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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156/192)

156화

일단 나도 공작님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위대한 빛을 뵙습니다.”

황제는 공작님과 내게 고개를 들라는 말을 하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왜 그러시지?

곧이어 랏샤와 오빠들이 저택을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들 역시 갑작스러운 황제 폐하의 방문에 놀란 듯 당황한 말투로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위대한 빛을 뵙습니다.”

황녀 전하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걸어와 공작님과 내 앞에 섰다.

“폐하의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딸이 제국의 위대한 빛을 뵙습니다.”

황제는 장난스레 인사하는 랏샤를 향해 탐탁지 않은 기색을 드러내며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중 누구니?”

“지금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대답을 못 하겠습니다. 폐하. 고개를 들라고 해 주세요. 제국의 미천한 빛이 꺼져 버리겠어요.”

“……고개를 들라.”

“저만 고개를 들까요?”

“……모두 고개를 들라.”

랏샤는 정말 사람을 가리지 않고 갖다 박아 버리는구나. 절대 적이 되지 말아야지.

속으로 결심을 다지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제의 표정은 복잡미묘해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랏샤의 뒷모습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당당했다.

황제는 다시 아까와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이 중 누구냐. 카라샤펠.”

“무슨 뜻으로 여쭤보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폐하.”

“네가 그리 모르쇠로 일관한다면 나는 네게 반역의 죄를 물을 수밖에 없다.”

제 딸에게 반역의 죄를 물겠다고 말하는 황제의 표정은 미간만 살짝 찡그려졌을 뿐, 너무 무미건조했다. 공작님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폐하. 들어가서 얘기하시지요. 보는 눈이 많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건지 황제는 헛기침을 한 번 한 후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택 안으로 들어온 황제는 현관에 그림처럼 서 있었다.

“응접실은 이쪽입니다. 폐하.”

공작님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랏샤가 먼저 응접실을 안내하자 황제는 뒷짐을 지며 짜증스럽게 답했다.

“네가 이 집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안내를 하는구나.”

“그럴 리가 있습니까. 폐하 심기가 불편해 보이시니 눈치가 빠른 제가 끼어든 겁니다.”

황제는 살짝 고개를 돌리곤 우리 베르고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모두 따라 들어오지.”

내 옆에 붙어 같이 들어가려던 아무스를 본 황제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남루한 옷을 입고 있어 아마 심부름꾼이나 노예쯤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작게 속삭였다.

“아무스. 밖에서 조금만 기다려.”

“왜에.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

“있을게. 있을 건데 지금은 잠깐만 떨어져 있자. 폐하가 무슨 일 때문에 오셨는지 모르고, 네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시잖아.”

침울한 얼굴로 내게서 떨어진 아무스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응접실 문 앞에 멈춰 섰다.

저거 누구 용인데 저렇게 귀여워?

……하, 귀여워 보이면 망한 거랬는데. 난 망했어. 내 용이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

방금 뽀뽀를 하고 와서인지 아직도 가슴이 콩닥거렸다. 물론 갑자기 찾아온 황제 폐하 때문에 약간 짜게 식긴 했지만.

넓은 응접실로 들어간 황제는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고 공작님과 랏샤가 양쪽 대각선 자리에 앉았다.

나와 오빠들이 눈치를 살피다 공작님의 옆에 줄줄이 앉으려던 찰나 황제가 큰 소리로 헛기침을 했다.

“큼!”

지 딸 옆에는 왜 아무도 안 앉냐는 것 같은데.

근데 폐하. 따님 성질이 보통이 아닌데 누가 섣불리 그 옆에 앉겠어요.

그레이는 내 등을 살짝 밀었고, 나는 헤이먼의 옆구리를 찔렀다. 헤이먼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다가 팔꿈치로 티온의 등을 쿡 찔렀다.

결국 아무도 찌르지 못한 티온이 티 나지 않게 입꼬리를 내린 후 카라샤펠 황녀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다행히 인상이 험악해서 그런지 침울해하는 게 그다지 크게 표가 나진 않았다.

우리 형제들끼리만 입술을 안으로 말며 웃음 참기 챌린지를 했을 뿐.

모두 자리에 앉고도 몇 분 동안 지독한 정적이 흘렀다.

우리 집 하인이 차를 가져와 따르자 황제 폐하는 하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휘휘 저었다.

