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대부분의 장면들이 뿌예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것에 반해 ‘솔레아’의 인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들의 미래는 비교적 선명하게 보였다.
그래 봤자 시력 마이너스인 사람이 안경을 쓰지 않았을 때처럼 보이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앤의 미래를 찾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새카만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여자가 그랜트 서점에 들어가더니 사장과 두 손으로 하이 파이브를 한 후, 사장의 아내와도 포옹을 하고는 엉덩이 하이 파이브를 하는 걸 봤기 때문이다.
「낙인」을 찾기 위해 그랜트 서점에 방문했을 때, 사장과 저렇게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은 앤밖에 없었지.
적어도 10년은 훌쩍 지난 것처럼 보였지만 앤의 목소리는 여전히 밝았다.
“사장님! 오늘도 재밌는 거 들어왔어요?”
“그럼. 당연하지. 네가 좋아할 만한 게 가득 들어왔어. 이리 따라 들어와라.”
앤으로 추정되는 성숙한 여자가 스파이처럼 사장의 귓가에 은밀히 속삭였다.
“……전에 그건 아직 못 찾으셨나요?”
“뭐? 아, 그 레미 부인 말이냐?”
“레미 아니고 렘샤 부인이요! 우리 아가씨가 읽으시는 걸 분명 봤는데 왜 실물을 구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아니, 앤. 그런 책은 정말로 없다니까? 내가 모르는 책이 제르노아에서 출간, 번역 됐을 리가 없잖니. 우리 서점은 제르노아에서 제일 오래된 서점이고, 이젠 제일 큰 서점도 됐는데!”
그랜트 사장님. 멀지 않은 미래에서 대성공을 하셨군요. 제르노아에서 제일 큰 서점의 주인이 되셨다니, 축하드려요.
앤은 렘샤 부인 시리즈가 없다는 그랜트 사장의 말에 실망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없다니 어쩔 수 없죠. 여자 남자 에셈플 소설은 흔치 않아서 궁금했는데. 아니, 근데 진짜 분명히 아가씨가 읽으시는 걸 봤는데.”
“아니, 근데 진짜 분명히 없다니까. 그러니까 다른 추천 소설들을 구경하고 가렴.”
“넹…….”
조금 처져 있던 앤은 그랜트 사장이 다양한 책을 추천해 주자 금방 활기를 되찾았다. 잠시 후 앤은 책을 한 아름 사 들고 서점을 나섰다.
“렘샤 부인은 왜 없지? 절판된 책인가? 그렇다고 해도 사장님이 모를 리가 없는데. 하…… 레전드란 레전드는 다 찾아 읽고, 새로 나온 신작도 다 읽은 내가 여태 못 읽은 야설이 있다니. 자존심 상하네.”
그게 자존심이 상할 일인가?
어쨌든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앤의 저 들끓는 호기심을 자극시키기만 하면 될 테니까.
그날 밤, 잠든 앤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티온의 친부에게 썼던 것과 같은 작전을 쓸 예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귓속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앤의 귓가에 갖다 댄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뭐라고 해야 돼?
‘렘샤 부인이 읽고 싶어.’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런 마음이라면 이미 앤에게 차고 넘치니까.
어떡하지.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그럴싸하게 말을 지어서 속삭였다.
그레이와 정령들이 내 옆에서 읽은 내용대로라면, 등장인물은 렘샤 부인과 기사 에라스토, 그리고 그의 형이었다.
“……렘, 렘샤 부인이 에라스토의 바지를 벗겼다.”
감겨 있는 앤의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음, 쩝, 쩝. 뭐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부, 부족했나.
심기일전해서 다시 속삭였다.
“에라스토와 뜨겁고, 정열적으로 사랑을 나눴다.”
“하으암, 15세 안 먹어요.”
먹어라, 이 자식아.
“렘샤 부인의 입술이 에라스토의 몸 곳곳으로 향했다.”
“으음……. 곳곳 어디…….”
이거 안 자는 거 아니야?
꿀밤이라도 한 대 먹이고 싶었지만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겨우 참았다.
너는 왜 예전이나 지금이나 말을 한 번에 들어주질 않니.
묘사를 하고 싶어도 도무지 생각나질 않았다. 렘샤 부인 시리즈나 다른 19금 로맨스 소설을 읽어 본 적이라도 있으면 기억해 내서 말할 텐데 먹고살기 바빠 그런 걸 읽어 볼 시간조차 없었다.
윤지윤일 때도, 솔레아일 때도.
