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이끌리듯 아이의 인생을 따라갔다.
수녀는 돌봐야 할 아이들이 많아 폐수에서 건진 아이만을 살필 수 없었다.
아이는 말도 느렸다,
수녀는 폐수를 마신 탓이겠거니 하며 아이에게 따로 말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다 부득이하게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게 된 수녀는 마차 안에 아이들을 모두 태웠다.
한참을 달리던 마차는 꽤 큰 돌멩이 위를 지나며 덜컹거렸다. 마차 끄트머리에 몸을 쪼그리고 앉아 졸고 있던 아이는 휘청거리다 아래로 떨어졌다.
흙바닥을 구르는 아이에게 손을 뻗었지만 잡히지 않았다.
잠깐 멍하니 있던 아이는 입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엉덩이를 번쩍 들어 일어섰지만 마차는 이미 멀리 가 버린 후였다.
“따라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아이는 지평선 너머로 조금씩 모습을 감추는 마차를 망연히 보고만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 의연한 꼬라지에 부아가 치밀었다. 나와 닮아서, 그 쓸데없는 조숙함이 꼴 보기 싫었다.
“안 따라가고 뭐 해! 소리라도 질러! 울어서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알리라니까! 혼자 살 순 없잖아! 얼른!”
아이는 마차가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으앙,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들자 그제야 이 어두운 곳에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아이는 뒤늦게 찾아온 외로움에 당황한 듯 울었다. 나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 아이의 옆에 앉아 있었다.
굶주린 아이는 길을 따라 걷다가 땅에 떨어진 과일을 발견하면 주워서 입에 넣곤 했다.
그러다 배앓이를 하기도 하고, 흐르는 시냇물을 마시기도 하며 하염없이 울고 또 울면서 정처 없이 걸었다.
그렇게 며칠 후 한 산골 마을에 도착했다.
아이는 그곳에서 더디게 자랐다.
작은 산이라 불리는 아이의 인생이, 주변에 제 편 하나 없이 외로이 커 가는 삶이 나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아이의 인생에 관여할 수 없었다. 그저 아이가 잠들었을 때 옆에 앉아서 아무스가 내게 해 줬던 것처럼 아이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리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너는 강해. 너는 소중해. 넌 이겨 낼 수 있어. 넌 잘할 수 있어.”
십수 년 동안을 아이 곁에서 살다가 아무스를 만났다. 지금보다 훨씬 앳되고, 짜증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스! 나야, 나. 여기 있어!”
아무리 불러도 아무스는 답이 없었다.
여기는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과거가 아니구나. 그럼 내가 조금 더 기다릴게.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먼 과거 속에서 아무스의 곁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동굴 속, 그의 옆자리에 누워 돌에 홈이 파인 모양대로 흐르는 작은 물줄기를 손가락으로 훑기도 하고, 아무스가 산의 콧노래를 기억해 내 흥얼거리는 동안 나는 그의 꼬리를 베고 누워 발을 까딱거리기도 했다.
마을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마을 사람들이 산이 머물던 창고로 찾아갔다.
“저년 잡아!”
“프란! 그쪽 막으라니까!”
“소리 못 지르게 입부터 막아!”
“손으로 자꾸 긁잖아! 손을 천으로 감싸고 묶어!”
도망치는 산을 짐승 다루듯 구석으로 몬 뒤 천으로 묶기 시작하자 참을 수 없었다.
펜촉을 이용해 창고 안에 있는 이들을 모두 찔렀다.
그 순간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며 과거에서 튕겨 나왔다.
잠깐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다시 그 장면으로 돌아갔다. 산을 살리기 위해, 산이 개처럼 끌려가는 걸 막기 위해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리고 산은 내 눈앞에서 몇 번이나 끌려갔고, 죽었다.
산에게 찾아왔던 폐수 속에서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는데. 이번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산은 자꾸만 불구덩이 속으로 돌아갔다.
화염 속에서 비명을 지르던 산은 마지막 순간에 띄엄띄엄 끊어지는 목소리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다음에, 다시, 만나. ……내 검은 용. 내가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면, 그때, 찾아갈게.”
