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아! 새카맣게 잊고 있었네. 만년필이 있었지!”
어느새 마물에게 물린 곳의 상처가 다 아물어 있었다.
그리고 아무스의 힘에 마물의 힘까지 합쳐져서 아무스의 마력만 가지고 있을 때와는 다른 기운이 몸 안에서 느껴졌다.
어쩐지. 전에 아무스한테 이 일기장을 보여 줘도 제대로 못 읽더라니.
이 일기장에 마물의 힘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읽을 수 없었던 거구나.
마물이 글자들을 날려 보낸 덕분인지 내 눈엔 일기장 안이 백지 상태로 보였다.
나는 마물이 들고 온 만년필과 일기장을 손에 쥔 채 마력을 불어넣어 보이지 않는 힘으로 묶어 두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 온 내가 일기장을 펼치고 가장 먼저 읽었던 내용들을 적어 내려갔다.
오직 ‘나’만 읽을 수 있게.
회사로 들어가는 문을 연 줄 알았더니, 차원의 문이었나 보다. 왜 이런 판타지 세상으로 온 거지. 내 17억은 어떡하냐고.
집에 보내 주세요. 토끼 같은 17억이 저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요.
아니, 근데 저 회색 동태눈깔은 풀 네임이 그래 이 새끼야인가? 싹수가 웜톤이네. 나한테 원수졌나. 귀여운 척은 또 왜 해. 얼굴 좀만 덜 생겼어도 싸웠다.
분홍 머리는 왜 또 쎄하게 굴지.
쎄 이즈 사이언스라는 한국 고유의 정서가 아직 내게 남아 있는데. 얼굴값 하는 건가.
됐다. 이제 서재로 가서 책장에 꽂아 두기만 하면 된다.
아무스의 마력과 마물의 마력이 짬뽕됐으니까 정령들이 일기의 내용을 완벽하게 읽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갔다.
만년필을 일기장 사이에 넣어 두고 마물들과 함께 다시 서재로 가 책장에 일기장을 꽂아 뒀다.
그러곤 다시 공간의 틈으로 돌아와 조용히 지켜봤다. 잠시 후 솔레아가 서재로 들어와 일기장을 발견했다.
놀란 눈으로 책장을 넘겨 보던 솔레아는 만년필을 발견하곤 잠시 고민하더니 펜을 종이에 가져다 대기 시작했다.
“이제 알 수 없는 힘이 만년필이 종이에 닿지 못하도록 가로막겠지.”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과거의 솔레아가 쥐고 있는 만년필은 점점 더 종이와 가까워져 갔다.
“얘들아! 어떻게 된 거야! 내 마력이 저 정도 힘은 없는 거야? 저거 닿으면 안 되는데!”
내게 힘을 불어넣어 준 마물과 다른 마물들에게까지 닦달해 봤지만 그들은 귀여운 얼굴로 끙? 하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결국 나는 서재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혹시나 솔레아에게 보일까 봐 마력으로 기척과 목소리를 지우고 그녀와 함께 만년필을 잡았다.
다행히 내 손의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과거의 나는 갑자기 생긴 저항을 느끼고는 눈썹을 잠깐 찡그리더니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으으, 아……. 좀, 제발……!”
“힘주지 마! 과거의 나 년아! 제발!”
다행히 운동하기 전의 나는 지금보다 약했다. 곧 과거의 내가 분을 참지 못하고 욕을 하며 펜을 집어 던졌다.
“썅!”
“아이고, 다행이다. 그레이 고맙습니다. 운동할 때마다 개수 세 준 돈도 고맙습니다. 피구와 유산소 운동 등 같이 해 준 기사 여러분들께도 이 영광을 돌립니다. 여러분들이 키워 준 근력이 세상을 바꿨습니다.”
그 이후로도 과거의 내가 일기장에 글씨를 쓰려고 할 때마다 방해했다.