심지어 산일 때도.
젠장. 이 한결같은 인생들아.
머리를 감싸 쥐고 앤의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정령들아, 내게 힘을 줘.
렘샤 부인. 당신이 정말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이제 그냥 나타나 주세요.
“렘샤 부인, 제발. 제발.”
신도 아닌 렘샤 부인에게 두 손을 모아 간절히 빌기를 몇 분, 갑자기 앤이 잠꼬대를 하기 시작했다.
“렘샤 부인, 제발 나가게 해 주세요? ……밀실, 회초리, 체벌…….”
“어? 어어. 응. 그거야. 어, 밀실이야. 밀실에 갇혀 있어.”
“지하인가…….”
“응, 지하실이야.”
“히히.”
렘샤, 렘샤 떠들어 댔더니 아무래도 렘샤 부인이 나오는 꿈을 제멋대로 꾸고 있는 중인 듯했다.
앤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빌어.”
너는 진짜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 가만 안 둔다. 이를 악문 채 앤의 귀에 대고 대사인 척 중얼거렸다.
“살려 주세요, 나가게 해 주세요.”
앤이 눈살을 찌푸렸다.
“……잉? 재미없어. 너무 비굴한 놈은 꺾는 맛이 없는데.”
이 새끼 진짜 안 자는 거 같은데. 지가 빌라고 해 놓고 비니까 왜 재미가 없대. 대체 얼마나 하드한 걸 본 거야?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했다.
“……당신이 빌라고 해서 내가 빌 것 같아?”
앤이 천천히 입맛을 다셨다.
너, 너 왜 입맛을 다시고 그래? 괜히 해고하고 싶게.
달콤한 꿈을 꾸는지 앤은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가도 되나? 창작욕을 불러일으켰나?
그때, 어느새 마물 한 마리가 따라 들어왔는지 내 옆에서 낑! 하고 울었다.
조용히 하라고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댄 순간 앤이 쓸데없이 영감을 받았는지 주둥이를 열었다.
“……그래. 울부짖는 건 이제 지겹네. ……짖어 봐. 내 밑에서.”
세상에. 너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거니.
“어우씨. 야 나 더는 못 하겠다. 알아서 해라.”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커다란 마물을 두 팔로 안아 들고 냉큼 도망 나왔다. 내가 먼저 그 시간대로 들어가 있었기 때문인지 다행히 마물을 데리고 함께 빠져나오는 게 가능했다.
공간의 틈 사이로 돌아가서 마물의 앞발을 잡고 곱게 타일렀다.
“다른 곳은 다 가도 절대 저기로는 떨어지면 안 돼. 알았어? 저 사람 위험해. 다른 의미로 위험하니까. 네가 낑낑대는 소리를 듣고도 다른 걸 상상하는 사람이란 말이야. 저긴 절대로 안 돼. 알아들었어?”
마물은 내 속도 모르고 꼬리를 흔들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 이후로는 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조용히 지켜봤다.
아무래도 미래의 앤은 지금보다 훨씬 그쪽 방면으로 대단해진 것 같아서 선뜻 다가가기가 두려웠다.
잠에서 깬 앤은 간밤의 꿈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꽤나 행복해 보였다.
혹시나 꿈으로만 만족할까 봐 걱정됐는데 앤은 재빠르게 씻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무기 상점으로 향했다.
“잠깐만 왜 무기 상점으로 가? 자료 조사를 하든가! 종이랑 펜을 사러 가야지!”
설마 외간 남자를 잡아다가 꿈을 현실로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범죄야. 앤! 그건 범죄라고!
앤의 꿈속에 이상한 욕망을 집어넣고 나온 것 같아서 죄책감이 일었다.
앤은 무기 상점에서 각종 구속 도구와 체벌 도구를 구매하고 나왔다.
그러고는 아주 빠른 발걸음으로 마을 외곽으로 향했다.
길거리가 흐릿하게 보여 정확히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더 기다렸다가는 죄 없는 희생자가 나올 것 같았다. 아니, 저 정도로 망설임 없는 발걸음이라면 이미 한 명 잡아서 어딘가에 가둬 놓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다시 세계 안으로 뛰어들려는 찰나, 앤이 어딘가의 문을 열고 들어가며 외쳤다.
“작가님! 차기작은 역에셈플 어떠세요!”
작가님?
세계 안으로 거의 뛰어들기 일보 직전이었던 나는 중심을 잃고 미끄러지며 털썩 주저앉았다.
