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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146/192)

146화

여러 개의 산봉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산골 마을 ‘로 마하탐’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변변한 특산물도 없고, 자원도 풍족하지 않아 다들 근근이 생계를 이어 갔지만, 순수한 그들은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다.

그저 여느 마을에나 그렇듯 빈궁하게 태어난 불운한 이가 한 명 있었을 뿐이었다.

병균이 인간으로 태어난 것처럼 흉측한 몰골을 가진 그 소녀는 사람들의 냉대에도 전혀 주눅 든 낌새가 없었다.

천으로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못 가는 곳이 없었다.

그 당당한 꼴이 거슬린 마을 사람들은 소녀를 더욱 배척했다.

어렸던 소녀는 결국 다 죽어 가는 노인에게 약초에 대해 배웠다.

노인이 죽은 후 소녀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발이 닿지 않는 산 깊은 곳에서 약초를 찾는 일을 시작했다.

노인이 어째 거지를 데리고 다닌다 했더니 알고 보니 그는 일부러 소녀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제 빚을 모두 떠넘기기 위해.

소녀는 본인이 쓰지도 않은 돈을 갚기 위해 밤낮으로 약초를 찾아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소녀를 안쓰러워하긴 했으나 그럴 법하다고 여겼다.

보기 역겨운 생김새였으니까.

생김새에 맞는 팔자라 여겼다.

소녀는 산에서 도통 내려올 줄을 몰랐고 사람들은 그녀를 비웃으며 ‘작은 산’이라 불렀다.

소녀가 노인의 빚을 다 갚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서 축제가 열렸다.

산골 마을임에도 왕래가 있던 이웃 마을에서 꽤나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찾아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작은 산이 있었다.

“산에나 올라가지. 왜 오늘 같은 날 저기 있는 거야.”

제게 들리도록 말하는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에도 소녀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약초 사세요! 아무 데서나 쉽게 구할 수 없는 약초입니다!”

당연히 아무도 약초를 사지 않았다.

누군가가 구경이라도 할라치면 마을 사람들이 가서 말렸다.

“얘, 이달론. 가서 저 아줌마께 말씀드리렴.”

“네. 엄마.”

소년은 재빠르게 달려가 말했다.

“아줌마. 조심하세요. 이 애 몸에는 병균이 살아요. 자세히 보세요. 닿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어머. 그렇구나.”

소녀의 얼굴을 자세히 본 사람들은 모두 어색하게 웃으며 뒷걸음질 쳐 멀어졌다.

로 마하탐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축제가 끝나고 며칠 뒤 한 남자가 쓰러졌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오더니 고름 섞인 피딱지가 앉기 시작했고, 고열에 시달리다 얼마 가지 않아 죽었다.

그 후 그 남자의 아내와 어린 딸도 같은 증세를 보였고, 결국 죽었다.

아내의 절친한 친구 둘도 죽었고, 그 두 사람의 남편과 자식들도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어떤 약초를 발라도 고름은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았고, 열도 그대로였다.

가족과 친구를 잃은 사람들은 분노의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이 흉터 생긴 게 꼭 그년 거랑 똑같지 않아?”

“젠장. 그 망할 년이 진짜 전염병을 퍼뜨린 건가!”

“축제 날이야! 그날 일부러 그 자리에 나와 있었던 거야! 자길 무시하는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복수하려고!”

마을 외곽에 버려진 창고로 쳐들어가니 소녀가 마치 금방이라도 도망갈 것처럼 짐을 싸고 있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냐 묻는 소녀를 무작정 잡고 마을 중앙으로 끌고 나와 몰매를 놓았다.

그때 노파가 마을 사람들을 말렸다.

“의미 없이 생명을 해하지 마시오들.”

“이년 때문에 온 마을에 전염병이 도는 거라고! 미친 할망구는 빠져!”

“하늘의 뜻이 있어 그러니 자네야말로 빠지시게.”

늘 거리에 나와 앉아 있는 노파는 가끔 하늘을 보며 헛소리를 하긴 했지만 비가 오는 때를 기가 막히게 맞혔다.

그뿐 아니라 어느 아이가 곧 다칠 거라고 말하면 그 아이가 진짜로 다쳤고, 어느 젊은 상인에게 돈을 잃을 거라 예언하자 그 상인이 옆 마을에서 사기를 당하고 돌아오기도 했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흘깃대다 일단은 노파의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노파는 이미 기절한 소녀를 멍석으로 말고 마을 입구에 높은 기둥을 세워 묶어 두라 시켰다.

