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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147/192)

147화

이달론은 용의 역린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용은 이달론의 영혼을 붙잡고 있었다.

검은 공간 밖에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아까는 떼어 내기 위해 발버둥 쳤다면 이제는 그를 절대 놓지 않으려고 이를 악무는 듯한 태도였다.

곧 죽을 제 앞날을 모르는 것은 인간이나 이 짐승 새끼나 다를 바가 없으니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크큭, 걱정하지 마라. 검은 짐승아. 죽어도 너와 함께 죽을 테니.”

아무스는 묘한 비웃음이 서린 목소리로 답했다.

“이 공간 안에서는 내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 내가 너를 먼저 죽이나, 아니면 네가 나를 먼저 죽이나 어디 한번 보자.”

그제야 검은 공간 안으로 들어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죽어 가는 시간을 영원에 가까울 만큼 늘려서 그가 지쳐 포기할 때 숨통을 끊는 걸 노린 것이었다.

이 얼마나 순진하고 무지한 용인지.

영혼 상태인 이달론은 물 흐르듯 용의 몸 위를 기어 다니다 용의 목을 틀어쥐며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주 멀고 먼 옛날, 네가 쓸어 버린 마을을 기억하나? 그 마을엔 네가 사랑한 그 병균 같은 계집이 살았지. 아마 저 바깥의 공녀와 같은 영혼일 거야.”

용이 크게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찌 알았냐는 듯 용의 노란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낄낄거리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이달론은 이어 말했다.

“나도 거기 살았거든. 네가 흘리고 간 마력 덕에 전생의 기억을 잊지 않아서 다시 태어나자마자 다른 사람들의 생명력을 흡수하며 네게 복수할 날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 아무렴 내가 이를 갈며 보낸 시간만큼 느렸을까.”

이제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힘이 이달론의 영혼을 틀어쥐었다.

“커헉!”

이상했다.

분명히 이달론이 아무스의 역린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니 제대로 된 힘을 쓰지 못해야 하는데.

마치 여태 감춰 둔 힘을 꺼내기라도 한 듯 용은 이달론의 영혼의 뿌리를 뽑아낼 것처럼 틀어쥐고 제게서 떼어 냈다.

“으, 으, 억!”

아무스에게서 떨어져 나온 이달론은 어떻게든 다시 그의 역린으로 파고들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용의 검고 긴 동공이 더욱 가늘게 변했다.

“……아직 살아 있는 그 마을 것이 있었다니. 인간 주제에 놀랍긴 하구나.”

용의 손안에서 찌그러진 이달론의 영혼이 마구잡이로 엉켰다.

이젠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용의 큰 앞발과 발톱 사이에서 이달론의 찌그러진 눈알이 툭 튀어나왔다.

이달론은 그런 지경이 되어서도 킬킬거리며 찢어지듯 웃었다.

“인간 주제에? 인간을 사랑해서 분노하고, 인간 때문에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으면서. 고작 그 하찮은 인간 때문에 제 수명을 깎아 인간들에게 나눠 줬으면서. 인간 주제에? 크크큭. 웃기는군. 정말 재밌는 짐승이야, 넌.”

아무스는 이달론을 확실히 죽이기 위해 남아 있는 생명력을 전부 다 마력으로 치환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너는 다시 태어나지도 못하게 영혼을 소멸시켜 주마.”

“왜? 내가 그 마을 주민이라서? 너는 사람을 죽여도 되고, 나는 안 되는 거야? 크큭. 왜? 네가 사랑하는 사람만 소중하고 다른 사람들은 소중하지 않아서?”

아무스는 더욱 강하게 이달론의 영혼을 틀어쥐며 아래로 곤두박질치듯 내려갔다.

이달론은 제 영혼이 조금씩 산산조각 나는 것을 느꼈다.

“왜! 대답해! 왜 죽였어!”

“너는 분노하고 있지 않아.”

“……뭐?”

“너는 가족들의 죽음을 잊었다. 네가 지금 분노하는 이유는 그저 네가 죽기 때문이다.”

“……웃기지 마. 내가 여기까지 온 건 다 가족들이 죽고, 친구도, 마을 사람들도 다 죽어서…….”

“지금 너는 네가 죽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아주 작은 조각만 남은 이달론의 영혼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네가 죽인 인간들은 어떡할 건데! 그 불쌍한 영혼들은!”

“그럼 너희 마을 것들이 죽인 억울하고 불쌍한 산의 영혼은 어떡할 거지?”

“다시 태어나서 저기 밖에 잘 살아 있잖아! 우리 엄마랑 아빠는!”

