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돈!”
돈의 이름을 부르며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연신 기침을 뱉어 내는 돈은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듯했다.
돈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앤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가씨. 위험할지도 몰라요! 가까이 가지 마세요! 저자가 갑자기 허공에서 툭 떨어졌어요!”
아직 이달론이 돈의 몸에 기생하고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나는 섣불리 가까이 가지 못하고 근처에서 주춤거렸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아무스를 마지막으로 본 것 역시 돈이니 이대로 죽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란스러움을 느낀 건 나뿐이 아니었는지 오빠들과 황녀님까지 모두 현관으로 내려왔다.
그레이가 돈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이 개새끼야!”
“크헉, 콜록! 컥……!”
돈이 기침을 할 때마다 초록색 점액질이 코와 입 밖으로 줄줄 흘러나왔다.
“도, 도련님…….”
돈의 눈동자가 평소의 검은색으로 완전히 돌아온 걸 확인한 그레이는 분을 참지 못하고 돈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 새끼한테 몸을 넘긴 거야!”
“도련님……. 저도 몰랐어요. 정말 몰랐어요……. 떠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그냥 저택 밖으로 나가서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뭔가가 제 목을 졸랐어요.”
공포가 서린 돈의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반항하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벗어나려고 했는데…… 그럴수록 몸을 옭아매는 힘이 강해지고, 나중엔 제 몸으로 들어와서…….”
말을 이어 가는 돈의 몸이 감전이라도 당한 것처럼 덜덜 떨렸다.
아직도 돈의 목에는 시퍼런 멍 자국이 선명했다. 고문이라도 당했는지 몸 여기저기가 상처로 가득했다.
과거의 기억 때문에 보기 힘든지 헤이먼은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티온은 헤이먼을 제 뒤로 숨기고 앞으로 나와 말했다.
“기억나는 게 그게 다인가?”
“……예.”
나는 돈과 티온 사이로 끼어들었다.
“네가 여기 있으면 이달론은 어떻게 된 거야? 아무스는?”
돈은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달론은…… 죽었어요. 용이 이달론의 영혼을 소멸시켰고, 그 순간 제가 밖으로 튀어나왔어요.”
“밖으로 튀어나왔다니. 그럼 아무스는 계속 어둠 속에 있는 거야?”
“……이달론이 제 몸에 있는 동안 느낀 바로는, 용도 힘이 다한 것 같았어요. 마지막 힘을 다해서 이달론을 죽인…….”
나는 돈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미친 듯이 계단을 올라갔다.
이렇게 끝일 리가 없다.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강한 용이 고작 마법사 하나 때문에 죽었을 리가 없다.
가슴속이 답답해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죄책감이나 제대로 사랑해 주지 못했다는 미련 같은 감정들이 아니었다. 훨씬 오래된, 해소되지 못한 갈망이었다.
나는 아무스가 내 옆에 있길 바라고 있었다.
내 방으로 다시 들어가 일기장을 펼치고 펜을 손에 쥐었다.
내 몸에서 아무스의 마력은 사라졌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내겐 얼렁뚱땅 마법의 일기장이 남아 있었다.
일기장에 글씨를 쓴다고 해서 그대로 이뤄질 거란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이번엔 모험을 해야만 했다.
펜을 종이 위로 내렸다. 이번엔 밀어 내는 압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스와 다시 만난다.
열린 방문으로 오빠들이 들이닥쳤다.
“솔레아! 갑자기 왜 그래!”
“지윤아!”
“막내야……?”
일기장이 놓여 있는 바닥이 서서히 열리며 검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나를 집어삼키기 위해 한껏 아가리를 벌린 짐승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가족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 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 다녀올게. 꼭 돌아올게.”
마치 모래 늪으로 빨려 들어가듯 일기장이 검은 공간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곧 구덩이 밑으로 떨어졌다.
검은 공간은 내 몸을 완전히 받아들이자마자 입구를 닫아 버렸다.
“아무스!”
아무스의 이름을 불렀지만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넓은 공간에서 말할 때처럼 목소리가 울리는 느낌도 들지 않았고, 비좁은 공간에 갇힌 듯 내 목소리가 귓가에 머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내 입 밖으로 나간 음성들이 그대로 산화되는 것 같았다.
