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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152/192)

152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미래로 가는 것이 가능한지조차 몰랐지만 이대로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었다.

혹시 몰라 과거의 순간들을 뒤지며 ‘렘샤 부인의 은밀한 사정’이라는 책이 있는지 찾았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역시 렘샤 부인은 이쪽 세계엔 없는 거야.”

혹시나,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가 원래 있던 한국으로 들어가서 또 찾았다.

초콜릿페이지에도 없었고, (그래도 15세 소설 중엔 비슷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파란 책장에도 없었다. (너도 없는 거니.)

마술램프에도, 그래24에도, 하나스토어 북스에도, 스프링툰 소설란에도 없었다.

정식 출간된 게 아닌 건가 해서 ‘행복해라’라는 웹소설 무료 연재 플랫폼에서도 찾아봤지만 렘샤 부인의 렘 자도 찾지 못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젠 정말 미래뿐이야.”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공간의 틈 사이로 돌아왔다.

내가 돌아가자 마물들이 집으로 돌아온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내게 달려왔다.

“옳지. 아유, 착해. 아이고, 예뻐. 어, 그래. 침 그만 발라라. 아이고, 얘들아. 혓바닥이 왕 크니까 왕 까끌거리는구나.”

마물들을 한 마리씩 모두 쓰다듬어 준 뒤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너희가 단순히 힘이 센 짐승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너흰 분명히 멋진 사명을 지니고 세상에 태어난 애들일 거야. 그렇지?”

“컹!”

“현재로 가자. 그 너머에 미래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마물들과 함께 시간 사이를 뛰어 가장 가까운 현재로 향했다.

“가자, 얘들아!”

조금씩 끝을 향해 간다는 생각에 그 어느 때보다 생동감 있고 활기차게 마물들을 끌고 힘차게 달려 나갔다.

아무스가 이달론을 끌고 들어갔던 검은 공간이 보일 무렵, 또 부딪쳤다. 투명한 벽 같은 게 세워져 있는 것 같았다.

“악!”

염병할 데자뷰.

코피가 다시 터졌다.

“낑!”

“아옭?”

“왜야아아오옥!”

“컹!”

“크르르릉.”

마물들이 내 피 냄새를 맡았는지 걱정하며 온갖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오던 피도 도망갈 지경이었다.

“괜찮아. 나 진짜 괜찮아. 근데 왜 여기가 막혀 있는 거지? 아직 아무스의 최근 기억까지 가지도 않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막힐 타이밍이 아닌데.

내가 고치지 않은 과거가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안 고친 과거가 멀까.”

웬만한 건 다 고쳤다.

산을 살렸고, 죽으려는 아무스를 막았다. 납치당한 황녀를 구했고, 티온이 노예가 되는 것도 막았다. 헤이먼의 마력이 바닥나지 않도록 조절도 했는데.

내가 바닥에 주저앉아 고민하기 시작하자 마물들이 놀아 달라며 걸레짝이 된 내 신발을 물고 왔다.

“아니야. 얘들아. 지금 놀 때가 아니야.”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마물이 커다란 머리를 갸웃하더니 내 앞에 신발을 내려놓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아주 먼 곳까지 갔는지 신난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너무 멀리 가지 마! 그러다 또 빠지면 어떡하려고! 난 정해진 과거는 못 바꾼단 말이야! 빠지지 말고 돌아와!”

걱정되는 마음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서서 마물이 뛰어간 방향을 향해 달렸다.

한참을 달려가자 뭔가 기다란 뼈처럼 보이는 걸 입에 물고 있는 마물이 보였다.

“지지! 아무거나 입에 물면 안 돼! 뱉어! 뼈 삼키면 아야 해요!”

강아지를 산책시키다가 누군가 공원에 버리고 간 치킨 뼈를 입에 문 강아지 때문에 놀란 견주처럼 마물에게 뱉으라 소리쳤다.

혹시라도 삼켰다가 다칠까 싶어서 뱉게 하려고 했는데 가까이 가 보니 그냥 뼈치고는 굉장히 컸다.

자세히 살펴보자 마물이 입에 물고 있는 건 아무스의 발톱이었다.

