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내가 한 말이 모두 진실이라는 걸 확인한 황제는 잠깐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 진귀한 것들을 모두 봐 온 황제일지라도 용은 처음 봤을 테니 꽤나 놀란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마법에 의해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지?”
급기야는 눈앞의 진실을 부정하기까지 했다. 하긴,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을 의심해 왔을 테니까.
카라샤펠이 저렇게 독단적이고 냉철하게 자란 데에는 환경 탓이 크네.
“폐하의 의술사들을 불러 확인해 보시죠. 그들도 뛰어난 마법사가 아닙니까? 아니면 제가 당장 저택 밖으로 나가 아무스와 함께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여 드릴 수도 있습니다. 내일 아침 신문에 대서특필되면 폐하 눈에만 보이는 용이 아니란 걸 알게 되시겠죠.”
다소 건방진 내 말투에도 황제는 트집을 잡지 않았다.
아직도 놀라고 있는 중인 거 같았다.
……근데 언제까지 계속 놀라고만 있을 거냐고. 황제면 황제답게 이 상황에 대한 코멘트를 남기시라고요.
우리 아빠한테 삐딱하게 말한 것 때문인지 황제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다.
“……잠깐 손을 대 봐도 되겠나?”
황제의 물음에 아무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아무스의 단단한 비늘과 앞다리, 접혀 있는 날개를 만졌다.
“……이거 정말 대단하군…….”
“거짓말!”
“거짓말쟁이!”
“황제 거짓말했어!”
헤이먼의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헤이먼의 어깨 위에 앉은 정령들은 잔뜩 뿔이 난 표정으로 황제를 노려보며 말했다.
“‘대단하군.’이 아니라 ‘탐나는군.’이라고 말했어.”
“용을 타고 날아다니면서, 용을 마음대로 부리는 자기 모습을 상상했어!”
“우웩!”
“우리 주인 자가용 아닌데!”
“아니지, 왕주인한테는 자가용이 맞지.”
“응. 그건 맞지!”
“맞아, 맞아!”
저들끼리 한참 떠들던 정령들의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이 50년산 중늙은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나는 황제의 앞으로 가 섰다.
“저는 목숨을 걸고 제르노아를 지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무스도 자길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나라를 도왔고요. 그런데 그 모든 얘기를 들으시고도 지성이 있는 이 존재를 짐승처럼 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셨습니까?”
아주 잠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황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내게 보고하지 않은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불법이다. 반역의 씨앗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 헌데 강력한 전력이 될 용과 마물, 게다가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이것들까지. 이게 반역이 아니라고 볼 수 있나?”
공작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희에게 반역의 죄를 물으셔도 됩니다.”
나긋한 목소리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폐하께서 반군이 되라 하시면, 되겠습니다.”
반역죄를 물면 진짜로 반역을 일으키겠다는 뜻이었다.
베르고의 군사들뿐 아니라 용과 마물들까지 있는 지금은 우리에게 승산이 높았다.
헤이먼은 제 귓가에서 떠드는 정령들의 얘기를 들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이것들’이라 하셨지요? 그럼 용을 마음대로 부리고 싶다는 폐하의 마음은 진짜인가 봅니다.”
“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황제가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아무스가 인간으로 변해 황제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다행히 옷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굉장히 깔끔한 정복이었다.
아무스는 차가운 시선으로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 주인이 되고 싶다면 내 시험을 통과해야 하지 않겠나? 그것만 통과한다면 너를 내 주인으로 여기겠다.”
“아무스!”
내가 소리를 지르며 팔을 뻗는 순간, 아무스가 제 뒤에 시커먼 공간을 열었다.
“들어가라, 황제. 솔레아도 지나왔던 길이니.”
“나를 시해하려는 속셈인 것을 모를 줄 아느냐!”
아무스는 발악하는 황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멀쩡히 통과하면 나뿐 아니라 마물들과 정령들까지 모두 너의 것이다. 한 나라의 황제로 남을 건지, 세상을 주무르는 신이 될 건지 선택해라.”