여기가 얼마나 좁은지, 넓은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달론의 마법 때문에 내 몸이 사라졌던 수백 년의 시간들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이번에는 내가 선택해서 왔으니까.
아무스를 찾을 거야.
“아무스. 난 너를 찾을 거고, 너와 함께 내 행복한 삶으로 돌아갈 거야.”
다짐을 뱉어 낸 순간,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며 시커먼 공간들이 온갖 색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암흑은 은은한 진줏빛으로 빛나며 내가 지나온 모든 순간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치 앨범 속 사진들을 세워 놓은 것 같았다.
내가 직접 보지 않은 과거들도 있었다. 아까 돈이 말했던, 이달론이 그의 몸을 장악하는 순간도 보였다.
이달론을 죽이면 아무스가 위기에 처하는 상황도 오지 않겠지.
나는 망설임 없이 돈이 이달론에게 먹히던 순간 앞으로 가서 손가락을 천천히 뻗었다.
영화처럼 그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이달론에겐 내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기서 이달론을 죽이면 미래를 바꿀 수 있겠지.
나는 펜을 힘 있게 쥐고 이달론의 뒤로 다가가 펜촉으로 그의 목을 깊이 찔렀다. 이달론은 검붉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죽였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마자 갑자기 내 손끝과 발끝이 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어?
사라지지 못하도록 내 몸을 끌어안았지만 순식간에 몸 전체가 투명해졌다.
“안 돼! 하지 마! 안……!”
온몸에 불이 붙으면 꼭 이런 느낌일까 싶은 강렬한 고통이 전신을 뒤덮었다. 폭풍우에 휩쓸린 것처럼 내장이 뒤틀리고 흔들리는 듯했다. 모래가 바람에 흩어지듯 내 얼굴이 사라져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뜨니 다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공간 안이었다.
“실패했구나. ……더 가까운 과거를 바꿔야 하나?”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걸었다.
나와 그레이가 나타나기 전, 아무스가 돈의 몸을 가진 이달론과 싸우는 것이 보였다. 역린을 찔리기 직전인 듯했다.
가진 무기는 펜촉뿐이다.
나는 그 순간에 손을 대고 아까처럼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여전히 그들에겐 내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번 펜촉으로 이달론을 찔렀다.
또 몸이 사라졌다.
이번엔 다시 눈을 뜨면 아무스와 함께 있을까 싶었지만 여전히 공간 안이었다.
“뭐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일기장을 펼쳐 봤지만 그곳엔 더 이상 어떠한 글씨도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방금 전 썼던 ‘나는 아무스와 다시 만난다.’라는 글씨뿐이었다.
과거를 향해 걸어갔다.
아무스와 함께 감옥 속에서 이달론의 몸을 갈가리 찢어발겼던 순간을 건드렸다.
과거의 내가 검으로 이달론의 몸을 산산조각 내자 진한 초록색의 영혼이 질질 흘러나와 구석으로 숨어드는 것이 보였다.
저기다.
두 손으로 펜을 쥐고 온 힘을 다해 이달론의 영혼을 찔렀다.
또 몸 전체가 불에 타는 것처럼 산화되어 사라졌다.
다시 공간이었다.
아팠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내 몸이 사라지는 끔찍한 고통을 연달아 몇 번이나 겪었지만 그 어떤 과거도 바꿀 수 없었다.
더 예전으로. 더 옛날로.
수없이 많은 순간으로 들어가 이달론을 죽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달론은 멀쩡하게 살아나 아무스의 역린을 찌르고 그와 함께 검은 공간 안으로 사라졌다.
진줏빛으로 번쩍이는 공간에서 무력하게 눈을 뜨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혹시 난 여기 갇힌 걸까?
내 안에서 좌절감이 대가리를 쳐들자 공간을 채우던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난 강한 사람이야. 해낼 수 있어. 날 일으키는 건 언제나 나 자신이야. 찾을 수 있고, 돌아갈 수 있어.”
펜을 꼭 쥐었다. 공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빛났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가만히 생각했다.
과거를 바꾸려 하면 내 몸이 사라지고, 나는 이곳에 갇힌다. 심지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로.
과거를 크게 바꾸지 않는 선에서 아무스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여긴 어디까지 펼쳐져 있는 거지?”
공간의 끝을 가늠하려 두 눈을 가늘게 떴지만 사방으로 펼쳐진 공간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무작정 끝을 향해 뛰었다. 한참을 달렸다.