“그러면 네 엄마와 아빠도, 친구도, 마을 사람들도 언젠가는 다시 태어나 새로운 몸으로 생을 살아가겠지. 완전히 소멸하는 건 타인의 마력을 빼앗아 생을 이어 온 너뿐이다.”

“무식한 마을 사람들이 미친년 말에 넘어가서 고작 사람 한 명 죽인 죄밖에 없어. 겨우…… 겨우 한 명이잖아. 한 명이었는데…….”

이달론의 말이 채 끝나기 전, 아무스는 제 손 끝에 불꽃을 피웠다.

첫 번째 생에서 몸을 불태웠던 그 불꽃의 온도였다.

“아, 아아…… 억울해, 나는…… 억울해.”

아무스는 이달론의 영혼이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계속해서 불태웠다.

긴 세월을 살아온 영혼이라 그런지 생명에 대한 미련이 질겼다.

그러나 이달론은 생에 대한 미련으로 버틸 뿐이었고, 검은 용은 제 생의 마지막 힘까지 쏟아붓는 중이었다.

이윽고 영혼의 티끌만 한 조각까지 모두 사라졌다.

“하아…….”

아무스는 긴 한숨을 내쉬며 검은 공간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다시 공간을 열어 밖으로 나갈 최소한의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눈꺼풀이 무겁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런데도 마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마지막 순간이 닥치자 아무스는 고요히 미소 지었다.

진짜였어. 붉은 머리 여자를 만났던 게 꿈이라 생각했었는데 진짜였어.

긴 잠에서 깨어난 이후부터 솔레아와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산. 나 네 말 잘 들었지?

말도 예쁘게 했고, 계속 기다렸고, 다시 만날 때까지 포기하지도 않았어.

그리고 그 이상한 규칙들도 다 지켰어. 조금 헷갈리고 엉성해서 내 마음대로 한 부분들도 있지만.

한 번 불렀을 때 잠에서 깨어났어. 몰래 네 꿈으로 너 만나러 갔었는데. 원래는 네가 내 꿈에 나왔던 붉은 머리 여자가 맞나 얼굴만 보고 오려고 했어.

근데 이상한 마력이 네 머릿속에 달라붙어 있길래 그거 떼 줬지. 나 잘했지? 알아. 나 잘한 거.

두 번 불렀을 때도 널 만나러 갔어. 근데 내가 아는 네 모습이랑 조금 달라서 놀랐어. 너는 강한 사람인데. 너는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이겨 낸 멋지고 단단한 사람인데.

‘아버지’를 잊길 바랐어.

그리고 세 번째 불렀을 때는 네가 정말 아버지를 잊었었지. 모든 가족들을 다 잊었지. 나 사실 내 수명 몇백 년 주고 꾼 꿈에서 네가 ‘나한텐 너밖에 없어.’라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때 기분이 되게 별로였어.

네가 계속 행복해서 선택지가 아주 많을 때, 나를 사랑해 주는 게 더 기쁠 것 같아. 그럼 난 네 보물이 될 테니까.

참, 세 번째 불렀을 때 타이밍 잘 맞춰서 안으라고 한 건 너무 별로였어. 계속 눈치 보고 있다가 이달론이 너한테 이상한 이름 붙이기 일보 직전에 끌어안았잖아.

왜 그런 이상한 조건을 걸어서 헷갈리게 한 거야.

웃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지만 눈을 찌그러뜨리며 웃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면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멋대로 짝이라고 불러서 화난 건 아니지? 그냥 네가 내 짝이었으면 해서. ……아니 근데 이름 불렀으면 짝 아니야? 네가 불렀잖아.’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처럼 속으로 이죽거리던 검은 용은 계속 헤실헤실 웃었다.

이상하게 그녀만 생각하면 어렸던 그날로 돌아간 거 같았다.

이런 마지막이라면 행복했다.

새로 태어난 그녀는 전생에서처럼 힘들게 살아왔지만 역시 강했고, 단단했고, 이쪽 세계로 건너와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가족을 만드는 것도 봤고, 사랑받는 것도 확인했으니 족했다.

‘……이번엔 잘 안됐지만, 내게도 영혼이 있다면 다시 태어날 수 있겠지. 그럼 그때 다시 만나자. 산. 나의 작은 산.’

산과 늘 만나던 약초가 가득한 깊은 산속의 꽃밭 한가운데도 아니고, 용이 오래전 보금자리로 삼았던 동굴도 아니다.

그래도 너를 기다리기에 아주 나쁜 곳은 아니다.