스스로 역린을 찌르려는 아무스에게서 내가 직접 뺏어서 던진 발톱이었다.

“……이걸 어디서 찾았어? 아니 이걸 네가 들고 오면 어떡해? 이거, 이거……. 아니 근데 아무리 그래도 남의 발톱은 좀 그렇지 않니? 지지야, 지지. 뱉어. 에베베. 뱉자. 아이고, 착하다. 퉤.”

마물은 나를 보며 꼬리를 세차게 흔들더니 술래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망쳤다.

붙잡으려는 내 손을 피해 날래게 뛰어다니던 마물은 어떤 과거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게 어떤 건 줄 알고 입에 물고 있는 거야!”

마물을 따라 뛰어 들어간 곳은 매캐한 연기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대장간이었다.

마물은 나를 피해 도망 다니다가 두건을 쓴 대장장이 앞에 발톱을 내려놓았다.

“으아아악!”

팔뚝이 내 허벅지만 한 대장장이가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다가 마물과 나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대, 대체…… 어디, 어디서 나타나셨어요?”

“나랑 얘가 보여요?”

내 말을 들은 대장장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털썩 소리가 나도록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위대하고 고결하신 시, 시, 시, 신이시여!”

“아닌데. 아닙니다. 아니에요.”

“어찌 미, 미, 미천한 인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었사옵니까!”

“아닙니다!”

“신의 사자께서 들고 온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대장장이가 목이 터져라 외친 탓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 사람에게 내가 보인다는 것 자체가 이 과거 또한 바꿔야 하는 과거라는 뜻이니까.

이 여자의 로망을 깨트릴 수가 없어서 쪽팔림을 무릅쓰고 최대한 중후한 톤으로 말했다.

“……요, 용의 신체의 일부니라.”

그레이가 들고 다니던 아무스의 검도 이 사람이 만든 거였구나.

아니, 근데 분명히 아무스가 ‘비늘로 만든 검’이라고 했는데 왜 발톱을 주는 거지?

궁금해서 대장장이를 계속 지켜봤더니 알 수 있었다.

대장장이는 아무스의 발톱을 가보로 대대손손 물려주고 있었다.

아니…… 검을 만들어 달라고요.

결국 아무스가 긁어낸 비늘을 주워서 다시 대장장이에게 가져다주었다.

대장장이는 다시 나타난 나를 보고 반색하며 무릎을 꿇었다.

“오, 신이시여! 어찌 또 귀한 발걸음을 하셨나이까!”

“용의 비늘이다. 잘 연마하여 반드시, 꼭! 검으로 만드시, 만들거라. 그, 그럼 이만.”

마물이 꼬리를 흔들며 대장간에서 더 놀자고 하는 걸 겨우 어르고 달래서 다시 공간의 틈 사이로 돌아왔다.

이게 정답인 듯했다.

그래도 마물 덕분에 미처 바꾸지 못한 과거도 바꿨으니 다행이었다.

다시 아무스와 이달론이 싸우는 가장 최근의 과거로 향해 가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저 검을 만들라고 명령한 게 나라면, 어쩌면…….

나는 공간 사이에서 그 할머니를 찾기 위해 한참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베르고의 수많은 시민들 중에서 누가 무기 상점 할머니의 젊은 시절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결국 마물을 데리고 할머니가 살아 있던 시절로 들어가 그녀의 모습을 보여 주고 냄새를 맡게 했다.

“냄새 잘 맡아 봐. 알겠지? 우리 돌아가면 이 사람 찾는 거야. 넌 보통 강아지가 아니잖아. 강아지면 이렇게 몸에 단단하고 멋진 갑옷 같은 비늘이 있을 리가 없지. 우리 마물이 할 수 있어, 파이팅.”

내 격려를 들은 마물은 공간의 틈 사이로 돌아와서 코를 바닥에 처박고 한참을 킁킁거리며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이어지는 과거를 찾아 줬다.

나는 무기 상점 할머니의 어린 시절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확신했다.

“엄마가 어릴 때, 어떤 여행가가 검은 용의 전설이라면서 얘기해 줬대요.”

그 여행가도 나였다.

나는 작은 어린아이가 시냇가에 앉아 노는 순간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의 눈엔 내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작은 여자아이에게 검은 용의 전설을 아느냐 물은 뒤 얘기를 시작했다.