과거의 나는 어지간히 집에 가고 싶었는지 걸핏하면 팔 굽혀 펴기를 하며 근력을 키워 댔고, 나도 그 옆에서 같이 팔 굽혀 펴기를 했다.
“으랴아아앗! 내 17억! 집에 좀 가자!”
“으랴아아앗! 내 가족! 네 집은 여기다, 이년아!”
어제의 나는 절대 오늘의 나를 이길 수 없지. 덤벼라 이거야.
과거의 나와 힘겨루기를 하며 매일매일 일기장에 그날 있었던 일을 써 나갔다.
다음 날 아침 내가 일기장 속 내용을 보며 욕을 할 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젠장! 렘샤 부인!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건데요!”
헤이먼이 발가락에 펜을 꽂고 일기장에 들이댈 때는 그냥 그 사이에 엎드려 누워 버렸다.
도저히 헤이먼이 발로 내리 누르는 힘을 두 손으로 밀어 낼 수가 없었다.
“이, 이게 왜 이러지.”
“아악! 헤이먼! 그만 밟아! 내 등 터져! 장기 터진다고! 오빠 새끼야!”
가끔 일기를 쓰기 싫은 날은 대충 쓰기도 했다.
오늘 날씨가 좋았다. 내일도 좋았으면.
그레이랑 싸웠다. 대신 공작님께 꼰질러서 걔만 혼났다.
과거의 나를 보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날이 서 있고, 날카롭고, 장난기는 있지만 신경질적이었던 내가 그레이의 장난에 조금씩 풀어졌다.
헤이먼이 툭툭 던지는 걱정에 웃으며 대꾸하는 날이 늘어 갔다.
티온과 연무장에서 함께 엉엉 울면서 서로를 가족이라 말하며 껴안았다.
공작님을 걱정하고, 아빠라고 부르고, 그레이와 함께 시장에 가서 구경도 하고…… 썅!
또 까먹을 뻔했네.
감상에 젖어 텔레비전을 보듯 과거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더 먼 과거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갔다.
마물들은 이유도 모른 채 일단 내가 뛰니까 같이 뛰기 시작했다.
“컹! 컹!”
“아옭!”
“왜야으와아옹!”
“얘들아. 종이 어디 있어, 종이! 종이 물어 와! 아무스 이름 적어야 돼!”
말을 알아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물들은 사방팔방으로 뛰쳐나갔다.
“위험한 곳은 가지 말고! 그래도 종이 같은 거 보이면 일단 가져와 봐! 세 장, 아니다! 두 장만!”
한 번은 일기장에 적혀 있었으니까 종이는 두 장만 있으면 된다.
첫 번째는 낡은 지도 귀퉁이였는데. 그건 어디에서 구해야 되지?
그때 고양잇과 마물이 크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야아아아앍!”
마물의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가 보니 어두컴컴한 공간이 있었다.
혼자 아래로 떨어진 마물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꼬리를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털에서 황금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며 주변을 밝혔다.
화려한 금색 찻잔들과 오래된 왕관,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보석들과 여러 개의 초상화…….
“설마.”
고양잇과 마물은 왕관을 쓰고 의자에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는 여자의 초상화에 마킹을 하려는지 엉덩이를 갖다 댔다.
“안 돼! 거기 황궁 보물 창고 같단 말이야! 안 돼! 거긴 안 돼! 돌아와!”
언젠가 랏샤가 황궁 지하실 창고에 온갖 보물들이 쌓여 있으며 벽에는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고양잇과 마물은 내 목소리에 놀란 건지 마킹을 하지 않고 공간의 틈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이리 와, 응? 착하지.”
점프하려는 건지 마물은 엉덩이를 뒤를 쭉 뺀 채 꿈실꿈실 움직이다가 이내 펄쩍 뛰어올랐다.
“옳지!”
다시 공간의 틈으로 들어온 마물을 안아 들었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마물의 손톱에 뭔가가 걸려 있었다. 돌돌 말린 채 창고 벽에 세워져 있던 지도의 귀퉁이 조각이었다.
