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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148/192)

148화

* * *

아무스가 사라지고 난 뒤 다시 공간을 찢으려고 했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다시 열리지 않았다.

몸에서 아무스의 힘이 모두 빠져나간 것 같았다.

“아, 안 돼…… 아무스!”

넓은 공작저의 정원 한가운데에서 아무스의 이름을 크게 외쳐도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공작님!”

“세상에, 도련님!”

사용인들의 비명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피범벅이 되어 쓰러진 공작님과 그레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빠! 오빠!”

몸 이곳저곳에서 피를 흘린 탓에 시뻘건 덩어리처럼 보이는 공작님과 그레이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두 사람 다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의 몰골이었다.

다급하게 뛰어온 하인들이 조심스럽게 공작님과 그레이를 집 안으로 옮겼다.

그레이는 곧 피가 멎었지만 공작님의 상처는 공작저 주치의조차 손을 쓸 수 없는 중상이었다.

티온은 직접 말을 몰아 수도의 의술사들을 데리러 급히 떠났다.

공작님은 계속 가래 끓는 기침 소리를 내며 피를 토했고, 그레이 역시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가만히 누워 있기만 했다.

헤이먼은 덜덜 떨리는 내 손을 힘 있게 잡으며 눈을 맞춰 왔다.

“너는 괜찮은 거야?”

“난, 난 괜찮아……. 근데 어떡하지. 나 때문에 공작님이랑 그레이가, 나 때문에…….”

“가족 중 누구였어도 그랬을 거야. 내가 위험했을 때 네가 달려든 것처럼. 그러니까 죄책감 갖지 마. 지금은 아버지랑 그레이 살리는 것만 생각해.”

“……근데 오빠. 아무스가 사라졌어. 아무스가, 그놈을 데리고 가 버렸는데…… 아무리 해도 공간이 다시 안 열리고…….”

횡설수설하는 나를 당겨 안으며 헤이먼은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아버지도, 그레이도, 아무스도. 모두 멀쩡하게 우리 곁으로 올 거야. 떨지 마. 솔레아.”

“그래도 내가 괜히 여기 와서, 나 때문에 공작님이…….”

“지윤아.”

갑작스레 불린 내 이름에 놀라 헤이먼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헤이먼은 나를 안고 있는 팔의 힘을 풀지 않았다.

“지윤아. 괜찮을 거야. 우린 가족이잖아. 형이 의술사들 데리러 갔으니까 금방 올 거야. 네가 있던 세상엔 마법이 없다며. 여긴 마법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될 거야. 지윤아. 우린 다 괜찮을 거야.”

계속 덜덜 떠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헤이먼은 품에서 나를 떼어 놓고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도 그 나름대로 마력을 이용해 둘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의술 마법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헤이먼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의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도록 현상을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말발굽 소리가 공작저를 가득 채웠다.

저택 정문으로 향하자 제 기사들과 함께 의술사들을 데려온 티온이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빨리! 빨리 내려! 요!”

“예. 예! 갑니다!”

기사들 역시 마음이 급했는지 의술사들의 뒷덜미를 잡은 채 거의 끌고 오다시피 하며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서 말했다.

의술사들 중에는 집에서 쉬다가 끌려온 이들도 있어 보였다.

하지만 불쾌한 표정을 짓는 의술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다급한 표정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공작님과 도련님은 어디 계십니까?!”

“여기요! 따라오세요!”

“걱정 마십시오, 공녀님! 그간 영지를 돌봐 주신 은혜를 반드시 갚겠습니다! 제 의술사 인생을 걸고 반드시……!”

“빨리 오라고!”

“예!”

의술사들은 헤이먼과 함께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의술사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 각각 공작님과 그레이를 치료했다.

몇 시간이 넘는 긴 치료 끝에 두 사람 모두 호흡이 안정되긴 했지만 여전히 의식은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두 분이 깨어나시는 건 조금 더 상태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몸 전체를 뒤덮었던 피를 닦아 냈지만 공작님의 혈색은 여전히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더 할 수 있는 건 없는 건가요?”