아무스가 처음 내 앞에 나타나던 순간, 공작님이 언덕 위에서 나를 매몰차게 바라봤던 순간, 티온이 나를 위로 집어 던졌다가 다시 받아 안으며 환하게 웃던 순간, 헤이먼과 그레이와 함께 재회의 언덕으로 놀러 가던 순간.
그때 재회의 언덕 뒤로 비슷한 다른 언덕이 나타났다. 공간 두 개가 겹쳐지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스가 언덕 위에 홀로 앉아 있었다.
잠을 잤다던 1,000년의 시간은 아닌 것 같았다.
낡은 옷을 입은 아무스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언덕 위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가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오랜만이야. 인사를 먼저 해야 하겠지? 안녕,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는 뺄까? 부담스러워하면 어떡해. 그럼 안녕, 오랜만이야, 라고만 하자. 크흠. 흠! 안녕, 오랜만이야.”
어색하게 손을 흔들던 아무스는 이내 제 손을 매만지더니 얼른 등 뒤로 숨겼다. 마치 부끄러운 것처럼.
저게 언제지?
언덕 위에 앉아 있던 아무스는 곧 신기루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나는 더 먼 과거를 향해 달렸다.
골목길에 주저앉아 새빨간 노을을 보며 혼자 눈물을 훔치던 내 어린 날이 꿈처럼 내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글픈 감정이 뇌리를 스쳤지만 잠깐이었다.
과거의 외로움에 젖어 내 미래를 흘려보낼 순 없었다.
두 다리가 뻣뻣해져 올 때까지 무작정 뛰었다.
그리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끝’에 다다랐다.
“악!”
뒤로 나자빠졌다가 몸을 일으키니 무언가가 후두둑 쏟아졌다.
쌍코피가 터졌다.
더럽게 아팠다.
공간의 끝, 한 여자가 남루한 옷차림으로 상태가 썩 좋아 뵈지 않는 과일들을 싸게 팔고 있었다.
화폐의 단위가 전혀 모르는 글자인 걸 보니 한국이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사람들의 이목구비도 내가 원래 있던 세계가 아니라 이곳에 더 가까웠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던 여자는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배를 감싸 쥐더니 이내 태연하게 장사를 이어 나갔다.
몇 시간 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좌판 아래로 몸을 구기고 들어간 여자는 제 옷자락을 입에 쑤셔 넣은 채 고통을 삼켰다.
아기가 태어나자 여자는 냉큼 일어나 좌판 옆에 있는 통에 아기를 집어넣고 뚜껑을 닫았다.
아기는 보통의 갓난아이처럼 힘차게 울지 못했다.
흐엥, 흐아앙, 앙.
나약한 울음소리는 소란스러운 시장 사람들의 소리에 금방 묻혀 버렸다.
손가락을 살짝 갖다 대자 여름날 시장의 뜨거운 열기와 과일 썩는 냄새, 사람들의 역한 땀 냄새까지 온갖 악취가 그대로 전해졌다.
해가 저물자 아이 엄마는 쓰레기통을 끌고 가 더러운 하수구에 쓰레기들을 쏟아부었다.
나는 아무런 말 없이 아기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시커먼 물속으로 가라앉았던 아기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어른의 손바닥 하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의 작은 아기는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다.
‘……저렇게 죽어 버리는 건…… 말도 안 되잖아.’
나도 모르게 폐수 속으로 발을 들였다.
첨벙거리는 소리도, 물의 움직임도 전혀 없었다.
흘러가는 폐수 속에서 쓸 만한 것을 건지는 부랑자들 역시 나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부패한 고깃덩이처럼 보이는 아기의 엉덩이를 살짝 때렸다.
그때 아기가 우렁찬 울음을 터뜨렸다.
“흐아아앙!”
“뭐야, 저기 웬 애가 있잖아!”
사람들은 그제야 아기를 발견했다.
젊은 수녀가 망설임 없이 강으로 뛰어들어 내 앞에서 아기를 건져 갔다.
이제 곧 내 몸이 사라지겠지.
아이를 안고 멀어지는 수녀를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 사건은 이렇게 바뀌어야만 하는 과거란 뜻이었다.
저 아이는 반드시 살아야 하는 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