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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140/192)

140화

가슴 한구석이 콕콕 찔려 왔지만 용은 이내 몸을 돌려 늘 웅크려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어차피 인간이었다.

몇 년쯤 지나면 용을 만났었다는 사실조차 까먹고 살겠지.

동굴 안이 쓸데없는 풀 냄새로 가득 찼다. 평소처럼 꼬리 안에 머리를 파묻은 채 잠을 자려고 했지만 인간으로 변한 탓에 꼬리가 없었다.

용은 흙바닥 위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소녀의 말대로 흙은 차가웠고, 동굴 안은 어두웠다.

게다가 은은하게 풍기는 풀 냄새 때문에 도무지 잠이 오지가 않았다.

얼마 뒤 익숙한 고통이 또다시 온몸을 뒤덮자 용은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거렸다.

하지만 그는 주변에 널브러진 약초만큼은 먹지 않았다.

성장통을 감내해야 진정한 용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건 둘째 치고, 소녀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용은 몇 개의 낮과 또 몇 개의 밤이 지나는 동안 용으로 변했다가 다시 인간이 되길 반복했다.

고통은 낮도 밤도 없이 어린 용을 괴롭혔다.

그런 와중에도 흙바닥에 널브러진 약초 냄새는 약해지지도 않고 그대로였다.

이상했다.

약초의 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동굴의 이끼 냄새만 할까.

양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자꾸만 그 냄새가 코를 콕콕 찔러 왔다. 게다가 가방을 내던지고 간 건방진 소녀의 뒷모습이 눈꺼풀을 닫아도 열어도 자꾸만 생각났다.

……가방?

그래. 가방과 바구니를 두고 갔으니 다시 찾아올지도 몰라.

용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구니만 동굴 밖에 던져두는 거야. 걔가 다시 올지도 모르니까.”

인간의 몸으로 변한 상태로 손을 이용해 바구니와 가방을 주워 든 그는 동굴 입구를 향해 다가갔다.

그런데 용일 때와 달리 입구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두 발로 일어나 걷는 것도 처음이라 다리가 휘청거리는데 이 높은 바위들을 타고 오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용은 소녀가 타고 내려왔던 나무줄기를 잡고 그녀가 했던 대로 두 발로 벽을 디디며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 쿵 떨어졌다.

“……뭐, 뭐야?”

걷는 것과 나무줄기를 잡고 벽을 타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용은 네 발을 이용할 때처럼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여 다시 도전해 봤지만, 용일 때와 인간일 때의 근육 움직임은 확연히 달랐다.

두어 번의 실패를 더 겪고 난 후 용은 바구니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됐어. 다음에 용일 때 올라가면 돼.”

혹여 잠들어서 때를 놓칠까 봐 용은 벽에 몸을 기대앉아 용이 되길 가만히 기다렸다.

몇 번 겪다 보니 변신할 때의 감각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성장통을 며칠만 더 겪으면 스스로도 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머니 용이 있었다면 다른 생명체로 변하는 걸 더 빨리 배웠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어머니는 인간이었다.

수컷 용들은 자기 짝이 아닌 용들을 모두 독립적 개체로 보는 성향이 강했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적에나 몇 번 봤던 아버지 얼굴은 이젠 기억나지도 않았다.

“됐어. 혼자서도 할 수 있어.”

용은 고통에 정신을 잃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지만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다.

결국 참지 못하고 소녀가 따다 준 약초를 집어 들어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괜찮아. 걔가 씹어서 먹여 준 게 아니고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집어 먹은 거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스스로와 타협한 용은 잠시 후 전신에 미묘한 열기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

고통이 덜하니 몸의 감각들이 조금 더 생생했다. 어린 용은 이 느낌을 잊지 않으려 열심히 머릿속에 손끝, 발끝에서 느껴지는 세밀한 감각과 이 순간의 공기를 새겨 넣었다.

잠시 후 온몸이 검은색 비늘로 덮인 용이 바구니와 낡은 가방을 입에 문 채 동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 입구에 바구니와 가방을 던진 용은 누가 볼세라 냉큼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지가 두고 간 건 밖에 다 던져 놨으니 다신 안 들어오겠지.”

용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잠들었다.

눈을 떠 보니 또 환한 낮이었다.

“……그 인간 또 온 거 아냐?”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동굴 안은 조용했다.

마침 용인 상태라 그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어가 동굴 밖을 살폈다.

어제 던져둔 바구니와 가방이 그대로 있었다.