설마 내 입으로 아무스의 역린의 위치에 대해 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긴, 그의 자살을 막은 나 말고 아무스의 역린을 아는 인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너무 당연한 거였어.

“……그래서 검은 용은 아직 죽지 않았단다. 잠을 자고 있는 거지.”

아이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보다가 ‘가서 엄마랑 아빠한테도 말해 줄래요!’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가 사라진 후에 나는 다시 마물들이 기다리는 공간의 틈으로 돌아갔다.

아이에게 말했던 검은 용의 전설은 점점 부풀려졌다.

세상에 못된 검은 용이 있었다, 용을 죽이려던 용사가 직접 발톱을 뽑다가 죽었다. 용사의 시체에서 검은 용의 비늘을 찾았다더라. 비늘로 방패를 만들고 발톱으로 검을 만들었다더라.

아니야, 비늘로 검을 만들었다고 했던가. 아무튼 검은 용의 힘이 깃든 시커먼 마검이 세상에 존재한다.

어쩌구, 저쩌구.

검은 용의 전설이 알음알음 퍼지는 걸 보고 있는데 저 먼 미래에서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그쪽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마물들을 데리고 이달론의 마지막 순간을 향해 달려갔다.

아무스가 이달론과 함께 검은 공간 안으로 떨어지는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어찌나 생생한지 그때 코를 찌르던 공작님과 그레이의 피 냄새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애써 동요하지 않으려 숨을 차분하게 쉬며 시커먼 공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검은 공간 안으로 들어간 이달론과 아무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그 너머 미래의 장면이 있을 곳에 손을 갖다 댔지만 거기는 아무것도 없이 막혀 있었다.

“이 순간을 바꾸지 못하면 이 너머의 미래는 알 수 없다는 건가.”

나는 시커먼 공간 속에 발을 디디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지금이었다.

이 칠흑 같은 암흑 속 어딘가에서 지독하게 긴 시간 동안 나만을 기다려 온 내 용이 죽어 가고 있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며 내 뒤를 따라오는 마물들에게 명령했다.

“……물어.”

마물들이 일시에 앞으로 튀어 나갔다.

만약 이 방법이 틀려서 또 무수히 많은 과거 속에서 이달론의 약점을 찾아야 한대도 상관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나는 반드시 아무스를 찾을 것이다.

이번엔 같이 행복해지자고 약속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들이 컹컹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달려가니 서서히 아무스와 이달론의 윤곽이 드러났다.

아무스는 이미 이달론의 영혼을 제 손 위에 올려놓고 틀어쥐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그 마을 것이 있었다니. 인간 주제에 놀랍긴 하구나.”

다행히 내 모습도, 마물들이 짖는 소리도 둘에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만질 수는 있었다.

바꿀 수 있다. 바꿀 수 있는 과거야.

나는 이달론의 영혼의 뒤로 가서 그의 머리채를 잡아 쥐었다.

“커흑!”

이달론은 제 머리를 당기는 힘이 아무스의 것이라 생각했는지 오직 아무스만을 보고 있었다.

아무스가 이달론을 죽이기 위해 제 생명력을 모두 쓰기 전에 내가 먼저 이놈을 죽여야 했다.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며 뒤로 물러나자 마물들이 동시에 이달론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용의 앞발에 잡혀 있는 이달론의 영혼을 긁어내어 물어뜯고, 잘근잘근 씹고, 사냥감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듯 짓밟았다.

아무스의 힘이 다하기 전에 이달론을 죽였을까?

아무스는 이달론의 영혼이 흩어져 사라진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역린을 공격당했으니 죽지 않아도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선 쉴 수밖에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의 이름을 불러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다행히 내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 미래는 바뀐 거야.

확신하는 순간, 앞이 밝아졌다.

나아갈 수 있었다.

다만 내가 살아 보지 못한 시간이라 그런지 모든 것이 흐릿했다.

남은 건 단 하나뿐이다.

‘렘샤 부인의 은밀한 사정’을 집필할 사람을 찾는 것.

내가 알기로, 이 분야에 정통한 고인물은 딱 한 명뿐이었다.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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