우리의 숨바꼭질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번엔 네가 날 찾아 줘.

용은 천천히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완전한 암흑이었다.

* * *

‘빰밤밤.’

‘빠라밤밤밤!’

‘……사랑해!’

‘……사랑해!

‘내가 처음에 부르기로 했잖아!’

‘같이 하면 되지!’

‘알았어. 하나, 둘, 셋! 하면.’

‘사랑해!’

‘셋 하면 들어가자고!’

‘바로 시작하는 줄 알았지!’

‘알았어. 이제 진짜 부르는 거야. 하나, 둘, 셋!’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 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제 안녕!’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 줘! 이 순간의 느낌!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

‘근데 왜 우리 2절 부른 거야? 1절은?’

‘임시 주인이 2절 후렴 부르랬지 않나? 꼭 2절 가사로 부르랬는데.’

‘알겠고, 일단 불렀으니까 갈까? 나 피곤하고 배고픈데.’

‘그래. 주인 곧 눈 뜨겠지!’

‘그래. 이제 임시 주인이 알아서 하겠지!’

‘너희 왜 아직도 임시 주인이라고 하니! 왕주인님이라고 해!’

‘우리 원래 주인이 아니잖아!’

‘다시 살려 준 주인이니까 왕주인이지.’

‘그건 맞는 말이지.’

‘그럼 한 번만 더 부를까? 주인 아직도 처자는 것 같아.’

‘그래! 하나, 둘, 셋!’

‘전해 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도통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었다.

정령들의 노랫소리와, 종알대며 싸우는 소리가 너무 거슬렸다.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온몸에 힘이 없어서 눈을 뜨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무시하고 계속 자려는데 어느 순간 주변이 조용해지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스.”

응? 나 불렀어?

꿈결에 대답한 그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지만 몸을 일으키진 못했다.

그때, 단단한 목소리가 다시 적막을 뚫고 들려왔다.

“우리 약속했잖아. 내가 한 번 부르면 넌 어떻게 하기로 했지?”

잠에서 깨어나기로 했지.

용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주 오랜 시간을 곱씹은 약속이니, 아무리 피곤해도 어길 수 없었다.

천천히 눈을 깜빡였지만 이상하게 눈을 감아도 떠도 똑같이 시커멓기만 해 해 용은 잠깐 동안 여기가 어딘지 알아볼 수 없었다.

……내가 뭘 하다가 잠이 든 거지?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천천히 기억이 돌아오자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몸이 멀쩡했다. 분명히 죽었었는데.

인간으로 변하는 것도 간단했다.

그때였다.

“아무스.”

왜. 왜 불러. 어디에서 부르는 거야?

두 번 부르면 너를 만나러 가기로 했는데.

아무스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겨 검은 공간에서 발을 떼어 냈다.

마치 늪처럼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던 바닥에서 발바닥이 쩌적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아무스는 앞으로 힘차게 달려 나가며 옷을 만들어 입었다.

벗고 가면 혼나겠지. 오랜만에 만나는 거니까.

가슴이 쿵쿵 뛰었다. 첫 번째 성장통을 겪었을 때의 느낌과 닮아 있었다.

이게 가슴에 독이 스민 게 아니라 사랑이란 걸 알았더라면.

한참을 헤매던 아무스는 검은 공간 저편의 희미한 빛을 쫓아갔다.

공간을 있는 힘껏 열어젖히자 초록 들판 위에 서 있는 붉은 머리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흉터도 없고, 불에 탄 자국도 없지만 웃을 때 왼쪽 눈이 더 작아지는 그 사람이.

마지막 남은 용의 산이 그곳에 서 있었다.

여자는 천천히 뒤돌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세 번째 부르면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기억하지? 아무스.”

아무스는 곧장 달려가 그녀를 있는 힘껏 품에 안았다.

“나 못 한 말 있어. 산, 지윤, 솔레아. 나 있잖아. 아팠던 게 아니었어. 네가 먹인 약초에 독이 있던 게 아니라…….”

“그래. 알아. 이 둔치야. 알고 있어.”

“……사랑해.”

아무스는 그녀를 부서져라 끌어안았다가 불현듯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품에서 떼어 냈다.

“혹시 이거 꿈이야? 죽어서 천국에 온 거야? 넌 살린 줄 알았는데!”

솔레아는 큰 소리로 웃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숨바꼭질이 끝난 거야. 내가 널 찾은 거고. 들으면 깜짝 놀랄 거야.”

무슨 말인지 알 순 없었지만 아무스는 일단 솔레아를 다시 안았다.

아무리 안아도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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