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황제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 향해 있는 걸 눈치챘는지 공작님이 얼른 황제와 내 사이로 끼어들었다.
“폐하! 제 딸은 한 살입니다.”
“뭐라?”
“아빠악!”
한 나라의 황제 앞에서 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는 건지.
얼굴이 빨개진 내가 아빠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내가 소리를 질러 놀랐는지 마물들이 펄쩍 뛰어올라 공작님과 내 의자 등받이에 앞발을 올렸다.
꼬리를 가장 빠르게 흔드는 마물은 우리 둘 사이로 파고들어 일부러 떨어뜨려 놓기도 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물들의 공감 능력이 꽤 높아 보이는군.”
털이 긴 마물은 폴짝 뛰어 응접실의 탁자 위로 올라왔다. 그걸로도 모자라 꼬리를 바짝 세우고 황제에게 엉덩이를 보여 주기까지 했다.
“감히 내게 엉덩이를 보이다니! 이 무슨 무엄한 태도인가!”
황녀는 픽 웃더니 손을 뻗어 마물의 턱을 살살 긁어 줬다.
그러자 마물이 테이블에 몸을 누이고는 골골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폐하. 이 마물은 고양잇과인 것 같습니다. 고양잇과 동물이 엉덩이를 보여 주는 건 호감의 표시라고 하죠.”
“크흠.”
황제는 여전히 탐탁지 않아 보였지만, 제 앞에서 배를 보이며 뒹굴뒹굴 뒹구는 마물이 영 싫지 않은 눈치였다.
겨우 분위기가 풀어지려던 찰나였다.
“……야옹.”
마물이 낸 소리는 아니었고, 랏샤가 낸 소리도 아니었다. 황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티온이었다.
저 큰 몸 어디에 숨겨 뒀었는지 품 안에서 강아지풀을 꺼낸 티온이 좌우로 흔들며 작게 중얼거렸다.
“……야옹. 여기 보세요. ……야옹, 야옹이.”
황제와 랏샤가 두 눈을 크게 뜨고 티온을 바라봤다.
하지만 티온은 두 사람의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마물야옹이의 귀여움에 영혼까지 모두 빼앗긴 것 같았다.
티온의 날카로운 눈매가 곱게 접혔다.
“……예쁘다. 야옹이.”
“흐음…….”
황제는 의미심장하게 숨을 고르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공녀보다는 나을 수도…….”
“예?”
너무 작게 말하는 통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들며 되물었지만 황제는 마음이 급했는지 카라샤펠을 달달 볶기 시작했다.
“황궁의 의술사들을 모두 데리고 빠져나간 네게 죄를 안 물을 순 없다. 카라샤펠. 정당한 이유라도 있어야 돼.”
“남편이라도 구하란 말씀이십니까?”
“아내보다는 나을 거라 본다.”
“폐하!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제 딸은 한 살입니다!”
공작님이 다급하게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공작은 미쳤는가! 공녀가 어찌 한 살이야!”
“말씀드리자면 길지만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제 딸은 안 됩니다!”
“그럼 아들은 괜찮다는 뜻이겠지. 베르고 공!”
눈치 빠른 그레이가 얼른 테이블에 엎드렸다.
“아빠는 또 딸만 예뻐하네!”
놀란 헤이먼이 그레이의 어깨를 잡으며 타일렀다.
“그레이! 폐하 앞에서 이 무슨 추태야. 당장 일어나지 못해!”
“힝입니다. 주워 온 아들은 아들도 아니다?”
헤이먼의 만류에도 그레이는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당황한 헤이먼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폐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공작님이 차별 없이 저희 형제들을 키워 주신 터라 가족끼리 있을 때 격의 없이 응석을 부리는 일이 잦습니다. 평범하고 다복한 가정의 모습이라 생각하시고 넓은 아량으로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황제의 두 눈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그는 팔짱을 끼며 천천히 자리에 앉더니 한쪽 손을 스윽 뻗어 카라샤펠을 쿡 찔렀다.
“싫습니다.”
카라샤펠이 즉답했다.