등줄기로 식은땀 한 줄기가 주륵 흘러내렸다.
앤은 넉살 좋게 웃으며 누군가가 앉아 있는 책상 앞에 마주 앉았다.
“낙인 이후로 다른 로맨스도 많이 쓰셨잖아요. 근데 저번에 저랑 술 마실 때 성인 로맨스도 써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
상대방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지만 앤의 말을 들어 보니 ‘낙인’을 쓴 작가인 듯했다.
앤이 미래에 그 작가랑 친해지는구나. 하긴, 내 상단에서 직접 후원하는 작가니까 앤과 안면을 틀 법도 하지.
“제가 작품을 구상하시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여러 가지 사 왔어요. 제가 어제 엄청난 꿈을 꿨는데 작가님이 그런 느낌으로 글을 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혐관, 집착, 증오 그런 거에 성인 로맨스 백 개 추가요.”
작가는 입을 크게 벌려 웃고는 앤의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 사람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인물 이름도 있는데 들어 보실래요? 일단 여주는 렘샤 부인이고요. 남자는 에라스토라고…….”
앤은 작가와 마주 보고 앉아서 한참 동안 간밤의 꿈에 대해 얘기했다.
작가는 앤이 가고 난 이후 영감이 떠오른 듯 창작열을 불태우며 줄거리를 정리하곤 곧바로 집필을 시작했다.
더 먼 미래로 가 보니 정말로 진한 암적색 표지의 ‘렘샤 부인의 은밀한 사정’이 출판되어 있었다.
나는 서점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 중에서 한 권을 슬쩍해 왔다.
앤이 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하긴 그럴 수도 있지. 어쨌든 구했으니 다행이었다.
이쪽 세계에서 깨어난 내가 서재로 들어가던 과거로 향해 몰래 책장에 책을 끼워 뒀다.
……가 얼른 빼내고 다시 공간의 틈으로 돌아왔다.
이걸 그냥 끼워 두면 안 되잖아!
그럼 그냥 야설 발견한 솔레아밖에 안 되는 건데.
“내용을 완전히 지울 순 없는데. 다른 사람들의 눈엔 이 내용이 그대로 보여야 하니까. 하, 어떡하지. ……아! 마력만 있었어도!”
아쉬움에 소리를 빽 지른 순간 손에서 마력이 약간 새어 나왔다.
아무스의 힘이었다.
“어?”
아무스가 조금씩 회복하고 있는 게 내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마물들은 갑자기 꼬리를 바짝 세우고 으르렁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내게서 마력이 감지되자 두려움을 느낀 것 같았다.
“얘들아, 괜찮아. 공격하지 않아. 난 너희 아프게 안 해.”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두 손을 펼쳐 마물들에게 보여 줬다.
그러자 마물들이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래도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기는 힘들었는지 한참 동안 내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다 그중 가장 먼저 생겨난 마물이 책 위에 발을 올리고 크게 울부짖었다.
그 순간 책 속에 있던 글자들이 표지 바깥으로 빠져나오더니 깃털처럼 천천히 날아가기 시작했다.
“……어?”
깜짝 놀란 내가 글자를 붙잡으려 움직이자 근처에 있던 마물들이 이빨을 세워 나를 깨물었다.
제 딴엔 놀랐다는 의미로 살짝 깨문 경고성 행동이었겠지만 역시 마물은 마물이었는지 송곳니에 찔린 살갗에서 피가 살짝 흘러나왔다.
그런데 마물에게 물린 상처 사이로 아무스의 마력도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야…….”
내가 팔을 붙잡고 인상을 찡그리자 나를 깨문 마물들 중 한 마리가 당황하며 상처를 핥아 주었다.
그러자 아무스의 마력에 마물의 힘이 섞였고, 그 기묘한 기운이 다시 내게로 스며들었다.
피를 흘리며 앉아 있는 내가 걱정됐는지 마물들이 과거의 곳곳으로 쏙쏙 들어가 버렸다.
“너희 어디 가는 거야! 내가 위험하니까 과거로 들어가지 말랬잖아.”
만류하는 내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과거로 향한 마물들은 제각각 무언가를 입에 물고 돌아왔다.
신발, 진짜 낚싯대, 강아지풀, 공, 밧줄, 나뭇가지, 낙엽 등등.
내가 아파하니까 지들이 좋아하는 걸 들고 와서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중엔 만년필도 있었다.
아주 낡고, 익숙한 생김새의 만년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