세상에. 이런 식으로 얻게 된 거라니.
“우리 야옹이가 결국 국보를 찢어 먹었구나.”
일단 급하니 아무스의 이름을 적고 무기 상점 할머니가 있는 과거로 달려갔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할머니의 손에 지도를 쥐여 주고 귓가에 속삭였다.
“할머니. 나 보여요? 나중에 우리 오빠랑 나랑 여기 오면 이거 줘요. 알았죠? 그리고 저 벽에 걸린 검도! 대장장이가 ‘용의 비늘로 만든 검’이라고 말했을 텐데. 기억나죠?”
“으응…….”
“저 검은 우리 오빠한테! 시뻘건 빛의 갈색 머리카락 남자! 잘생긴 남자한테 주면 된다고요! 할머니 내 말 들려요? 그리고 이 종이는 나한테! 듣고 계시죠? 주무시는 거 아니죠?”
“잉…….”
슬쩍 눈을 뜬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잠이 들었다.
무기 상점 할머니는 그레이와 내가 찾아오자 그레이에게 검을 주며 동생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말했고, 상점을 나서는 내 손에는 아무스의 이름이 적힌 지도를 쥐여 주었다.
고마워요. 할머니! 듣고 계셨군요!
두 손을 모아 할머니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공작님이 이달론에게 조종당할 때 일기장에 아무스의 이름을 적었다.
‘곧 갈게, 아무스.’
그러자 아무스가 나타나 공작님에게 끌려 나가기 일보 직전의 나를 구했다.
그땐 저 말이 아무스가 내게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가 아무스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어. 나 곧 갈게, 아무스.
마지막으로 이달론에게 종이를 줘야 하는데 그 새끼한텐 곱게 주기가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한국어로 쌍욕을 적었다.
‘시발 놈아.’
과거의 이달론은 종이를 발견하고 한참 고민했다.
“설마 이게 용의 이름인가!”
아니다, 시발 놈아.
과거의 나를 잡아 와 가둬 둔 채 환상을 보여 주던 이달론은 내게 계속 그 종이의 글자를 읽어 보라 했다.
그걸 지켜보는 시간이 너무 괴로웠지만 언젠가 끝이 날 거라 생각하니 참을 수 있었다.
이달론이 그 종이를 마지막으로 들이밀 때 나는 비소를 머금은 채 과거의 내게 끊임없이, 뇌에 주입하듯 말했다.
“아무스. 아무스야, 아무스. 아무스라고 읽으면 돼. 아무스. 아무스. 아무스. 아무스. 리슨 앤 리핏. 아무스.”
솔레아는 멍한 눈으로 내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아무스.”
이게 바로 K-주입식 교육이다.
아무스와 약속한 세 번의 이름을 모두 불렀다. 이후로는 천천히 과거를 되밟아 갔다.
아무스가 죽기 직전의 과거에선 내가 이미 바꿔 놓은 대로 마물들이 이달론을 물어뜯는 게 보였지만 혹시 몰라(사실 이달론 죽는 거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마물들을 이용해 이달론을 한 번 더 죽였다.
“물어!”
“크롸아아앙!”
“잘한다! 내 새끼들! 잘한다!”
박수를 짝짝 치며 이달론의 영혼이 다신 태어나지 못하도록 소멸되는 걸 지켜봤다.
이제 끝났는데?
……어떻게 나가야 하지?
허연 안개로 가득 찬 것처럼 뿌옇기만 한 미래를 앞에 두고 망설이고 있던 찰나, 뒤에서 마물들이 등을 떠밀었다.
“악!”
순식간에 끌려가듯 몸이 빠져나갔다.
“뭐야!”
익숙한 괴성에 감고 있던 눈을 떠 보니 공작저였다. 그것도 내 방 안이었다.
소리를 지른 사람은 그레이인 듯, 눈앞의 오빠 셋이 놀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뭐야?!”