“하늘이 노했으니 제물을 바쳐 달래야 할 것이외다. ……마침 딱 알맞은 것이 있으니 다행이오.”

작은 불꽃은 금세 화염이 되었고, 소녀의 비명은 사람들의 흥겨운 노랫소리에 묻혔다.

몇 시간 후 검은 재가 휘날리자 노파는 숯덩이가 된 소녀를 들고 따라오라 명령하고는 노래를 부르고, 휘파람을 불어 대며 산으로 향했다.

무지한 마을에서 흔히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그 소녀가 용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걸 아무도 몰랐던 게 문제였을 뿐.

평화로웠던 산골 마을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용의 분노에 휩쓸려 죽어 버렸다.

단 한 명.

전염병 환자들의 붕대를 빨기 위해 냇가에 물을 가지러 갔다 돌아온 소년만이 살아남았다.

검은 용이 불을 내뿜는 모습을 보고 바위 아래에 숨은 소년은 한참 뒤에야 양동이를 내버리고 마을로 달려갔다.

용은 산 저편으로 날아간 뒤였다.

소년은 폐허가 되어 버린 땅 위에 한참을 서 있었다.

“엄마. 아빠? 형! 이단!”

아직 남아 있는 용의 기운 때문인지 꺼진 줄 알았던 불꽃이 도로 치솟아 아이의 다리를 태웠다.

아이는 두 팔로 땅을 기어 다니며 가족들의 유해를 찾으려 했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땅 위에 누워 새파란 하늘 위를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보던 이달론은 이를 갈며 웃었다.

“절대 안 잊어. 죽어서도 용서 안 해. 죽은 후에도 찾아가서 반드시 복수할 거야.”

로 마하탐은 지도에 기록될 겨를도 없이 사라졌다.

분명히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다시 태어난 이달론이 용의 주문으로 인해 용의 마력을 갖게 되지만 않았어도.

수백 년이 지난 어느 날 태어난 남자아이는 걷고, 뛰고, 말을 시작하게 되면서부터 복수를 잊지 않기 위해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내 마을은 로 마하탐. 내 이름은 이달론. 죽여야 할 것은 검은 용.’

죽기 전 몇 시간 동안 용의 힘을 받아서인지 이달론은 다른 마법사들보다 마력의 양이 월등히 많았고 첫 번째 생의 기억을 잊지 않았다.

용을 숭상하는 다른 마법사를 홧김에 죽이자 그의 마력이 제게 흘러들어 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대륙에서 온 마법사들도 죽여 봤지만 모든 마법사의 마력을 뺏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서대륙의 마법사들은 용을 숭상해서 죽였고, 다른 마법사들은 마법사들을 죽였을 때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 죽였다.

이유 없이 죽은 그들은 모두 억울해했지만 이달론은 무감했다.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죽음은 없으니까.

마력을 뺏으면 뺏을수록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졌지만 이것도 영원하진 않았다.

게다가 아직도 검은 용을 찾지 못했는데.

살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복수의 의미는 옅어지고 영생에 대한 욕망만이 강해졌다.

미개하고 멍청하게 살면 죽는다.

남의 말에 속으면 죽는다.

약하면 죽는다.

그러니 죽지 않는 자만이 현명하고 강하고 완전무결하다.

그릇된 사고가 이달론의 안에 완전히 자리 잡을 무렵, 펠르아이네르 왕가에서 유명한 마법사인 그를 찾았다.

크게 앓고 난 이후에 깨어난 제 아들이 기억을 잃었으니 도와 달라는 의뢰였다.

호기심에 만나러 가 보니 몸 안에 흐르는 생기의 흐름이 이상했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기묘하게 흘렀다.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마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는데 분명히 살아 있었다.

왕자와 단둘이 방에 남아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는 자신이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했다.

빛나는 초록색 눈을 보니 과거의 제 모습이 생각나 이달론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주문을 외웠다.

“로 마하탐.”

그런데 이상했다.

단번에 죽었어야 할 놈이 죽지 않았다. 용의 힘이 전혀 통하지 않는 몸이었다.

다른 세상에서 왔기 때문인가?

