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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143/192)

143화

산이 그렇게 떠나고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큰비가 내렸다.

‘흥. 축제고 뭐고 다 쓸려 내려가 버리라지.’

혼자 남은 용은 동굴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빗소리만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도 빗물 소리 가운데에서 산의 당찬 발걸음이 들리지 않을까 하며 청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다 문득 다신 오지 않겠다고 말하고서 떠난 산이 야속해 머리를 흙 속에 파묻고 깊은 잠을 자기도 했다.

다 자란 용은 마음먹으면 1,000년까지도 잔다는데, 왜 나는 깊이 잠들지 못할까.

잠에서 깨어나면 하루가 지났는지 이틀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산이 오지 않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동굴에 발자국이라고는 없고, 산에서 산이 흥얼거리던 콧노래가 바람을 타고 흐르지도 않으니까.

한번 가지를 흔든 바람은 나무 사이를 지나 동굴 바로 앞까지도 흘러오는데, 그곳에서 산의 체향이 묻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따라갈 걸 그랬나.’

용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시끌벅적한 인간들 틈에서 살 자신은 없었다.

비가 그치고도 산은 다시 오지 않았다.

정말로 영영 가 버렸나, 싶어서 확인하러 내려가 보고 싶었다.

산이 갖다준 옷이 있으니 그걸 입고 인간 행세를 하며 내려가면 될 텐데.

……하지만 눈은 어쩌지?

‘네 눈은 꼭 보석 같네. 샛노랗고, 여기 가운데 까만 부분은 길쭉하게 찢어져 있잖아.’

‘인간들은 안 그래? 네 눈은 하나는 하얗고 하나는 까매서 안 보여.’

‘나도 다른 사람들 눈을 자세히 본 적은 없는데 아마 너처럼 생기지도, 나처럼 생기지도 않았을걸.’

‘그럼 난 인간인 척하긴 글렀네.’

‘됐어, 그런 거 뭐 하러 해.’

깊은 동굴 속에서 용은 몸을 웅크리고 생각했다.

나랑 똑같이 인간을 싫어했으면서.

왜 나랑은 다르게 인간들 틈에서 살고 싶어 했을까.

너는 뭘 향해 간 거야?

산을 보지 못한 채 꽤 많은 날이 흘렀지만 가슴의 독은 빠지지 않았다.

여전히 산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고, 후회됐고, 야속했고, 미웠고, 그래도 보고 싶었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헤집는 바람이 되고 싶었고, 폭포 아래에서 제 목소리가 들리냐며 꽥꽥 소리를 지르다가 웃을 때 튀어 오르던 물방울이 되고 싶었다.

너의 산이 되어 너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이게 외로움이구나.

용은 재빠르게 인간으로 변해 옷가지들을 챙겨 들었다.

마구잡이로 옷을 입은 뒤 산길을 미친 사람처럼 헤집으며 내려갔다.

신발이 없었지만 산의 말로는 빈민가의 사람들 중에선 신발이 없는 이들도 많다고 했으니까.

산이 그랬던 것처럼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산의 냄새를 쫓아가자.

그러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산을 만나면 못된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너를 믿는다고 말해 줘야지.

벌써 산을 만난 것만 같아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그런데 오늘따라 산이 용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 같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나무가 안이 허옇게 텅 빈 채로 쓰러져 있질 않나, 죽은 사슴 사체에 발이 걸려 땅을 구르기도 했다.

“……이상하다.”

용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비가 멎은 지 오래인데도 산새 우는 소리가 없다.

웅덩이마다 짐승들이 모여 노래하고, 목을 축이는 생명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산 아래쪽에서부터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울음소리를 닮은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수많은 사람들이 산을 올라오고 있었다.

휘이이이―

아아아아―

하이아악―

흐어어어―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치 짐승을 몰아내기 위한 몰이꾼들의 소리 같기도 했다.

온 산이 인간들이 만들어 낸 소리로 가득 찼다.

용은 아래를 향해 내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커다란 나무 뒤로 숨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한두 명이 아닌 듯 인간들의 휘파람 소리와 곡소리는 화음이 맞지 않는 오케스트라처럼 웅장하게 들려왔다.

