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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화 (151/192)

151화

털이 있는 마물도 있었고, 미끈한 비늘이 있는 마물도 있었지만 어쨌든 대부분이 네 발 달린 짐승 같은 생김새였다.

마물들은 정령들과 달리 말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크르릉거리며 울거나, 어흥인지 아흥인지 모를 목 긁어 대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아주 어린 마물들은 어린 고양이처럼 앵! 아옭! 우앍! 하며 내 뒤를 쫓아다녔다.

“나 바빠! 그만 쫓아다녀!”

“아옭?”

“아니, 지금 놀아 줄 때가 아니란 말이야.”

“뺙!”

“넌 고양이같이 생겼으면서 왜 삐약거리는 거야…….”

내가 과거의 장면들이 책장처럼 빼곡히 채워진 곳을 뛰어다니자 마물들 역시 과거 사이를 마구잡이로 넘나들며 날뛰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이 단체로 우다다 하는 것처럼 보여 도무지 정신이 없었다.

말을 할 줄 아는 정령들이 유치원생 같았다면 마물들은 강아지 내지는 고양이 같았다.

손바닥만 한 마물 한 마리가 안아 달라는 듯 내 다리에 손톱을 박고 기어 올라왔다.

“아야. 잠깐만.”

결국 마물을 안아 들고 턱을 긁었다.

“그르릉― 그릉―”

“……골골송도 부르네.”

골골이가 부러웠는지 뛰어다니던 다른 마물들도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다가왔다.

꼬리를 바짝 세우고 우아하게 다가오는 마물도 있었고,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파다다다닥 흔들며 뛰어오는 마물도 있었다.

하도 놀아 달라, 만져 달라고 졸라 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마물들을 한참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마물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해소시켜 줄 수가 없었다. 난 결국 입고 있는 옷의 허리끈을 풀었다.

“너네가 진짜 고양잇과라면 이걸 싫어할 리 없지.”

끈을 이리저리 흔들자 몇몇 마물들의 시선이 끈을 따라 움직였다.

끈을 천천히 움직이다가 낚싯대를 들어 올리듯 허공으로 팍! 쳐올렸다.

“와옭!”

마물들이 펄쩍 뛰어올랐다.

손톱으로 허리끈을 움켜쥐었다가 왕발로 퍽퍽 치기도 했다.

하지만 관심이 없는 마물들도 있었다.

그들은 뛰어다니는 다른 마물들을 보며 혀를 앞으로 쭉 내밀고 헥헥거리며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었다.

“……너희는 갯과인가 보네.”

신발을 벗었다.

갯과 마물들의 귀가 쫑긋 위로 올라갔다. 나는 마물들의 눈을 마주하며 싱긋 웃었다.

그러곤 앞코를 구겨 뒤축에 끼워 넣은 뒤 신발을 멀리 던지며 소리쳤다.

“가져와!”

허리끈에 관심 없던 마물들이 일시에 앞으로 튀어 나갔다.

미친 듯이 달려 나간 마물들이 신발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신경전을 벌이며 바닥을 앞발로 긁어 댔다.

“아르르르!”

그중 가장 덩치가 큰 마물이 신발을 물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허리끈을 흔들고, 신발을 던지며 마물들과 미친 듯이 뛰어놀았다.

그런 와중에도 마물들은 계속해서 생겨났다. 도무지 놀이가 끝나질 않았다.

“아이고, 이제 그만 태어나라! 얘들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갓 태어난 마물들은 이내 나를 따라다니며 놀이에 동참했다.

그러다 허리끈이 끊어지며 끈을 입에 물고 놀던 마물들이 갈라져 있는 과거의 틈으로 떨어졌다.

“얘들아!”

아이들을 따라 들어가려던 찰나 반대쪽에서 크허엉!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시간대에서 돌아온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분명 떨어진 마물들과 똑같이 생겼는데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

사람보다 훨씬 커진 몸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마물들은 나를 발견하곤 후다닥 뛰어왔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내 정강이만큼 오던 아이들이 이젠 네 발로 서도 내 가슴팍까지 왔다.

마물들은 내 등과 가슴에 머리를 비비며 꼬리를 부르르 떨었다.

“너네 맞아? 괜찮아?”

혹시나 싶어서 아이들이 들어갔던 과거를 들여다봤다.