저 몸을 가지면 용보다 오래 살 수 있을까? 용에게 당하지 않고 죽지도 않을 수 있는 건가?

이달론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침대로 올라가 왕자의 목을 두 손으로 졸랐다.

마력을 이용해 이불을 움직여 몸부림치는 왕자의 두 손과 발을 묶고, 목구멍을 틀어쥐었다.

컥컥거리던 놈이 기절하자마자 이달론은 제 영혼과 넘치는 마력을 왕자의 몸으로 옮겼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어머니!”

놀라 뛰어 들어온 왕비는 제 아들의 몸 위에 올라탄 채 목을 조르고 있는 미친 마법사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방 안으로 들이닥친 호위 기사들이 마법사를 왕자에게서 떼어 냈다. 눈을 감고 있던 마법사는 갑자기 기침을 뱉어 내며 제 목을 쓰다듬었다.

왕자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왕비에게 말했다.

“저 미친 마법사가 방금 제 목을 졸라 죽이려고 했어요. 어머니.”

바닥을 기며 기침하던 마법사는 고개를 번쩍 쳐들어 초록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침대에 누워 있는 고운 모습의 왕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무, 무슨. 이게 무슨 일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저기에…….”

“당장 이자를 죽여라!”

그렇게 왕자의 몸으로 들어왔던 이름 모를 놈은 죽었다.

하지만 왕자의 신분으로 오래 살 수는 없었다.

시종 하나를 죽여 왕자의 모습으로 변하게 만든 뒤 침대 위에 고이 눕혀 두고 그는 왕궁을 빠져나왔다.

마법사인 편이 더 나았다.

용의 소문을 듣기에도, 수명을 이어 나가기에도.

곧 이름을 두 개 가진 이들의 마력만을 빼앗을 수 있단 걸 알게 되자 이달론은 닥치는 대로 조건에 부합한 인간들을 찾아내, 수명과 마력을 빼앗았다.

오래 살면 살수록 강해졌다.

‘로 마하탐’이 본래 무엇을 뜻하는 말이었는지 잊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이달론의 앞에 낡은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새카만 잉크로 알 수 없는 글자가 적힌 종이를 무심코 지나치려던 이달론은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주워 들었다.

읽을 수 없는 말이었다.

수백 년 동안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살았는데 모르는 언어가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전생의 기억까지 갖고 있는데.

불현듯 수십여 년 전 제 손으로 직접 죽였던 왕자가 생각났다.

‘난 다른 세상 사람이에요. 믿기 힘들겠지만요. ……알아요. 미친 소리처럼 들린다는 거. 근데 정말로 이쪽 세계 사람들이랑 말은 통하지만 쓰는 글자가 달라요. 나도 내가 어떻게 읽고 쓸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선 이런 글자 안 쓴다고요.’

“다른 세상의 글자인가?”

글자를 해석하려 종이의 위에 손바닥을 올리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갑자기 발끝이 작열하는 고통이 찾아왔다.

“아악!”

이달론은 수백 년 전의 그날처럼 바닥을 두 팔로 기어 다녔다.

“악! 뜨, 뜨거워! 그만!”

잊고 있던 과거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검은 재만 남은 마을, 시체조차 찾지 못한 가족들, 용이 사랑한 소녀.

이달론은 분노에 치를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종이에 적힌 것은 용과 관련된 내용이 분명했다.

마법사 수백 명을 죽인 저를 이렇게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강한 존재는 용뿐이니까.

그러고 보니 용이 있다는 걸 마을 사람들이 알던 그 시절에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다.

‘용의 이름을 부르면 용을 부릴 수 있다.’

“이 글자를 읽어야 돼. 내가 못 읽으면 읽을 수 있는 놈을 만들면 돼.”

이달론은 인간의 몸에서 마력을 빼내기 위해 갖은 실험을 하며 살아왔다.

긴 시간이 지났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공녀를 잡아 오는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얻게 되었고, 그녀를 통해 검은 용을 불러냈다.

비록 왕자의 몸은 잃었지만 영혼은 남아 있다.

멍청한 노예 놈의 몸을 빼앗아 공녀의 가족들을 농락했고 이제 진짜 검은 용을 죽일 수 있다.

아무스와 함께 시커먼 공간 아래로 떨어지면서도 이달론은 히죽거리며 웃었다.

오랜 염원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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