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아무스와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당장이라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그렇게 흘려보내긴 싫었다.
오르막길을 다 오른 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이곳에선 잃었던 인연을 다시 만난다는 전설이 있거든. 뭐, 꾸며 낸 이야기지만 워낙 경치가 아름다우니까 한 번쯤은 와 볼 만하지.’
집에 돌아가면 헤이먼한테 말해 줘야겠다.
그 전설 거짓말 아니라고.
여기는 아무스가 나를 기다렸던 수많은 장소들 중 하나였다고.
나는 미소를 머금고 나의 아름다운 검은 용의 이름을 불렀다.
훨씬 오랜 시간 전부터 가슴속에 담았던 이름이었는데.
“아무스.”
정령들이 다시 깨어났고, 내 몸 안의 활력도 돌아왔다. 아무스는 살아났어, 아직 자고 있을 뿐.
“우리 약속했잖아. 내가 한 번 부르면 넌 어떻게 하기로 했지?”
내 몸의 반을 채운 그의 마력이 반응하며 얕게 떨려 오고 있었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 분노하고, 슬퍼하고, 오래도록 나만을 기다린 나의 용이 깨어났다.
그의 이름을 또 불렀다.
“아무스.”
내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흘러 들어온 바람엔 온갖 향기가 뒤섞여 있었다.
온 세계를 스치며 떠돌아다니는 바람처럼, 나도 너를 찾아서 얼마나 헤맸는지 몰라.
기대감에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질 않았다.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검은 공간에서 방금 빠져나왔는지 아무스는 멍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웃기게도, 그는 내가 산이었던 시절 선물한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걸 여태 버리지도 않고 가지고 있었나 보다.
“세 번째로 부르면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기억하지?”
그와 눈을 맞춘 채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무스.”
믿을 수 없다는 듯 발을 질질 끌며 내게 다가오던 아무스는 이내 속도를 붙여 달려와 나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내가 먼저 아무스를 살짝 안은 적은 있지만 그가 나를 이렇게 부서져라 껴안은 건 처음이었다.
아무스의 낮은 목소리가 덜덜 떨려 왔다.
“나 못 한 말 있어. 산, 지윤, 솔레아……. 나 있잖아. 아팠던 게 아니었어. 네가 먹인 약초에 독이 있던 게 아니라…….”
“그래. 알아. 이 둔치야. 알고 있어.”
아무스는 나를 으스러져라 끌어안고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끊임없이 뽀뽀를 해 댔다.
“……사랑해.”
바람 한 줄기조차 파고들지 못할 정도로 나를 꽉 안고 있던 아무스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날 떼어 냈다.
“혹시 이거 꿈이야? 죽어서 천국에 온 거야? 넌 살린 줄 알았는데!”
“아니야. 숨바꼭질이 끝난 거야. 내가 널 찾은 거고. 들으면 깜짝 놀랄 거야.”
잠깐 고개를 갸웃하던 아무스는 내가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됐는지 나를 다시 끌어안았다가, 다리가 풀린 듯 날 안은 채로 주저앉았다.
“……끝났구나. 이제 정말 다 끝났구나.”
주저앉고서도 나를 놓지 않는 아무스 때문에 나는 그의 다리 위에 앉아 있었다.
덩치가 이렇게 큰 줄 몰랐는데.
그의 품에 쏙 들어가 있으니 환한 햇빛도 보이지 않았고 공기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숲의 향기를 닮은 아무스의 시원한 체취만 가득했다.
내가 품속에서 꼬물거리자 아무스가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봤다.
“……산.”
“산은 산인데…….”
“물은 물이로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니, 너희 나라에 그런 말이 있길래.”
“아니지. 그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겠지. 아무튼 내 말은 내가 산은 산이긴 한데 그사이에 지윤이기도 했고, 지금은 또 솔레아라서 혹시 네가 생각한 산이 아니라서 실망한 거면…….”
“그럴 리가.”
아무스의 긴 손가락이 내 속눈썹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지나갔다.
그가 왼쪽 눈꼬리에 입 맞추며 말했다.
“하나는 검고 하나는 흰 눈이었다가, 둘 다 검은 눈이었다가, 이젠 보라색 눈이 됐네.”
“아무스, 그러니까 나 다 다른 몸인데 괜찮냐고.”
“다 너야.”
아무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찡그린 내 미간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괜히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입 맞춰도 돼?”