병사들이 보였다. 티온이 입고 있던 갑옷과 디자인이 다르고, 내가 모르는 말을 쓰는 걸 보니 제르노아가 아닌 다른 나라인 것 같았다.

병사들은 어린 마물들을 발견하고 놀라다가 저들끼리 떠들더니 마물들의 목에 줄을 채우고 주문을 걸었다.

그러자 마물들이 캑캑거리며 바닥을 굴렀다. 마물들을 길들여 전쟁에서 쓸 모양인 것 같았다.

마물들은 금세 자라나 전쟁터에서 무기로 사용됐다. 적군인 인간들을 공격하고,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런데 마물들을 공격하는 인간들 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지금보다 약간 앳된 얼굴의 티온이었다.

“티온!”

당연히 내 목소리는 닿지 않았고, 티온은 큰 검을 휘둘러 저를 죽이려 달려드는 마물의 목을 벴다.

그 순간, 마물의 목에 채워진 목걸이가 잘려 나갔다.

마물은 제 목을 구속하던 목걸이가 사라짐과 동시에 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내 곁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티온을 비롯한 그 전쟁터의 모든 군인들은 마물을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희 저런 일을 겪었던 거야? 인간한테 잡혀서?”

이 아이들이 과거 중 하나로 떨어지는 바람에 저런 일을 겪었다는 게 가슴이 아팠다.

공간의 틈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마물들은 순간과 순간 사이를 뛰어놀다가 과거의 곳곳으로 떨어졌다.

낯선 곳으로 떨어진 마물들은 두렵고 당황스러운 탓에 날카롭게 발톱을 세우고 인간들을 공격적으로 대했다.

그러자 인간들은 마력을 이용해 마물을 붙잡고, 짧은 줄로 묶어 두었다.

“마력이 있으면 마물을 길들일 수 있다는 정령들의 말은 틀린 거였어.”

마력이 강한 사람만이 마물을 붙잡아 둘 수 있으니, 길들인다고도 볼 순 있겠지만 실상은 달랐으니까.

마물들은 그저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인간과 놀고 싶어 하는 순수한 아이들이었다.

인간에게 공격당하는 과거들이 몇 번 반복되자 마물들은 다시 공간의 틈 사이로 돌아와서도 경계심을 감추지 못했다.

내 근처에 다가와서도 코를 킁킁거리며 어렸을 때 함께 놀았던 무해한 인간이 맞는지 확인하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그러다 내게 이세계 특유의 마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면 안심하고 배를 보여 주며 드러누웠다.

“……아이고, 얘들아. 이렇게 착하고 예쁜데…….”

더 이상 이 공간의 틈 사이에 머무를 수 없었다.

내가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인지 일그러진 틈 사이로 마물이 자꾸만 생겨났다. 그러면 이 비극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마물들이 나를 따른다면, 이 아이들과 함께 아무스를 찾고 내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가야지.

“우리 집엔 돈도 많고 놀아 줄 사람도 많으니까 너희 다 행복할 거야. 그레이가 백수거든. 이젠 헤이먼도 백수고. 티온도 전쟁 없으면 백수니까 너희랑 놀아 줄 수 있어.”

마물들에게 우리 가족들을 하나씩 소개했다.

“너희 저기 보여? 흉터 있는 저 사람이 티온, 저기 분홍이가 헤이먼, 저 적갈색 머리가 그레이. 저 미중년은 우리 아빠. 알겠어? 저 사람들은 공격하면 안 되는 거야.”

혹시라도 전쟁터에서 만났던 티온에게 이빨을 드러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예상외로 마물들은 티온을 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자유를 되찾아 준 사람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너희 진짜 똑똑하다!”

내 밝은 목소리를 들은 마물들은 내 품으로 파고들며 머리를 마구 비벼 댔다.

그럼 혹시, 그것도 되려나.

나는 이달론이 살아 있는 과거를 보여 주며 마물들을 훈련시켰다.

“……나쁜 놈이야.”

“으르릉.”

“물어야 돼.”

“크릉.”

“내가 ‘물어!’ 하면 무는 거야. 얘들아. 알았지?”

“뺙!”

“넌 아직 어리니까 빠져 있고.”

실험 삼아 이달론이 살아 있는 과거로 마물들과 함께 들어갔다.

내 곁에 있어서 그런지 마물들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마물들은 아무도 자기들을 공격하지 않는 상황에 얼떨떨해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초록 머리를 발견하고 이빨을 드러냈다.