그 말을 들은 황제는 뒤돌아서서 응접실에 있는 모두를 둘러봤다.
호위 기사들은 황제를 말렸지만 그는 단호했다.
“다녀오겠다.”
공작님까지 편안한 표정이었다.
“폐하께서 무사 평탄히 돌아오시길 바라겠습니다.”
“자네의 그 말이 진실인지 껍데기뿐인 허언인지는 내 다녀와서 판단하도록 하지.”
“잠깐 기다리십시오. 폐하.”
티온이 등을 곧게 펴고 황제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키가 워낙 큰 탓에 등을 펴고 걷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티온은 싸늘한 눈빛으로 황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여기서 실종되시면 베르고는 시험의 당락 여부와는 상관없이 진짜 반역자가 됩니다.”
“내가 실종될 거라 장담하고 있군.”
“제국을 다스리시는 황제 폐하의 거취를 알 수 없으면 그게 실종 아닙니까.”
“아이고, 마침 제가 들고 다니는 영상석이 여기에!”
카라샤펠은 보물찾기를 하는 사람처럼 능청스럽게 주머니 속에서 영상석을 꺼내며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사뭇 부끄러운 시늉도 했는데, 그 모습이 가증스러울 정도로 태연했다.
“황녀라는 자리가 아무래도 위험이 많다 보니 증거 수집을 위해 항상 영상석을 들고 다닌답니다. 다행히 제가 돈이 많아서. 공녀도 앞으로는 늘 영상석을 들고 다니도록 해.”
영상석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황녀는 황제 쪽으로 굴리며 말했다.
“말씀은 남기고 가세요, 폐하. 돌아오셨을 때 황좌에 누가 앉아 있을지 어찌 압니까.”
황제는 카라샤펠을 노려보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내가 너를 이리 키웠지. 대신 내가 멀쩡히 돌아오면 너는 내 충실한 종이 될 것이다. 카라샤펠.”
“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폐하를 보필할 운명이었습니다.”
어쩐지 자조적으로 들리는 말투였다. ‘보필할 운명’이라는 게 그 외에 다른 삶을 생각할 여유조차도 없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황제는 영상석에 대고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는 나의 의지로 용의 시험을 받기로 하였다. 돌아오면 용과 마물, 정령들까지 모두 내 손에 들어오게 되는 시험이니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지. 나와 함께 온 기사 퀘반과 디페트가 증인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곤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황제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내가 떠난 후 제르노아는 1 황녀 카라샤펠이 통치하도록 해라. 유일한 적자이니. ……나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어받은 딸이다.”
이윽고 황제는 검은 공간 안으로 사라졌다.
아무스는 곧장 그를 뒤따라 들어가려 했다.
“아무스. 또 어디 가는 거야. 가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널 어떻게 찾았는데 저기로 또 들어가려고 하는 거야……!”
아무스를 붙잡는 순간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가 돌아오기를 갈망하고, 그러면서도 아무스와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리며 견뎠는지 모른다.
근데 거길 또 들어가겠다니.
아무스는 자신의 옷소매를 붙잡고 있는 내 손을 떼어 내고는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내 양 뺨을 붙잡고 콧잔등에 짧게 쪽, 뽀뽀했다.
“걱정 마. 네가 아니면 못 해낼 일들이야.”
장난스러운 웃음기를 머금은 아무스는 방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오른쪽 눈을 찡그리며 윙크를 한 후 검은 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응접실이 적막으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나 역시 텅 빈 허공을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공작님과 그레이를 살려 준 카라샤펠이 반역자가 되는 걸 막기 위해 그녀가 우리를 도운 게 정당하다고 말한 것뿐인데.
……모른 척했어야 했나. 카라샤펠이 반역자가 되건 말건, 우리 가족이 다친 이유를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삶은 베르고에서 배운 적이 없었다.
내가 근 1년간 이곳에서 배웠던 삶의 방식은 그런 게 아니었다.
멍하니 서 있는 내가 걱정됐는지 그레이가 내 옆으로 와 물었다.
“너 괜찮아?”