“두 번이나 해 놓고 왜 물어봐?”
“아니, 입술에. 해 보고 싶었는데. 1,000년 넘게 참았거든. 잠에 빠져 있던 시간만 1,000년이고, 사실 그 전에 지나간 시간까지 합치면 더 길거든. 아까 난 너한테 고백을 했고, 너도 비슷한 마음이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내가 오래 살아서 마음이 무거운 걸 수도 있고, 네 60년 삶을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나보다 더 가벼운 마음이어도 난 괜찮고.”
횡설수설하며 핑계를 찾는 아무스를 보다가 손을 올려 그의 두 볼을 잡고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자, 됐지. 내 마음이 가볍긴 뭐가 가벼워. 나도 너랑, 악!”
내 허리와 목덜미를 받친 채 아무스가 나를 뒤로 넘어뜨렸다.
커다란 날개를 펼쳐 사방을 가린 아무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두 입술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아무스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가 말할 때마다 말캉한 입술이 내 입술을 조금씩 스쳤다.
“나 되게 무거운 마음이야. 너 후회할지도 몰라. 근데…… 도망가면 잡으러 갈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거절당할까 봐 무서운 것 같았다.
아무스의 두 뺨은 열이 올라 발갛게 물들어 있었고, 닿아 있는 온몸에서도 열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나만 두고 가도…… 잡으러 갈 거야.”
밝은 노란색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어 나는 손끝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안 가. 이젠 아무 데도 안 가, 아무스.”
키스할 줄 알았더니, 그 말을 들은 아무스는 나를 안은 그대로 내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진짜로 안 갈 거야? 아무 데도 안 갈 거지? 나만 두고 혼자 가 버리지 않는 거지.”
“네 곁에 있을 거야. 안 가. 나 강하잖아. 이젠 정말 안 떠날 거야. 나 믿어.”
“……응, 응.”
내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아무스의 울음 섞인 대답을 들은 나는 한참 동안 그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홀로 기약 없는 약속을 지키며 오랜 시간 나를 기다려 온 아무스의 등을 다독였다.
“다 울었어? 혹시 키스할 거면 제대로 가리고 해. 정령들이 보면 헤이먼한테 가서 주접떨면서 이를지도 몰라.”
긴 속눈썹을 축축하게 적신 채 아무스는 예쁘게도 눈을 접어 웃었다.
그러고는 날개를 다시 활짝 펼쳐 나를 꽁꽁 감쌌다. 입술이 조심스럽게 닿아 왔다.
눈을 감은 채 긴 입맞춤을 나눈 후 살짝 눈을 뜨고 조금은 찌질하게 물었다.
“혀, 혀도 쓸 거야?”
“아! 분위기 깨게 왜 그런 말을 해!”
“키스 처음 해 본단 말이야!”
“누군 해 봤어?!”
“해 봤으면 죽는다!”
“죽는다는 말을 왜 해!”
“내가 죽는 거 말고! 네가 죽는다고!”
“안 해 봤어! 아니, 그리고 내가 죽으면 넌 좋을 거 같아?”
“좋겠냐? 안 좋으니까 너 살리려고 그 난리를 부렸지! 내가 무슨 고생 했는지 네가 알았으면 너 벌써 혀 두 개는 넣었어!”
“나 혀 하나야! 무슨 소리야! 혀를 넣으란 거야, 말라는 거야!”
“지, 지금은 말고! 기분 이상해! 이상하단 말이야! 그리고 더워! 날개 좀 걷어 봐!”
“아까는 날개로 가리라며!”
“키스 더 안 할 거면 그냥 걷어 줘! 덥다고! 너 몸이 왜 이렇게 뜨거워? 뱀이잖아!”
“뱀 아니라 용이라니까? 그리고 네 몸이 뜨거운 거야!”
“내, 내가?”
아무스가 얼른 날개를 걷어 버렸다.
갑자기 시야가 환하게 밝아지자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휙 돌아눕자 뒤에서 아무스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뒤통수와 목뒤에 쪽쪽 입을 맞춘 아무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음에, 천천히, 하나씩 하자. 내 곁에 쭉 있을 거잖아.”
“알, 알았으니까 저리 가. 쪽팔려.”
“……아깐 키스하자며.”
왠지 불퉁한 목소리인 걸 보니 삐진 것 같았지만 당장 기분을 풀어 주기엔 너무 부끄러웠다.