곧이어 인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일 앞에 선 인간 여자는 화려한 색채의 옷을 입고 두 팔을 앞으로 내민 채 휘젓듯 걷고 있었다.

높은 곡조의 휘파람 소리는 그녀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용은 그들의 뒤를 쫓았다.

한참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던 그들은 거대한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멈춰 섰다.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모두 섞여 있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눈 아래에 흰 천을 덮어 코와 입을 가리고 있었다.

여러 색의 천을 덧대 만든 옷감을 옷에 걸친 여자가 나무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다가 뒤를 바라봤다.

그러자 우르르 뭉쳐 있던 인간 무리가 좌우로 갈라졌다.

제일 뒤에 서 있던 남자 무리가 들고 올라온 큰 덩어리를 나무 아래에 쿵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이놈들! 조심히 다뤄야지! 귀한 제물이다!”

여자의 노기 띤 음성에도 남자들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린 그들은 재수 옴 붙었다는 듯 덩어리를 들고 온 팔을 탈탈 털고는 행렬의 구석으로 돌아갔다.

화려한 옷의 여자는 그들을 한 번씩 흘기고는 이내 신경을 끄고 나무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산의 주인이시여!”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오오.’ 하는 신음을 흘리자 여자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더 커졌다.

백발이 성성한 노파임에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당신께서 지켜봐 주신 우리 마을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사람들이 매일매일 죽어 나갑니다! 산의 주인님께 젊고 고결한 여자의 피를 바치노니 부디 재앙을 멈춰 주시옵소서!”

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커다란 북소리가 쿵쿵 울렸다.

나팔도 정신없이 온 사방을 향해 울려 댔다.

어느새 무릎을 꿇은 사람들이 커다란 나무를 향해 빌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북소리를 따라 용의 심장 또한 뛰기 시작했다.

‘전염병이라니. 산은 어디 있지?’

여기 모인 이들 중에는 산이 보이지 않았다.

산의 아름다운 갈색 머리와 머리를 칭칭 둘러맨 연한 베이지색 천도 보이지 않았다.

용은 나무 뒤에 숨어서 열심히 살펴봤지만 산의 모습을 조금도 찾지 못했다.

결국 그는 나무 앞에서 콩콩 뛰며 춤을 추는 여자와, 무릎을 꿇고 빌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마을까지 내려갔다.

전염병이 돌고 있다면 산에게 마을은 위험했다.

전염병이 지나갈 때까지만이라도 좋으니 동굴에서 살자고 할 작정이었다.

마을에 도착한 용은 가장 가까이 있는 집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집들은 창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을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대부분의 어른들이 산으로 올라갔기 때문인 것 같았다.

용은 골목들을 전부 누비며 산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애썼지만 마을에서 풍기는 지독한 인간들의 생활 냄새 속에서 산의 체취를 느끼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러던 중 어떤 집의 문이 삐걱 소리와 함께 열렸다.

보자기로 온몸을 둘러싼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산!”

용이 그의 몸을 돌려세웠다.

놀라 돌아본 이의 두 눈은 황갈색이었다.

“아…….”

산이 아니라는 걸 깨닫자 용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황갈색 눈을 가진 이는 용을 물끄러미 보다가 두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산의 주인이세요? 신이에요?”

“아니……. 아니, 난…….”

용이 우물거리는 사이, 앳된 청년은 보자기 매듭을 풀고 땅에 내던지더니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뜯어내듯이 빠르게 벗겨 냈다.

청년의 얼굴 전체엔 붉은 반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밖으로 오돌토돌하게 올라온 붉은 반점은 마치 피딱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청년은 손에 들고 있던 약 바구니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무릎을 꿇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그의 외침을 들었는지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창문을 열고 밖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얼굴과 몸을 붕대로 감고 있었다.

비교적 건강한 인간들은 코와 입만을 가린 채 모두 산으로 올라간 것이 분명했다.

인간들의 술렁거리는 소리가 용의 귓가로 들려왔다.

“산의 주인이야? 왜?”

“저 눈을 봐. 반짝반짝 빛이 나잖아.”