“티온! 헤이먼! 그레이!”
주저앉아 있던 나는 용수철 튕기듯 벌떡 일어서서 셋을 끌어안았다.
“왜, 왜 이래?”
“나 돌아왔어? 돌아온 거야? 진짜 왔어? 나 보이는 거야? 티온! 고생했어. 너무 힘들었지. 아무튼 보고 싶었어, 티온!”
“응! 막내야!”
티온은 아직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는 듯했지만 어쨌든 나를 두 손으로 번쩍 안아 들었다.
티온에게 들려서 빙글빙글 돌며 헤이먼에게 손을 뻗었다.
“헤이먼! 헤이먼! 헤이먼, 우리 분홍이! 너무 고생 많았어! 그래도 나 진짜 노력했어! 살아 있어 줘서 고맙고, 헤이먼 앞으로도 쭉 같이 사는 거야!”
“……어? 어, 고마워. 응. 당연하지.”
나는 티온에게 내려 달라는 신호를 보낸 후 헤이먼을 한 번 끌어안아 주고는 그레이에게도 안겼다.
“그래. 이제 내 차례지.”
“그레이. ……너 어릴 때 빵 안 훔친 거 알아.”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
“얘기가 길어. 근데 있잖아. 오빠들 다 너무 보고 싶었어.”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핑 돌기 시작하는데 티온이 나와 그레이, 헤이먼을 두 팔로 잡고 제 뒤로 숨겨 버렸다.
배구를 해도 될 정도로 넓었던 내 방 안이 어느새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마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얘네 나 따라왔구나.
“낑!”
“아오옭.”
“애옹!”
“멍!”
마물들을 본 티온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전쟁터에서 오랜 시간 마물들과 싸웠으니 충분히 그럴 법했다.
“위험해. 내 뒤로 숨어!”
“티온! 하지 마!”
티온이 검집에서 검을 꺼내 들려는 순간, 마물들이 꼬리를 흔들며 티온에게 달려들었다.
전쟁터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던 만큼, 본인을 향한 적대심을 알아채는 본능도 강한 건지 티온은 검을 꺼내지 않고 제게 달려드는 마물들을 얼떨결에 두 팔로 안아 버렸다.
“……어, 어?”
“컹! 컹! 끼잉, 낑!!”
마치 왜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는 거냐고 칭얼대는 대형견 같은 모습이었다.
티온의 품에 쏘옥 안겨 있던 마물들은 흥을 주체 못 하고 방 안을 뛰어다니다가 침대에 걸려 있던 긴 밧줄을 물고 다시 티온의 앞으로 뛰어갔다.
“왜, 왜 이러는……. 막내야. 얘네 왜 이래?”
“오빠 네가 마물들한테 자유를 찾아 줬거든. 그래서 고마운가 봐.”
“그게 무슨 말이야? 자유라니……. 난 분명 전쟁터에서 얘들을…….”
“얘기하자면 길어. 엄청 길어.”
티온과의 대화 도중에 헤이먼이 끼어들었다.
“너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다친 곳은 없어? 방금 사라진 애가 왜 다시 나타난 거야?”
“……방금 사라졌다고?”
시간의 흐름을 정확하게 느낄 순 없었지만 분명히 내 인생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럼,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단 거야?”
가슴이 철렁하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허공에서 수없이 많은 양의 맑은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우리 왔어!”
“우리 다시 왔어!”
“임시 주인!”
“우리 왔어!”
“돌아왔어!”
“우리 분홍이!”
“아가 불곰!”
“꼬마 호랑이! 처형!”
“아무튼 우리 살아났어!”
정령들이었다.
내가 과거를 바꾼 거야.
나는 방을 박차고 나갔다.
뒤에서 그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어디 가!”
“아무스 데리러!”
“어디 있는 줄은 알아?!”
“알아! 걱정하지 마!”
언덕.
네가 나를 기다리던, 우리의 재회의 언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