산은 제 불행이 두렵고 무거워 아무스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홀로 죽었다.
나는 산을 잃고 울었고, 산을 잃고 우는 아무스를 보며 또 울었다.
아무스는 제 수명을 흐르는 강물에 내버리듯 쓰며 산의 꿈을 반복해서 꿨다.
슬퍼하는 아무스를 보고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가만히 보고만 있었는데 또 다른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태어났다.
작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윤지윤. 아기인 내 얼굴과 몸을 채운 몽고반점은 산이 갖고 있던 흉터와 위치가 똑같았다.
산은 나였다. 내가 산이었다.
깨달은 순간 산의 기억과 감정들이 내게 흘러왔다.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때와는 다른, 진한 밀도의 감정들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사실 나도 너랑 같이 살고 싶었는데, 너까지 불행해질까 봐.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잖아. 내 손으로 이뤄 낸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적어도 네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을 때 네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널 혼자 두고 영영 떠나게 될 줄은 몰랐어.
두 세계를 동시에 바라보는 동안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내가 울고 있는 사이에도 수없이 많은 정령들이 아무스의 마력을 받고 자연 속에서 태어났다. 그들 역시 내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지만 가끔 내가 중얼거린 말에 음을 붙여 노래하곤 했다.
‘울지 마. 울지 마―’
‘두고 가서 미안해!’
아무스가 있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 내 목소리가 들리는 거냐고 몇 번이나 소리쳤지만 정령들은 저들끼리 신나게 궁둥이나 흔들 뿐 다시 내 말을 따라 해 주지 않았다.
노래로 그들의 흥미를 끌어야 내 말이 겨우 전달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어찌나 까다로운지 아무렇게나 음률을 붙이면 따라 불러 주지도 않았다.
작곡을 배운 적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원래 내가 알던 노래를 상황에 맞게 불러 주는 것뿐이었다.
몇 번이나 튕기듯 세계 밖으로 내보내진 후에야 성공했지만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노래로 전하는 데엔 성공했다.
정령들은 아무스 옆에서 뛰어놀며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너무 늦었나요.’
‘혹시 많이 기다렸나요.’
‘때론 내가 없는 밤이 깊고 길고 어두웠나요.*)
잠들어 있던 아무스가 눈물을 흘리며 깨어났다.
긴 고통을 끝내려 아무스가 스스로 죽으려 할 때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행히 이것 역시 바꿔야만 하는 과거였던지,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내 모습까지 아무스에게 보이는 것 같았다.
바꿀 수 있는 과거에 한해서는 과거를 바꿔 주고자 하는 대상에게 닿을 수 있거나, 목소리가 들리거나, 모습이 보이는 등 각각 상황에 맞는 형태로 내가 나타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산이었을 때 하고 싶던 말을 조금이라도 꺼내면 곧바로 다시 찢어진 공간 사이로 돌아갔다.
몇 번을 반복하고서야 알았다.
결국 두루뭉술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스가 포기하지 않고 나를 찾을 수 있도록.
“내가 어떤 이름으로 살더라도, 나를 잊지 마. ……우린 숨바꼭질을 하는 거야.”
아무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날 붙잡으려 했지만 이젠 떠나야 했다.
“네 이름을 세 번 부를 거야. 한 번 부르면 잠에서 깨어나고, 두 번 부르면 나를 만나러 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부를 땐…… 나를 안아 줘. 타이밍 잘 맞춰서. 알았지?”
“뭐?”
“아무리 오래 걸려도 포기하지 마. 나도 아무리 오래 걸려도 널 찾아낼게. 그러니까 절대 포기하지 마.”
나는 아무스를 두고 다시 찢어진 공간 속으로 들어갔다.
기다려, 아무스. 우리의 필연들을 내가 만들어 낼게.
하지만 찢어진 공간은 갈수록 넓어졌다. 사방으로 펼쳐진 순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방대해졌다.
이제 두 세계에서 일어나는 주요 사건들이 온갖 곳에서 보였다.