……입술 부비는 게 이렇게 민망한 줄 몰랐지. 드라마나 영화에선 다들 잘만 하던데!
“산.”
“…….”
“지윤아.”
“…….”
“솔레아.”
“…….”
“짝, 내 짝. 내 산. 내 지윤아. 내 솔레아.”
엎드려 누워 있는 내 위로 아무스가 몸을 겹쳐 왔다. 내 허리를 안은 단단한 두 팔 때문에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무거워, 비켜.”
“옷에 흙 묻잖아. 일어나. 뽀뽀 더 안 할게. 혀도 다음에 넣을게.”
“좀!”
“다음엔 꼭 넣어 보자.”
“아, 그냥 호기심에 한 말을 가지고 되게 뭐라 그러네!”
아이처럼 키히히, 소리를 내며 웃은 아무스는 나를 안아 들고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너 사람인 채로도 날개 펴서 날 수 있어?”
“용일 때보다 힘이 더 들어가긴 하지만 날 수 있어.”
“무거워?”
“……용일 때보다야 무겁지.”
“뭐야. 그럼 내려 줘. 그냥 걸어가도 돼.”
아무스는 씩 웃으며 내 볼에 쪽 입 맞췄다.
“지금은 괜찮아. 붙어 있고 싶어. 지금은 그냥 다 좋아. 너무 좋아. 네가 너무 좋아.”
그렇게 아무스의 품에 안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내 집으로.
내가 아무스를 찾으러 간 사이에 공작님께 마력을 때려 박아 치료했는지 공작님은 정원에 나와 계셨다.
“공, 아빠!”
“그래. 우리 공딸.”
아무스와 땅으로 내려오자마자 공작님의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
“하하. 우리 딸. ……옷에 흙이랑 풀이 많이 묻었구나. 바닥에서 굴렀니? ……왜일까? 하하.”
겨우 가라앉은 얼굴이 다시 불타 버릴 것 같아서 얼른 화제를 바꿨다.
“혈색이 좋아지셨어요.”
“그래, 흉터는 어쩔 수 없지만 다른 곳은 다 정상으로 돌아왔다더구나. 아가, 다친 곳은 없고?”
“네. 전 괜찮아요.”
“아무스와 함께 돌아오느라 고생 많았겠구나. 우리 딸. 정말 고생 많았어, 장하다.”
내가 과거를 바꾸기 위해 공간의 틈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고생했는지 아빠가 알 리 없는데도 마치 꼭 알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일렁거려 공작님을 더 꼬옥 껴안았다.
한참 동안 나를 다독여 준 공작님은 아무스에게도 다가가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었다.
“고생 많았소.”
“디에르고. 이제 솔레아는 내 거다.”
“……그건, 좀, 차근차근, 얘기해 보지. 고맙지만, 물론…… 자네에게 고마운 게 많지만…… 알다시피 지윤이는 이제 갓 한 살을 지났으니까.”
“아직도 그 말씀을 하세요.”
공작님의 오른쪽 얼굴을 가로지른 커다란 상처를 보면 마음이 아팠지만 애써 웃으며 말했다.
공작님 역시 밝은 얼굴로 내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너도 자식 낳아 봐라. 다 똑같지. ……아니. 낳지 마.”
웃으며 얘기하다가 갑자기 심각해지는 공작님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깔깔 웃어 버렸다.
의술사들 덕분인지 공작님은 흉터 빼곤 정말 아픈 곳 하나 없이 건강해 보이셨다.
“저 기다리느라 정원에 나와 계셨어요?”
“그래, 이제 들어가자. 황녀 전하를 혼자 계시게 할 수도 없고, 정원에 서 계시게 할 수도 없어서 네 오빠들한테 맡겨 뒀단다.”
“……그래도 돼요? 전엔 전하랑 오빠들을 붙여 두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요.”
“전하가 설마 진짜로 우리 애들한테 청혼을 하시겠니.”
공작님은 눈을 접어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고개를 돌려 아무스에게도 함께 들어가자고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공작님, 아무스와 함께 셋이서 나란히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황궁의 깃발을 단 커다란 마차와 근위대가 줄지어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무, 무슨 일이에요? 아빠.”
“글쎄다.”
마차에서 화려한 금발의 중년 남자가 내리자 내 옆의 공작님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
폐하면 황제 폐하요? 그분이 우리 집엔 왜 오셨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