“지금 제사장이 산으로 올라갔는데 왜 내려오신 거지?”

“제사장은 무슨. 미친 할멈이지.”

“그래도 그 사람이 한 말이 틀렸던 적은 없잖아.”

“아니, 그래서 신이 왜 내려온 거야?”

“우릴 도우러 오신 거 아니야?”

“진짜로 젊은 여자의 피를 바쳐서 그런가 봐.”

“우리도 가자.”

“가자!”

인간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우르르 집 밖으로 뛰어나와 용의 근처로 몰려들었다.

“오, 오지 마!”

붕대를 한 인간들이 한꺼번에 뛰쳐나와 용을 둘러쌌다.

무릎을 꿇은 그들은 용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병을 낫게 해 달라 빌었다.

“제발! 우리를 낫게 해 주세요!”

“더 이상 사람이 죽어 나가지 않도록 해 주세요!”

“우리 딸이 죽어 가고 있어요!”

“저는 죽어도 괜찮으니 제 아내만이라도!”

용은 그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산이 없었다.

“산은?”

“예?”

“산은 어디 있지? 허리까지 오는 긴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마른 여자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좋아하고, 모르는 약초가 없어. 손은 거칠지만 꽃반지나 화관 만드는 걸 잘해. 늘 빠르게 걸어서 신발 밑창이 자주 떨어지고, 생각할 때면 눈을 아래로 내리까는 습관이 있어.”

상세하게 산의 특징들을 설명했지만 이 인간들은 소녀를 모르는 것 같았다.

다들 고개만 갸웃거릴 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산. 너희가 작은 산이라고 불렀었다고 들었어.”

“아? 걘가? 산 타는 애.”

덩치 좋은 인간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호기롭게 산을 설명했다.

“신이시여. 혹시 찾으시는 산이라는 여자가 흉측한 돌멩이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고, 늘 낡은 천으로 몸을 감싸고 있으며, 한쪽 눈은 멀어서 희멀겋고, 항상 풀뿌리 같은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그 비렁뱅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용이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분노에 바들바들 떨고 있을 때였다.

산에서 내려온 인간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왜 다들 무릎을 꿇고 있어!”

“제사장님! 산의 주인님이십니다! 눈이 빛나고 있어요!”

사내의 말에 제사장이라는 백발의 노파가 환한 미소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오오, 위대하신 산의 주인이시여. 이곳까지 살펴보려 오셨군요.”

사내는 거드럭대는 미소마저 보이며 말을 붙였다.

“제물을 찾고 계셨습니다. 전염병의 원인이 된 그 여자를 처단하는 게 역시 맞았던 건가 봐요.”

용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주변에 무릎 꿇은 인간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그들은 모두 제각기 붉은 피딱지를 몸에 달고서 신성한 존재를 바라보듯 용을 올려다봤다.

“……산을 죽였나?”

“주인께서 찾으시는 그 계집아이는 제 운명에 순응하고.”

“산을 죽였어?”

“비루하게 태어났으나 갈 때는 모든 이들의 염원을 가슴에 품고 마을의 무사 평안을 빌면서…….”

용은 참지 못하고 노파의 멱살을 잡아 올려 다시 물었다.

“마지막이다. 산을 죽였나?”

“커, 크헉! 산, 산이라면…… 당신께서 돌보시는 산은 저기 그대로 있는데……. 우리가 제물로 바친 것은, 전염병을 옮기고 다닌, 크헉! 계집으로, 커헉! 그 병균이 별안간 축제에 나타나 쏘다니니 갑자기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서, 큽!”

용은 노파를 바닥에 내던지고 다시 인간들을 살펴봤다.

어떤 죄책감도 보이지 않는 이기적인 눈이었다.

심장이 불타오르는 기분에 용은 그대로 날개를 꺼내 날아올랐다.

인간인 상태에서 날개를 꺼내고, 공중에서 용으로 변한 것은 처음이었다.

“오오! 역시 산의 주……!”

노파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용이 뿜는 불꽃에 그대로 불타 죽고 말았다.

“꺄아아악!”

사람들이 사방팔방으로 도망치며 비명 소리가 온 마을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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