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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145/192)

145화

붉은 머리 여자는 빠르게 다가와 아무스의 손에 들린 커다란 발톱을 뺏어 던져 버렸다. 

“왜 이런 짓을 해!”

아무스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여자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여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산의 꿈속에서 봤던 흉터 없는 얼굴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화난 표정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두 눈도.

아무스는 인간으로 변해 여자의 앞에 섰다.

산이 줬던 낡은 옷은 이미 다 해지고 삭아 거지꼴이나 다름없었다.

여자는 울면서도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옷 한 벌 사 입지 그랬어……. 그 긴 시간을 왜 혼자 있었어. 왜 그랬어. 아무스.”

산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 아무스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나를 알아?”

어머니의 말대로라면 제 이름이 불리자마자 인연으로 묶이는 감각이 느껴져야 할 텐데 지금은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의 이 붉은 머리 여자는 꼭 지금 이 시간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여자는 눈물에 젖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짙은 흙냄새와 숲의 향기가 섞여 날아들었다.

조금 전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정령들도 어느새 조용해졌다.

“기다려 줘. 아무스.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닮았지만 분명히 산과는 다른 얼굴인데, 꼭 산처럼 입꼬리를 올리고, 산처럼 왼쪽 눈동자가 보이지 않도록 씨익 웃는다.

웃을 때 짝눈이 되는 것마저 비슷했다.

여자의 뒤쪽 허공이 벌어지며 시커먼 공간이 생겨났다. 그곳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암흑은 붉은 머리 여자를 집어삼키듯 천천히 다가왔다.

“……산 맞지? 산! 나만 두고 가지 마. 산, 제발!”

검은 용은 손을 앞으로 뻗었지만 여자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름은 중요하지 않잖아. 내가 어떤 사람이든 나는 그저 나라고 했잖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가르쳐 줘. 가지 마…….”

아무스는 무력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의 눈에 투명한 물방울이 차올랐다.

“……내가 또 꿈을 꾸고 있어? 아직도 꿈속이야?”

고개를 돌려 가까이 다가온 암흑과의 거리를 가늠한 여자는 두 팔을 뻗어 용을 껴안듯 그의 어깨 위에 두 팔을 둘렀다.

마치 공기처럼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산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안으며 숯 냄새를 맡았을 때보다는 훨씬 안락한 기분이었다.

용의 턱 아래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내가 수명을 더 쓸게. 그러니까 잠깐만 같이 있어 줘. 응? ……산. 앉았다 가.”

하지만 붉은 머리 여자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앙다물며 용에게서 떨어졌다.

“내가 어떤 이름으로 살더라도, 나를 잊지 마. ……우린 숨바꼭질을 하는 거야.”

“숨바꼭질?”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여자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용은 잠자코 그녀가 하는 말을 들었다.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다가 제 마음 하나 고백하지 못한 멍청한 과거를 수백, 수천 밤이 지나도록 내내 후회했으니까.

여자는 빙긋이 미소 지으며 칭찬이라도 하는 것처럼 용의 긴 머리칼을 매만지듯 손을 움직였다.

“네 이름을 세 번 부를 거야. 한 번 부르면 잠에서 깨어나고, 두 번 부르면 나를 만나러 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부를 땐…… 나를 안아 줘. 타이밍 잘 맞춰서. 알았지?”

“뭐?”

“아무리 오래 걸려도 포기하지 마. 나도 아무리 오래 걸려도 널 찾아낼게. 그러니까 절대 포기하지 마.”

암흑이 불쑥 가까워졌다.

여자의 손끝, 발끝부터 점점 암흑에게 잠식되어 갔다.

“산! 산, 잠깐만! 나 못 한 말이 있어. 제발. 나 있잖아. 독이 있던 게 아니라, 내가 너를…….”

“다시 만나면 얘기해 줘. 내가 가진 것 중에 너를 가장 귀하게 여길 때.”

붉은 머리 여자는 암흑을 향해 걸어가다가 뒤돌아 아무스에게 말했다.

“같이 불길을 견뎌야 하는 삶 말고, 우리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같이 행복해지자. 아무스.”

여자는 그대로 암흑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와 동시에 검은 공간 역시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눈을 뜬 아무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커다란 나무 아래 시원한 그늘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꿈이었을까? 정말 다 꿈이었을까?