“……응. 괜찮아. 아무스는 돌아올 테니까.”
카라샤펠이 테이블 위의 영상석을 집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 영상석에 기록된 폐하의 말씀이 용이 실재한다는 증언이 될 수 있겠군. 그리고 이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도 용의 존재를 알다 못해 익숙하게 여기는 정도니 전설 속의 존재를 인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듯해. 일단 고집 센 귀족들의 상식부터 깨부수도록 하지. 누가 나와 함께 황궁으로 갈 거지?”
나는 카라샤펠을 똑바로 보며 손을 들었다.
“공녀가 갈 거야?”
“네. 제가 용의 주인이니 제가 가야죠.”
“좋아. 증인이 한 명 더 필요하니 베르고 공도 함께 가지.”
랏샤와 공작님과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전에 랏샤가 주최한 파티에 참석했을 때 이후로는 처음으로 방문하는 것이었다.
랏샤는 황족과 각 부서 장관들을 모두 모아 놓고 전설 속의 용은 실존한다는 얘기를 시작했다.
본인이 직접 봤으며, 베르고의 공녀인 솔레아 폰 베르고가 용의 주인이라고도 얘기했다.
유명한 마법사였던 이달론은 인간의 수명을 빼앗아 제르노아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베르고에서 그걸 막았다고까지 말하자 역시 황비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시다니요!”
“폐하께 직접 여쭤보겠습니다!”
“용이라니, 억지를 부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요! 지금 동화를 쓰시는 것도 아니고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작님이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제 오른쪽 눈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긁적였다.
“그럼 제가 이 흉터를 제 손으로 만들었을까요? ……할 수야 있겠지만 적을 잘 죽이려면 이왕이면 눈이 두 개인 게 더 좋겠지요.”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흉터가 아무래도 더 험상궂은 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한 듯했다.
카라샤펠은 들고 온 영상석을 모두에게 보여 줬다.
퀴렐 황비는 분에 찬 목소리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저들과 작당하고 나라를 집어삼키려는 속셈이 아닙니까! 베르고는 황족을 죽인 가문입니다! 내 아들을 도륙 내어 죽인 그 가문이라고요!”
퀴렐 황비가 너무 흥분한 탓인지 다른 귀족들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황제가 직접 영상석에 남긴 말이 꽤 영향이 있는 것 같았다.
“용이 실재한다는 거 아닌가.”
“소문이 돌긴 했어. 검은 용이 있다고. 어떤, 마법사를 찾고 있다고 했는데 그게 이달론이었나 보군.”
“……사실 카라샤펠 황녀 전하가 황위를 물려받으시는 게 당연하지.”
“그럼. 적자가 아니신가.”
“베르고 공작이 애런을 죽이긴 했지만 그것도 황명이었으니까.”
“재판도 받았다 들었네.”
“밤새도록 폐하와 귀족들을 모욕했다지. 마법에 걸린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야말로 미친 게지.”
퀴렐은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질렀다.
“내 아들이 미쳤다니! 내 아들이 미쳤다니! 거짓말이야! 모두 조작된 거라고! 용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 황제 폐하를 모셔 와라!”
카라샤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문 앞에 서 있는 시녀에게 문을 열라고 손짓했다.
시녀가 문을 열자마자 티온과 함께 커다란 마물 세 마리가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목줄을 채운 걸 보니 그새 목줄 적응 훈련을 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티온을 믿고 마물들이 참아 주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나는 티온에게서 마물 목줄을 건네받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제가 끊임없이 살아난다는 그 마물도 길들이는데, 전설 속의 용이라고 길들이지 못할 건 뭡니까.”
비스듬히 올라간 내 입꼬리를 본 카라샤펠이 슬쩍 내 귓가에 속삭였다.
‘방금 굉장히 악당 같았어, 공녀.’
하지만 퀴렐은 끝까지 믿지 않았다.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게 아니면 믿지 않겠다!”
그때 허공이 열리고 누군가 시커먼 공간의 균열 속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황제였다.
……이렇게 빨리 돌아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