“하! 꼴에 화났다고 이 근처로는 발길도 안 하나 보군.”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간 용은 신경질적으로 흙을 발로 차며 제가 누울 자리를 정돈하다가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약초들에 시선을 던졌다.

“……화가 많이 나서 안 오나?”

용은 다시 동굴 밖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여전히 인기척은 없었다.

‘가방이 낡아서 내 집에 버리고 갔나?’

‘그런 거면 진짜 가만 안 둬야지.’

‘……발목 상태가 더 안 좋아져서 깊은 산까지는 못 올라오는 건가?’

용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구니와 가방을 다시 입에 물고 동굴 주변을 벗어났다.

조심스럽게 움직여 산 중턱 부근에 바구니와 가방을 던져 놓고, 사냥꾼에게 쫓기는 작은 사슴처럼 오도도 뛰어서 다시 동굴 안으로 쏙 숨어 버렸다.

“아. 날아올걸.”

아직 성체만큼 몸집이 크지 않으니까 나무 사이로 날아도 안 들켰을 텐데.

“……뭐, 됐어. 다들 산짐승인 줄 알 텐데.”

용은 몸을 세우고 동굴 입구 밖으로 머리를 반쯤 내놓은 채 계속해서 산의 인기척을 살폈다.

“……발목이 많이 안 좋은가? 아니야. 방금 산 중턱에 던져뒀으니 곧 찾아가겠지.”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산의 흐름을 읽어 보려 했다.

산을 다스리는 용이라면 다들 할 줄 아는 것인데 검은 용은 아직 너무 어리고 가르쳐 준 이가 없어 잘하지 못했다.

용은 지금만큼 그 능력이 아쉬웠던 적이 없었다.

그런 능력쯤이야 숱한 세월 속에서 저절로 터득하는 거라 생각하고 여태까지는 신경 끄고 살았는데.

지금은 소녀가 바구니와 가방을 들고 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게 아니면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인간들의 냄새는 온갖 것들과 섞여 있어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걔가 그걸 들고 가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용은 초조하게 숲을 살피던 노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곤 전보다 더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고통이 찾아들 때마다 그 여자애가 생각났다.

어머니와 살 때는 인간이 짐승을 낳았다는 이유로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었고, 산으로 들어온 이후에는 반쪽 용이라고 무시당했다.

그래도 용은 원래 고고하고 우아한 존재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그 시간들을 견뎌 왔는데.

용은 흙을 파고 그 안에 머리를 파묻었다.

“……외롭지 않아. 하나도 외롭지 않아.”

이틀 뒤, 용은 인간의 몸으로 가까스로 동굴을 오르는 것에 성공했다.

수십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어쨌든 해내고야 말았다.

소녀가 가방을 들고 갔는지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제힘으로 용으로 변하는 것보다 나무줄기를 잡고 벽을 오르는 게 더 빠르게 성공할 것 같았다.

예상은 맞았다.

“와! 올라왔다!”

어머니가 있었다면 박수 쳐 줬을 텐데.

용은 소녀의 힘찬 걸음걸이를 떠올리며 바위 사이를 날래게 뛰어 산 중턱까지 내려갔다.

‘가져갔을까? 내가 거기까지 내려가서 두고 온 걸 알아차렸을까?’

마침내 산 중턱에 다다랐다.

……바구니와 가방이 그대로 있었다.

“젠장.”

용은 바구니와 가방을 들고 다시 산을 올랐다. 산을 내려올 때보다 몇 배나 느린 속도였다.

용은 조금은 울적한 얼굴로 안이 텅 빈 가방을 힐긋 내려다봤다.

“……비어 있어서 안 가져갔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용은 낭떠러지 사이에 핀 귀한 꽃과 약초, 뿌리가 깊이 뻗어 있어 아무나 캐지 못하는 나무뿌리, 바위를 들어내야만 찾을 수 있는 버섯 등을 찾아 바구니와 가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걸 동굴 입구에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용은, 키가 작은 소녀가 보지 못하고 지나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았으니 동굴의 위치를 까먹었을 수도 있었다.

가방과 바구니를 어디에 두면 좋을까 생각하며 용은 동굴 근처를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이젠 인간일 때의 걸음걸이도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소녀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문득 고개를 쳐든 용의 두 눈에 나무 꼭대기가 보였다.

“저기에 가방을 걸어 두면 멀리서도 잘 보일 테니까 동굴을 금방 찾겠지.”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근데 저기에 걸어 두기 위해 용으로 변하려면 또 잠이 들든가, 성장통을 겪어야 하는데.

잠든 사이에 걔가 오면 어쩌지.