“저희로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럼 못 깨어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공녀님.”

치료하며 마력을 대부분 소진했는지 의술사들은 지친 얼굴로 땀을 닦아 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나를 붙잡은 티온이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막내야. 이럴 때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 무너지지 마.”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어깨를 안은 티온은 내 곁에 고목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그때, 창문 너머로 저택 앞에 화려한 마차가 도착한 게 보였다.

황녀의 마차였다.

무기 상점에서 공간을 찢어 아무스가 있는 곳으로 향한 탓에 황녀님을 미처 챙기지 못했었다.

감히 황족만 시장 한가운데에 남겨 두고 오다니.

급해서 어쩔 수 없었지만 황족 모욕으로 당장 작위를 박탈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여간 화난 게 아닌 듯 황녀는 수많은 사람들을 뒤에 줄줄이 달고 심각한 얼굴로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죄는 달게 받겠으나 지금은 집에 환자가 있으니 부디…….”

“그대가 아니군.”

“네?”

“그럼 누가 다쳤길래 티온 공자가 수도의 의술사들을 전부 납치하듯 데리고 간 거야? 자네와 함께 떠난 그레이인가.”

황녀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모두 황궁 소속의 의술사들이었다.

제국 최고의 의술 아카데미를 졸업한 인재들 중에서도 손에 꼽는 사람들만 의술사 가운에 황궁 소속의 마크를 달 수 있었는데 카라샤펠 황녀 뒤에 선 이들은 모두 노란 마크가 달린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고맙단 인사는 천천히 하고, 환자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부터 해 주지? 베르고는 은혜만 잊지 않으면 돼.”

“네, 네! 네! 물론이죠. 네!”

얼빠져 있는 나를 대신해 얼른 대답한 헤이먼이 황궁 의술사들을 데리고 공작님과 그레이가 누워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감사합니다, 전하.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황궁 마차가 따로 갈라졌을 때부터 내 호위가 뒤에 따라붙었으니 내 신변은 걱정 말고. 수도 시내에서 베르고의 장자가 말을 타고 온갖 의술사들을 다 잡아서 마차에 태우곤 납치하듯 끌고 간다는데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지.”

“겨우 몇 시간 전인데요.”

“내가 생존의 불안정성 때문에 소식이 좀 빨라.”

잠깐 장난스레 미소 지은 황녀는 내 입꼬리를 엄지로 누르더니 위로 쭉 올렸다.

“살릴 수 있으니 표정 풀어.”

그레이뿐 아니라 공작님까지 크게 다쳤다는 걸 알게 된 황녀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지만 이내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수도의 의술사들이 마력을 재충전하는 동안 황궁 의술사들이 협력해서 공작님과 그레이를 치료했다.

잠시 후 방문이 벌컥 열렸다.

“공작님께서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습니다. 몸속에 피가 부족해요. 잠깐 동안은 마력으로 생명을 붙잡아 둘 수 있지만 빠른 회복을 위해선 피가 필요합니다.”

의술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딸이에요!”

카라샤펠 황녀는 ‘자네가 공의 딸인 건 모두 알고 있어.’라며 깐족거렸지만 내겐 직접 꺼내기 힘든 말이었다.

의술사는 마법을 이용해 공작님의 몸에 내 피를 수혈할 수 있는지 간단히 확인하고는 주사를 꽂아 내 피를 뽑아 갔다.

카라샤펠 황녀와 티온, 헤이먼이 내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아는 자네는 이리 겁이 많지 않은데. 정신 차려. 베르고는 강해.”

“막내야. 아버지는 돌아오실 거야.”

“그레이도 멀쩡할 거야. 걔 말도 안 되게 튼튼한 거 알잖아, 레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이가 누워 있는 방의 문이 열렸다.

“솔레아!”

“그레이!”

얼굴이 조금 희게 질리긴 했지만 그레이는 크게 아파 보이는 구석 없이 제 발로 걸어 나왔다.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난 내 앞으로 걸어온 그레이는 내 몸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 봤다.