“왜! 저 정도면 됐지!”
“저는 제 앞에서 기죽지 않는 사람이 좋습니다. 하물며 폐하 앞에서도 말입니다. 아무 때나 픽픽 쓰러져도 안 되고요.”
그 말을 들은 황제가 곧장 헤이먼을 쏘아봤다.
당황한 헤이먼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황족에게 취해야 할 예의였으니 헤이먼에겐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황제는 그게 영 마뜩잖은 듯했다.
“크흠! 큼!”
고개를 휙 돌려 티온을 보자 그는 마치 테이블 밑에 들어가기라도 할 기세로 허리를 굽혀 마물들과 놀아 주고 있었다.
제 딸을 바로 옆에 두고도 마물에만 관심이 있는 순박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황제의 이맛살이 더 험악하게 구겨졌다.
황제가 그레이를 노려봤다.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있던 그레이는 황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이고, 평소에도 연약하던 내가 또 몸살이라니.’라는 말과 함께 픽 쓰러졌다.
너무 연기 톤이었다.
‘저건 그냥 모욕 아닌가.’
그레이의 기행은 보는 내가 다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짜증이 난 황제의 한숨 섞인 숨소리가 마물들의 헥헥대는 소리와 함께 응접실을 채웠다.
카라샤펠은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목소리로 황제에게 말했다.
“전 어차피 폐하께 황위를 물려받기 전까지는 뜻이 없습니다.”
“황궁 의술사들을 모두 데리고 나간 건 중죄다! 그걸 어떻게 설명하려고! 안 그래도 퀴렐 황비가 애런을 잃은 이후로 너와 베르고에게 복수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빌미를 줄 셈이냐!”
카라샤펠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전 공녀가 다친 줄 알았습니다.”
황제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뜨였다.
그의 푸른 눈이 다시 나를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너였냐!’ 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말도 했다.
“아닙니다! 저는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랏샤는 태연하게 말했다.
“저택에 오고서야 공녀가 다치지 않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도 베르고 공을 치료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황녀를 붙잡고 짤짤 흔들며 묻고 싶었다.
미쳤어요? 전하. 정말 미치셨어요? 저한테, 아니, 우리 집 사람들한테 왜 이러세요? 미우면 말로 하세요!
황제의 서슬 퍼런 눈빛이 다시 공작을 향하는 순간 내가 끼어들었다. 카라샤펠은 아무래도 이 엉망진창의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절대 자의로는 끝맺지 않겠지.
“폐하. 황녀 전하께 죄를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제 아버지는 마법사 이달론에게서 제르노아를 지키려다 다치셨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이를 보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황제의 얼굴이 사뭇 진지하게 변했다.
“……제르노아를 지키려다 다쳤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진실에 구라를 섞어야 할 때였다.
내가 입을 떼려 하는 순간 공작님이 내 팔을 붙잡았다.
“아가. 그렇게까진 말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책임지마.”
아니, 아빠. 가만히 좀 계세요. 50몇 살밖에 안 된 어중간한 아기 늙다리 속이는 건 이제 저한텐 일도 아니라고요.
다행히 황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거들었다.
“공녀. 나라를 집어삼키려 했던 이달론의 더러운 속셈을 알게 되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당신의 충심은 높이 사겠어. 하지만 폐하께 그 모든 걸 말할 수 있겠어?”
“대체 무슨 일이냐.”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그레이까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레아! 위험을 무릅쓰고 폐하와 이 나라를 지키려 했던 네 용기는 보답받고자 한 게 아니었잖아!”
저놈은 황녀 전하 엿 먹일 때는 대놓고 연기하는 티를 내더니 황제 폐하 속일 때는 국민 대배우가 따로 없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공작님만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
공작님은 슬쩍 머리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혹시 내가 모르는 이달론의 속셈이 있었니?”
나는 아빠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아빠한테 ‘아빠, 눈치 좀. 지금 이건 혼이 담긴 구라예요.’라고 설명할 순 없었다.
일단 침착하게 황제와 눈을 맞추고 입을 털기 시작했다.