카라샤펠은 싱긋 웃으며 하인에게 말했다.

“저 손짓은 눈에 안 띄게 꺼지라는 뜻입니다.”

“카라샤펠.”

“우리끼리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자리를 비키라는 뜻입니다. 모두 나가 주겠어?”

시중을 들 하인들과 하녀들이 모두 나가자 황제는 랏샤를 노려보며 다소 노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카라샤펠! 이 중 누구냐고 내가 세 번째 묻는구나!”

“주어도 없이 말씀하시는데 제가 뭐라 대답을 해 드려야 합니까?”

“네 옆에 앉은 그자냐!”

긴장했는지 허리를 꼿꼿이 편 채 가만히 앉아 있던 티온이 화들짝 놀랐다.(역시 전혀 티 나지 않았다.)

공작님이 부녀지간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대화에 끼어들었다.

“폐하. 귀한 발걸음 해 주셔서 영광일 따름입니다만 황궁에 계셔야 할 귀하신 분이 어찌 이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한 말임에도 공작님의 말투가 워낙 당당해서 내 귀에는 달리 들렸다.

‘귀한 곳에 어떻게 누추하신 분이 찾아오셨나?’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지 카라샤펠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곤 슬며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조각상처럼 굳은 채 랏샤만을 노려보던 황제의 시선이 드디어 공작님 쪽으로 향했다.

“……공작, 얼굴이 말이 아니군. 못 본 새 큰일이라도 겪었나?”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개심이 가득 묻어 나오는 말투였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예. 크게 다쳤습니다만 전하께서 황궁의 의술사를 데려와 치료해 주신 덕에 무사히 폐하를 뵙습니다.”

“……자네가 다쳤다고? 내 의술사들이 자네를 치료했다는 말인가?”

말투가 왜 저래. 우리가 황궁 의술사 데려와 달랬나.

나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리며 주먹에 힘을 줬는지 내 옆에 앉아 있는 아빠가 손을 뻗어 다리 위에 놓인 내 손을 꾸욱 잡았다.

아무래도 참으라는 뜻 같았다.

왼손은 헤이먼이 잡았다.

역시 참으라는 뜻 같았다.

양손을 아빠와 오빠에게 잡힌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공작님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황제에게 답했다.

“예. 크게 다쳐 피를 많이 흘렸고, 몸 곳곳에 찢어진 상처도 많았습니다. 마법으로 다친 상처라 의사가 아닌 의술사들이 필요해 부득이하게 폐하의 귀한 의술사들이 저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폐하께서 윤허해 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테니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

“윤허한 적 없네.”

음?

깜짝 놀라 카라샤펠을 바라봤다.

온 가족의 눈이 카라샤펠을 향했고, 랏샤의 옆에 앉은 티온 역시 적잖이 놀란 듯 옆자리에 앉은 황녀를 향해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 와중에 랏샤는 태연하게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중요한 사람이 다쳤다. 내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소중한 사람이니 치료해 주러 가야겠다.’라고 말했다지. 그게…… 자네일 줄이야.”

공작님의 눈동자가 사방팔방으로 날뛰었다. 황제는 당황한 공작님의 반응을 보곤 곧장 다시 카라샤펠에게 소리쳤다.

“아무리 공작이 지금 혼자라 해도! 카라샤펠! 너는 이제 내 유일한 후계자다! 대공이 될 자를 고르고 골라도 모자랄 판에 베르고 공작이라니!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 줄을 모르는 거냐!”

“……폐하.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듯합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보시다시피 저는 애가 넷이나 딸린 홀아비입니다.”

“자네는 오래전에 상처(喪妻)하지 않았나. 황녀가 아무리 들이댔어도 자네가 거절했어야지!”

“그런 일 없습니다!”

아빠가 어금니를 깨무는 아드득 소리가 들렸다.

저 미친 중세 늙다리가 지금 남의 아빠한테 뭐라는 거야. 그것도 돌아가신 공작 부인까지 들먹거리면서. 우리 아빠가 그런 쓰레기로 보이나.

……저 시발, 기껏해야 50몇 년 산 게. 나는 방금 전까지 수백 년을 살다 왔는데 이 새파랗게 어린 놈의 자식이.

나는 얼른 대화에 끼어들었다.