누군가 다녀간 기척도 없었고, 날개 아래의 역린도 멀쩡했다.

하지만 발톱이 뽑힌 상처는 남아 있었다.

정령들은 평소처럼 노래하고 있었다.

‘예뻤어.’

‘날 바라봐 주던 그 눈빛’

‘날 불러 주던 그 목소리.’

‘다, 다 그 모든 게 내겐 예뻤어.’

‘더 바랄 게 없는 느낌. 오직 너만이 주던 순간들.’

‘다 다 지났지만 넌 너무 예뻤어.’*)

유난히 시끄러운 정령들의 노래를 무시하고 용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붉은 머리 여자가 찾아왔던 게 현실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어 용은 귀를 닫고 상념에 잠겼다.

붉은 머리 여자.

나의 작은 산.

흉터가 있는 너.

흉터가 없는 너.

내가 하지 못한 말.

우리의 숨바꼭질.

꿈이어도 좋았다. 만약 산이 다시 태어난다면 그렇게 태어나겠지 싶었다.

그날부터 용은 매일 연습했다.

‘말을 곱게 해. 좀 사근사근하게. 경계심 안 가지도록.’

응. 예쁘게 말해야지. 다시 만났을 때 네가 나를 못 알아봐도 무서워하지 않도록.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그때는 진짜 아껴 줄 거야. 완전 소중하게 여기고, 내가 가진 것 중에 제일 귀한 것처럼 아낄 거야.’

응. 나도 너를 내가 가진 것 중에 제일 귀한 것처럼 아낄 거야. 나는 네 보물 중에서 제일 소중한 게 될 거야.

‘같이 불길을 견뎌야 하는 삶 말고, 우리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같이 행복해지자.’

응. 기다릴게.

죽어 버린 나비가 다시 태어나 용의 심장 안에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용은 그들이 매일 만났던 산으로 돌아가 그녀를 기다렸다.

꿈에서처럼 붉은 머리칼을 가지고 태어나서 다시 올까?

갈색 머리로 태어나도, 검은 머리로 태어나도 알아봐야지.

어쩌다 흉터가 생겨도 또 침울해지지 않게 매일 말해 줘야지. 너는 강하다고. 너는 어떤 시련도 이겨 낼 수 있는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무스는 인간들과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언덕으로 내려가 인간처럼 옷을 입고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가끔 인간들이 말을 걸어올 때도 있었다.

“여기서 매일 뭘 해요?”

“……친구를 기다리고 있어. 오랫동안 못 만났어.”

시간이 많이 흘러 다른 인간의 모습으로도 변신할 수 있게 되었다.

혹여 인간들이 의심할까 봐 몇 년에 한 번씩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더 큰 도시로 나가기도 하고, 대륙을 건너가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곳을 가든 호기심 많은 인간들은 같은 것을 물어 왔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좋아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기로 했어.”

“젊은이. 매일 뭘 그리 기다리는 거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다. 꼭 돌아오기로 약속했어.”

“그렇구먼.”

시간이 더 많이 흐른 뒤, 그가 머물렀던 어느 언덕에는 전설이 하나 생겨났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언덕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아무스는 인간들의 소문을 듣고 조금 비웃었다.

재회의 언덕이라니. 정작 저가 기다리는 이는 몇백 년이 지나도 오질 않는데.

“……거짓말쟁이. 산, 너는 아주 나쁜 거짓말쟁이야.”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지. 너 없이 겪은 두 번째 성장통은 기약 없는 기다림의 고통에 묻혀 아픈지도 모르게 지나가 버렸는데.

두 번째 성장통이 끝나자 붉은 머리 여자가 했던 것처럼 허공에서 공간을 열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를 지나다니며 여자의 흔적을 찾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붉은 머리칼의 그녀를 찾지 못했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붉은 머리 여자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포기하지 마.’

그런데 있잖아. 낮은 하얗고, 밤은 검어서 자꾸만 네 생각이 나.

네 왼쪽 눈은 새하얗고, 오른쪽 눈은 온통 새카매서 내 마음은 온종일 너로 꽉 차 있었는데.

이제는 온종일 외롭다.