“물어!”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수십 마리의 마물들이 이달론에게 뛰어가 그를 사냥하듯 영혼을 갈기갈기 물어뜯고 찢어발겼다.

그와 동시에 다시 공간의 틈으로 돌아왔다.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예상한 결과였다. 이건 훈련이었다.

“잘했어!”

보상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고 신발을 벗어 신나게 놀아 줬다.

돈은 분명, 아무스가 이달론을 죽이기 위해 생명력을 다 썼다고 했다. 그러니 그 전에 마물들을 이용해 이달론을 죽여야 했다.

그 이후로도 이달론이 살아 있는 과거로 마물들과 함께 들어가 ‘물어!’ 훈련을 반복했다.

신발 두 짝이 걸레짝이 됐고, 마물들은 이제 초록색만 보면 털을 곤두세울 정도가 됐다.

이달론. 네 마을 사람들이 나를 짐승을 사냥하듯 죽였었지. 나도 너를 그렇게 죽여 주마.

산이었던 내가 한국에서 태어난 이유는 아마도 늘 가슴속으로 빌었던 소원 때문인 것 같았다.

‘이런 곳은 이제 싫어.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어.’

흉터 하나 없이 태어났지만 산의 인생과 닮아 있었지. 근데 어떻게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온 거지?

나는 잘 훈련된 마물들을 품에 안고 어르며 윤지윤의 인생과 솔레아의 인생을 번갈아 지켜봤다.

하지만 솔레아가 열일곱이 될 때까지 공통점이라고는 도무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솔레아가 크게 앓으며 생명력인 마력이 줄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보다 못해서 그녀의 곁으로 가 손을 잡아 주었다.

솔레아가 죽어야 내가 그 몸으로 들어간다는 걸 알지만 죄책감에 보내 주기가 힘들었다.

“……조금만 더 버텨 주면 안 될까, 솔레아. 아빠도 널 정말 사랑하고, 오빠들도 네가 떠나길 원하지 않았어. 다들 널 엄청 사랑하거든.”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텐데도 솔레아는 미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솔레아는 마지막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지 못했다.

그때 마물들이 내 옷깃을 잡고 잡아당겼다.

다시 세상의 틈으로 가 윤지윤을 확인했다. 마침 로또에 당첨된 순간이었다.

회사 건물 앞에 망부석처럼 서서 눈알이 튀어나올 듯 두 눈을 크게 뜬 채 로또 종이와 휴대폰 화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 누가 봐도 로또에 당첨된 사람 얼굴이었다.

저렇게 티 나게 좋아했다니. 새삼 부끄럽네.

그때 윤지윤의 몸이 투명해지며 영혼이 순식간에 세상의 틈 사이로 새어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방금 세상을 떠나 몸이 비어 있던 솔레아에게 윤지윤의 영혼이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그 순간 산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

‘내가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면 그때 찾아갈게.’

“아. 설마.”

로또에 당첨된 게 행복해서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온 거였어? 아무스를 만나겠다는 소원이 그렇게 이뤄진 거야?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는 동안 솔레아의 몸에 들어간 내가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른 세상으로 왔다는 걸 깨닫고는 놀라 소리를 지르고, 기절을 했다.

이제 조금 뒤면 일기장을 발견하겠지.

나는 생판 남을 지켜보듯 다소 안일한 마음으로 서재에 미리 가 봤다.

“분명 여기 어디였는데.”

붉은 커버의 일기장을 발견했던 자리로 가서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일기장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렘샤 부인의 은밀한 사정’이라는 책이 있는지도 살펴봤지만 그것도 없었다.

이달론을 죽이고, 아무스를 살려 내기 위해선 내가 겪었던 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과거가 필요한데, 일기장이 없다니.

“렘샤 부인은 어디에서 찾아와야 되는 거야?”

렘샤 부인을 쓴 저자가 궁금해서 서점 주인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는데 분명 서점 주인은 모른다고 했었다.

과거에 없는 책을 대체 어디서 찾아오란 말이야. 미래로 갈 수도 없고!

……없나?

머리를 감싸 쥔 채 주저앉아 있던 나는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가면 되지. 못 가는 게 어디 있어. 막혀 있으면 뚫으면 되고. 미래 이놈 딱 기다려.

뒤져서 나오면 미래 한 장면당 한 대야. 나 우리 오빠가 매일 운동시켰다. 나 용 타고 다녀. 가만 안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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