“위대한 마법사라고 불렸던 이달론은 사실 다른 사람들의 수명을 빼앗아 살아온 악한 마법사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손에 죽어 나갔고, 실험에 이용당했습니다.”
이건 진짜다.
“용들을 죽여 마력을 축적한 이달론은 제르노아를 집어삼킬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걸 알아챈 오빠들과 저, 공작님이 합심해서 이달론을 처치했습니다.”
이건 살짝 구라다.
‘데헷. 사실 아무스와 저의 수천 년의 러브 스토리입니다. 이달론은 존나 오래 살며 복수하려고 했지만 결국 지 팔자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지가 먼저 저한테 족같이 굴었으니까용!’라고 이실직고할 순 없었으니까.
하지만 황제는 내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용? 하! 공녀가 헛소리를 하는군. 공녀가 머리를 다친 게 아닌가 걱정되는데.”
“이달론은 사람들을 죽여 마력을 얻은 후, 용들이 살았었다는 역사를 지웠습니다. 그래서 폐하도 모르시는 거죠.”
하지만 황제의 구겨진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용이 있다는 걸 어떻게 믿지?”
“……제가 이달론을 막지 않았더라면 제르노아의 역사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을지도 모릅니다. 폐하의 존재를 기억하는 이들 역시 아무도 없었을지도 모르죠.”
“뭐라?!”
그때 갑자기 정원사 포드릭의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고! 여기서 변신하지 말라니까요! 용이 내 꽃, 내 잔디 다 죽이네! 아이고, 공작님! 아가씨!”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곧바로 창가로 뛰어간 그레이가 커튼을 열어젖히고 소리쳤다.
“야! 아무스! 솔레아 말하고 있잖아! 조용히 해!”
겉으로는 아무스에게 핀잔을 주는 것 같았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다.
황제에게 실재하는 용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레이가 양쪽 커튼을 모두 젖히고 창문까지 두 개 다 열어 버려서 넓은 정원과 시커먼 ‘그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창문 앞을 가리고 있는 커다란 뒷다리 때문에 응접실 안으로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레이가 검고 두꺼운 비늘을 주먹으로 퍽퍽 치며 외쳤다.
“아무스. 폐하 오셨는데 인사드려야지.”
다리가 천천히 움직이자 각도에 따라 비늘에 햇빛이 닿아 반짝거렸다.
곧 창 안으로 아무스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물론 용무스의 머리에 비하면 작은 창은 금세 깨지고 말았다.
빠드득 소리와 함께 창틀과 벽, 커튼이 모두 떨어졌다. 용의 거대한 머리와 뿔이 응접실 벽을 허물고 들어왔다.
황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은 듯 서서 샛노란 눈이 번뜩이는 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티온은 마물들이 놀랄까 봐 쓰다듬어 주고 있었고, 그레이는 무너진 건물 파편이 튀자 짜증스럽게 옷을 탈탈 털어 냈다.
헤이먼은 한숨을 쉬고는 왜 이렇게 일을 키우는지 모르겠다며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작님도 그 비슷한 감정인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중이었다.
오직 황녀와 나만 제자리에 가만히 앉은 채 태연하게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무스의 얼굴이 황제와 닿을 듯 가까워졌다.
용이 내뱉는 숨결에 황제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휘날렸다.
아무스의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반갑다. 인간.”
“……나는 제르노아의 황제다.”
“음. 그렇군. 나는 솔레아의 용이다. 이제 솔레아는 내 거다.”
빠그작 소리와 함께 공작님이 잡고 있던 의자의 팔걸이가 부서졌다.
놀란 듯 아무스를 뚫어지게 보던 황제는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달론이…… 용의 역사를 지웠나?”
“그렇다.”
“그럼 그자가 나를 죽이고 제르노아의 역사도 지우려고 했나?”
나는 황제가 서 있는 곳에선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아무스에게 맹렬하게 윙크했다.
아무스의 동공이 잠깐 커졌다.
“……솔레아 말이 다 맞다.”
잘한다, 내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