지만 않았어도, 그 사람을 보자마자 빨리 눈치채고 도망만 갔어도……!”
“과거를 아무리 돌이켜도 바꿀 수 있는 건 지금 네가 닿아 있는 이 순간뿐이야. 이달론은 그렇게 뒈질 새끼였어. 그 과정에서 네가 희생된 거야.”
“하지만 저는…….”
나는 자꾸만 내 눈을 피하는 돈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지금 이 순간만 생각해. ‘돈’이 진짜 원하는 게 뭐야?”
돈의 맑은 눈에 눈물이 어렸다.
“저는 행복할 자격이 없는 새끼잖아요.”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어. 너도. ……그리고 나도. 대답해, 돈.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돈이 두 눈을 질끈 감자 눈물 줄기가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바싹 말라 갈라진 입술에서 내가 원하던 말이 나왔다.
“……저를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람들 곁에서 같이 행복하고 싶어요.”
나는 그를 안아 주며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그래. 나도 늘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