흰 낮과 검은 밤은 질리지도 않고 계속됐다. 죽지 않는 한, 이 희고 검은 외로움도 영원히 반복되겠지.

완전한 성체의 모습을 한 검은 용은 결국 제 수명 1,000년을 갈아 넣어 생명력을 마력으로 바꿨다.

성체 용의 1,000년은 어린 용의 1,000년보다 훨씬 무거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번엔 소원을 비는 게 아니라 이 세계 전체에 주문을 걸었다.

‘두 번째 생을 살며 두 개의 이름을 갖고 태어난 자들은 내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들 중 용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용의 힘을 가지며 그와 연결된다. 생과 사를 함께한다.’

함께 살고, 함께 죽자. 산.

이젠 너만 죽게 하지 않을 거야.

마력을 갖고 태어나면 내가 널 쉽게 찾을 수 있겠지.

그리고 네가 내 이름을 부르면 내가 널 찾아가는 거야. 네가 말했던 것처럼.

그런 다음에 우리 행복해지자.

내가 너의 용이 될게. 너는 내가 살아갈 나의 산이 되어 줘.

용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수명을 빼내어 주문을 걸어 버린 탓인지 몸에 기력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쩌면 쏟아부은 수명이 1,000년을 훨씬 뛰어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남은 수명이 얼마든 상관없었다. 자신이 어찌 되든 다시 혼자 남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용은 그렇게 긴 잠에 빠져들었다.

* * *

온 세상에 수명을 내버리듯 쏟아 넣어 주문을 걸고, 잠에 빠져 버린 반쪽 용의 소문이 퍼졌다.

다른 용들은 대부분 검은 용을 비웃었다.

하찮은 인간을 사랑하다가 용의 힘마저 인간에게 나눠 줘 버린 어리석고 아둔하기 짝이 없는 반푼이라 욕했다.

그러나 주문의 힘 덕인지 검은 용이 머물던 대륙에서 용의 마력을 지닌 마법사들이 많이 태어나자 용들은 생각을 바꿨다.

자연의 힘이 아니라 용의 마력을 지니고 태어난 마법사들은 본인의 강한 힘을 용 덕분이라 생각하며 자연스레 용들을 숭상했다.

용을 신으로 받들고, 용을 위한 제단을 만들어 모셨다.

황제도 왕도 아닌 오로지 용만이 가장 존귀한 존재라고 믿었다.

몇몇 용들은 인간들의 추앙심을 즐겼지만 서대륙 마법사들의 신앙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법사들은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 버리거나 어느 날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그뿐 아니라 용들 역시 돌연히 죽어 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 용들에게 죽음은 낯설기 그지없었는데 겨우 몇백 년 만에 수십 마리의 용들이 죽어 나갔다.

그로 인해 손에 꼽을 만큼의 용들만이 남았다.

산 깊은 곳에 살며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았던 그들은 다른 용들과 마법사들의 이야기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보금자리에도 누군가가 찾아왔고, 그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 남자는 용들을 죽이기 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검은 용이 잠든 곳을 아나?”

깊은 산에서 오랜 시간을 자고 있던 용이 알 리 없었다.

아름다운 붉은 용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검은 용이 한두 마리도 아닐뿐더러, 살아 있다 한들 교류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아나. 그나저나 인간 같은데 여긴 어떻게 왔지?”

붉은 용의 질문을 무시한 남자는 작게 주문을 외웠다.

“로 마하탐.”

“들어 본 적 없는 주문인데. 무슨 말이지?”

질문을 하는 붉은 용은 제 몸이 초록색 화염에 감싸여 죽어 가고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붉은 용은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다 서서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싸늘하게 식은 용의 사체에서 마력을 뽑아 제 몸에 흡수한 남자는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용의 사체를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라진 마을의 이름이다.”

서대륙의 마법사들은 막강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모두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로 마하탐.’이 복수를 위한 주문이라는 이야기가 퍼지자 남자는 큰 소리로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이윽고 검은 용을 제외한 모든 용을 죽인 남자는 마법을 이용해 용이라는 존재 자체를 인간들의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실존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못하도록.

‘네놈 때문에 폐허가 되어 버린 내 고향처럼.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가 버린 내 부모 형제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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