결국 용은 세월에 맡겨 두기로 했던 변신까지 연습했다.

동굴을 타고 오르는 것보다 힘들었지만 어쨌든 하루를 꼬박 지새우고 나서야 성공했다.

용은 두 발로 서서 커다란 나무 꼭대기에 바구니와 가방을 걸어 뒀다.

“꽃향기와 약초 냄새를 펄펄 풍기는 데다가 눈에 띄는 높은 곳에 있으니까 분명 찾아오겠지.”

용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가 다시 나왔다.

“너무 높나?”

조금 더 아래쪽의 나뭇가지에 걸어 두고 그는 다시 동굴로 들어갔다.

……또 나왔다.

“여기까지 오는 길을 까먹은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안 올 리가 없지. 사과라도 받으러 올 성격인 것 같았는데.”

용은 동굴 안에 잔뜩 있는 진통 효과를 가진 약초들을 동굴 입구에서부터 산 중턱까지 조금씩 흩뿌려 두었다.

짐승에게 미끼를 던지듯 해 뒀으니 아무리 사회화가 덜 된 인간 여자애라도 잘 찾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혹시나 저가 남겨 놓은 흔적을 밟아 뭉갤까 걱정된 용은 일부러 산을 빙 둘러서 동굴로 돌아갔다.

또다시 낮과 밤이 지나는 동안 성장통이 조금씩 미미해지는 게 느껴졌다.

괘씸한 인간 여자애는 오지 않았다.

“……건방지긴.”

용은 적어도 100년이 지날 때까진 절대로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며칠 뒤, 누군가가 빠르게 나무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용은 얼른 두 눈을 떴다.

그 여자애였다.

다시 만났을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여러 번 상상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또 오냐, 넌 자존심도 없냐, 인간이면 인간들의 세상에서 살아라, 내 보금자리에 들어오지 마라, 네가 두고 간 쓰레기 같은 가방이나 챙겨 가라, 약초 냄새 때문에 코가 막힐 지경이다 등등.

하지만 용은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소녀가 놀란 눈으로 달려오며 빠르게 말을 던졌다.

“너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어? 으, 응.”

목소리가 너무 낮진 않나? 너무 들뜬 것처럼 높게 들리진 않나? 방금 말을 더듬었는데 바보같이 보였을까?

용은 제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소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다행이다.”

그 순한 얼굴을 보고서야 용은 머리를 휙 반대쪽으로 돌리며 조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 숨을 쌕쌕거리는 걸 보니 바닥에 흩뿌려진 약초를 보고 누가 뺏을까 싶어 뛰어왔나 보군. 약초꾼이든 사냥꾼이든 누가 몇 명이 오든 날 해할 수는 없다.”

“약초? 무슨 소리야.”

“……그럼 왜 왔는데.”

용은 꼬리로 바닥을 쿵쿵 치며 되물었다.

소녀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동안 발 아파서 산에 못 오르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여기에 엄청 큰 산짐승이 나타났다고 하더라고. 커다란 나무가 몇 개씩이나 줄줄이 넘어가고 그랬대. 게다가 발톱 자국이 어찌나 큰지 웬만한 용 뺨친다던데. 용은 산 밑으로는 잘 안 내려오니까 넌 아닐 테고. 너 몸도 안 좋아서 골골대는데 혹시 공격당했을까 싶어서 와 봤지.”

……그거 나 같은데.

바닥을 쿵쿵 내려치던 용의 꼬리가 움직임을 멈췄다.

용은 조심스럽게 머리를 돌렸다.

용에게 견줄 정도의 산짐승이라 판단했다면 제깟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텐데도, 이 멍청하고 건방지고 괘씸하고 나약한 인간은 동굴까지 찾아왔다.

“내가 걱정돼서 왔어? 바구니랑 가방 찾으러 온 거 아니고?”

“아, 맞다. 바구니랑 가방 줘. 나 약초 담아야 돼. 새로 살 돈 없어.”

“오면서 못 봤어? 바닥에 약초들도 못 봤어?”

“뛰어왔으니까 못 봤지.”

“……왜 뛰었어? 인간, 왜 뛰어 왔어?”

“엄청 아파 보였으니까 걱정이 되긴 해서……. 너 괜찮은 거면 이만 갈게.”

용은 온몸의 기운을 재빠르게 뒤바꿔서 인간으로 변했다.

소녀가 오지 않는 시간 동안 몇 번이나 제 의지로 변신했기 때문에 이제는 순식간에 변할 수 있었다.

검은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앳된 청년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앉았다 가.”

어렸던 용의 긴 성장통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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