마치 거대한 도서관의 책장 사이를 걷는 것 같았다. 수백, 수천 권의 장면들이 촘촘히 상하좌우로 늘어져 있었다. 거기엔 윤지윤의 인생도 있었고, 원래 솔레아가 살던 제르노아 세계, 아무스가 홀로 겪어 왔던 세계들이 모두 뒤섞여 있었다.
그중 어디에 끼어들어 어떤 사건을 필연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몰라 매번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과거와 현재, 내가 아는 미래가 마구잡이로 섞여 있기도 했다.
수백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내가 바꿔야만 하는 순간들을 몇 가지 찾아냈다.
의외로 가장 먼저 한 건 카라샤펠 황녀를 살리는 일이었다.
황제를 따라 사냥터로 놀러 간 카라샤펠이 암살자에게 납치되어 서대륙으로 가는 배에 시체가 되어 실릴 뻔했다.
펜촉으로 암살자의 목을 찌르자 그는 잠시 휘청거리다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암살자에게 잡혀 발버둥 치고 있던 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랏샤가 풀려났다.
“랏샤! 도망쳐! 가! 황궁으로 돌아가!”
뜬금없이 피를 토하며 쓰러진 암살자를 몇 번 뒤돌아본 랏샤는 도망치다 말고 암살자에게 돌아왔다.
“왜 다시 오는 거야! 그냥 가라니까! 빨리 배에서 내려, 멍청아!”
어차피 내 목소리도 안 들리겠다 싶어서 욕까지 했다.
랏샤는 죽은 암살자를 살피다가 그의 품 안에서 금배지를 찾아내 주머니에 넣고 돌아갔다.
“……증거를 찾으려고 한 거였구나. 무슨 어린애가 그렇게 철두철미하니! 앞으론 전하께 더 잘할게요!”
너무 오랜 시간을 검은 공간 안에 갇혀 있었던 탓에 혼잣말이 늘었다.
호위 기사들에게 돌아간 랏샤는 암살자를 보낸 게 3 황비라는 걸 알고 복수했다.
이젠 거의 스포츠 중계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 3 황비가 널 죽이려고 한 거야! 잘했어! 잘하셨어요, 전하!”
박수갈채를 보내며 다음 필연으로 넘어갔다.
어린 티온이 가죽 공장으로 팔려 가기 전, 그의 친부는 티온을 원래 노예 시장에 내놓으려고 했다.
친부가 잠든 옆자리에서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가죽 공장, 가죽 공장, 가죽 공장, 가죽 공장, 가죽 공장, 가죽 공장…….”
숙취에 시달리며 잠에서 깨어난 티온의 친부는 무언가에 홀린 듯 말했다.
“……가죽 공장에 팔아야겠어.”
티온의 과거는 그렇게 바꿨지만 헤이먼이 실험체로 고통받는 과거는 바꿀 수 없었다.
대신 헤이먼의 마력이 실험에 의해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도록 주사기 속 약의 용량을 조절하거나, 헤이먼이 자아를 완전히 잃지 않도록 내내 그의 곁을 지키며 보이지 않는 내 영혼으로나마 그를 안아 줬다.
실험에 성공했다 생각한 이달론이 헤이먼을 폐공장에 두고 가 버리자 혼자 남은 헤이먼이 바닥에 쪼그려 앉는 걸 확인하고서, 나는 공간의 틈 사이로 돌아갔다.
“이제 또 어딜 바꿔야 되지?”
그때 갑자기 다른 생명의 파동이 느껴졌다.
세계의 바깥에 있는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이질감이었다.
나는 마력의 파동이 강해진 곳을 향해 달려갔다.
수없이 갈라진 세계들 사이에서 자연이 가진 마력 파동이 일그러진 탓인지 정령이 아닌 존재들이 태어났다.
마물들이었다.
갓 태어난 마물들은 아기 강아지처럼 팔짝팔짝 뛰며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마물들은 안아 달라는 듯 앞발을 들고 낑낑거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난 마력이 없어. 아무스한테 받은 마력도 이젠 없는데…….”
예전에 정령들이 마력이 있으면 마물을 길들일 수 있다고 말해 준 적이 있는데, 그 얘기가 틀렸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