“너 다친 데 없어? 왜 우리가 집에 있는 거야? 아버지는 괜찮으신 거야? 그 새끼는? 아무스는?”

쏟아지는 그레이의 질문 세례에 아랫입술이 덜덜 떨렸다.

“나는 괜찮은데 아무, 아무스는 이달론과 같이 없어졌고, 아버지는 언제 깨어나실지 모른대…….”

놀라서 커진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레이는 내 몸을 당겨 품에 안고는 그저 등만 다독일 뿐이었다.

몇 분 후, 공작님이 계신 방에서 의술사들이 빠져나왔다.

“공작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방으로 뛰어 들어가자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공작님이 눈을 천천히 깜빡이고 있었다.

“아빠!”

“다친 곳은 없니. 얘들아.”

“아빠, 눈이…….”

움직이는 눈꺼풀은 왼쪽뿐이었다.

오른쪽 얼굴을 가로지른 큰 흉터 때문인지 오른쪽 눈은 전혀 뜨지 못하는 상태였다.

의술사들 말로는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떨어져 나간 살점을 완전히 복원하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도 크게 다친 적 없던 공작님이 이젠 나 때문에 오른쪽 눈을 뜨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천천히 뒷걸음질 치려는데 공작님이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

“지윤아. 괜찮다.”

“공…….”

“아빠.”

“공작님…….”

“아빠.”

“아빠…….”

한쪽 눈을 일그러뜨리며 애써 웃는 공작님 때문에 나도 억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공작님은 오빠들과도 차례로 인사를 한 뒤 황궁 의술사들을 데려온 황녀에게도 감사를 전했다.

“그런데 아무스는 어디로 간 거니?”

“이달론을 완전히 죽이질 못해서 아무스가 그놈을 끌고 찢어진 공간 속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다시 열어 보려고 했는데 열리지 않아요. 제 몸에서 아무스의 마력이 다 빠져나갔어요.”

침울한 내 목소리를 들은 공작님은 내 손등을 천천히 매만졌다.

“레아. 지윤아. 너는 강한 사람이다. 아무스의 마력이 없어도 넌 그를 다시 찾을 거야.”

공작님의 말이 맞았다.

계속 죄책감에 시달리며 누군가 나를 다독이고, 등을 떠밀어 주길 기다리고 있을 순 없었다.

내가 움직여야 했다.

“아빠. 저 아무스를 찾아서 데려올게요. 절 위해…… 혼자서 이달론을 끌고 간 걔를 모른 척할 수가 없어요.”

“그럼, 그래야지. 그래야 우리 착한 딸이지. 아빠는 우리 딸 믿는다. 우리 걱정은 말고 꼭 찾아서 데려오렴. ……이 자식은 우리 딸이 찾으러 갈 때까지 안 오고 뭐 하는 거야.”

굳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일부러 가벼운 농담을 던진 공작님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공, 흉터 때문에 이제 웃어도 젠틀한 미중년으론 보이지 않아. 오히려 티온 공자가 더 잘생겨 보일 정도인걸.”

황녀의 농담에도 아무도 웃지 않자 황녀는 구석에 놓인 소파로 가 앉았다.

“이 집 사람들은 여전히 내 개그를 이해하지 못하는군.”

“아빠. 저 금방 갔다 올게요.”

공작님을 안아 드린 뒤 내 방으로 달려갔다.

지금 상황에서 아무스를 찾기 위한 유일한 단서는 일기장이었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서랍을 열고 일기장을 펼쳤다.

공작님과 그레이가 크게 다쳤다. 다 내 잘못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지만 가족 중 누가 위험에 처했대도 그들은 똑같이 했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랬겠지. 그런데 아무스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찾을 수는 있는 걸까?

잠시 기다리자 다른 글자가 생겨났다.

돈에게 물어봐야겠다.

그 순간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아악! 이게 뭐야!”

“누구냐!”

다급하게 방 밖으로 나가자 질척한 초록 점액질에 파묻힌 한 남자가 현관에 쓰러져 있었다.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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