“폐하. 황녀 전하께서는 누가 다쳤는지도 파악하지 못하신 상태로 의술사들을 데리고 저희 저택으로 찾아오셨습니다. 평소 저희 집안과의 친분 때문에 급히 둘러대신 말 같으니 억측은 그만하셨으면 합니다.”

날이 선 내 말투에 황제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황녀가 거짓말을 했다?”

나는 황제의 푸른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죠. 다음 세대에서 황녀 전하를 모시게 될 충신들이 아닙니까, 저희가.”

“짐이 버젓이 네 눈앞에 살아 있는데 내 사후를 논하는구나. 공녀의 태도가 심히 건방진 게 나를 모욕하는 것처럼 느껴지는군.”

금방이라도 내 목을 벨 것처럼 말하는 황제의 공격적인 말투에도 그다지 쫄리지 않았다.

내가 산전수전공중전, 거기다 시공간까지 헤맨 사람인데 당신한테 쫄리겠어?

그때 누군가 문을 손톱으로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둘이 아닌 것 같았다. 문뿐만 아니라 벽까지 손톱으로 긁어내리는 듯 응접실 전체가 괴기스러운 소리로 가득 찼다.

“누가 감히 장난을 치는 거냐!”

황제의 분에 찬 목소리에 헤이먼이 조신하게 답했다.

“폐하. 황송하오나 베르고에 새로운 반려동물들이 생겼습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라 그러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반려동물? 하! 베르고에선 감히 황제가 있는 응접실 문을 긁어도 가만히 두나 보군.”

황제는 이를 악물더니 제 뒤에 서 있던 호위 기사 둘에게 명령했다.

“당장 문을 열어서 문밖에 있는 게 무엇이든 죽여라. 개든 고양이든, 어떤 짐승이든.”

“예, 폐하.”

기사는 넓은 보폭으로 척척 걸어갔다. 티온이 안절부절못하며 눈을 굴리자 랏샤가 그런 티온의 팔을 한 번 툭 치는 게 보였다.

조용히 있으라는 것 같았다.

마물들은 문이 열리자마자 응접실로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공작님과 황녀 전하가 놀라지 않은 걸 보아 하니 마물들의 존재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긴, 내가 아무스 찾으러 간 사이에 저택에 있던 황녀 전하도 당연히 마물들을 봤겠지.

“으아아악!”

“폐하! 조심하십시오!”

열린 문 사이로 마물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들어오자 황제는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 무슨 일이냐! 왜 이곳에 마물들이 있는 거야!”

황제의 근위대는 마물들에게 깔렸다.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럴 새도 없었다. 덩치 큰 마물들이 검을 물어서 집어 던져 버렸다.

“앉아.”

내 목소리에 마물들이 일제히 자리에 앉았다. 근위대를 깔고 앉은 마물들이 나를 보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공작님이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기뻐하십시오. 제 딸이 마물들을 길들였습니다. 이제 국경에서 마물과 쓸모없는 소모전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폐하의 백성들이 전쟁터로 나가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한참 상황 파악을 하던 황제가 분을 참는 목소리로 공작님에게 말했다.

“……베르고. 방금 날 시해하려 한 건가.”

“저는 그저 제 딸이 세운 공을 폐하께 보여 드리게 되어 기쁠 뿐입니다.”

공작님이 하도 태연한 표정이라 나도 공작님을 따라 생긋 웃었다.

“마물과의 긴 전쟁을 마무리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또한 폐하의 업적입니다.”

랏샤가 마무리를 날렸다.

“폐하. 정말 너무 소중하고 도움이 되는 공신가 아닙니까? 황궁의 의술사들을 모두 데려와 치료해도 전혀 아깝지가 않네요. 일단 전 그렇게 느낍니다.”

황제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긴 한숨을 내쉬곤 랏샤에게 물었다.

“……카라샤펠. 일단 베르고 공은 아닌 게지?”

“예, 폐하. 전 연상은 별롭니다.”

랏샤는 태연한 얼굴로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마치 줘도 안 먹는다는 것 같아 이상하게 기분이 별로였다. 우리 아빠가 뭐가 어떤데. 아니 물론 절대 안 되지만.

“……그럼 공자들 중 누가 너보다 나이가 많지?”

“다 저보다 어립니다. 그중 공녀가 제일 어리죠.”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눈을 깜빡이며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틀어 황제를 바라봤는데 황제의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새파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너야?’ 하고 묻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아닌데요. 국법도 아니라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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