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 * *
‘아주 먼 옛날엔 용들이 많이 살았대. 이름난 커다란 산마다 용들이 한 마리씩 살고 있었고, 그들 중 마음 약한 용들은 인간을 돕기도 했단다. 또 그들 중 극소수의 용들은 인간에게 반하기도 했지. 그러나 평생 단 하나의 반려만 맞이하는 용에게 인간을 사랑하는 일은 저주에 가까웠어. 인간은 너무 약해서 금방 죽어 버리잖니. 그럼에도 어떤 우둔한 용은 후회할 짓을 하고 말았단다. 소원을 빌 땐 용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거야. 그땐 그 용도 어렸거든.’
* * *
용과 소녀의 첫 만남은 우연이었다.
꽃과 약초들을 구하기 위해 산을 오른 소녀는 우연히 커다란 동굴을 발견했다.
정확하게는 발견했다기보다는 걷다가 발을 헛디뎌서 그곳으로 굴러떨어졌다.
동굴 벽에 머리를 부딪친 소녀는 그대로 기절해 몇 시간 후에야 깨어났다.
“아이고 아파라…….”
머리를 부여잡은 채 끙끙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허연 달빛에 의지해 손을 더듬어 가며 주변을 살펴보니 하루 종일 산을 돌아다니며 구한 약초들이 엉망으로 뭉개져 있었다.
소녀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악! 내 약초! 내 꽃! 여긴 또 어디야!”
“시끄러워.”
“악!”
소녀 말고도 다른 누군가가 동굴 깊은 곳에 있는 듯했다.
끙끙대는 신음 소리가 계속해서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거기 누구 있어요?”
“……꺼져. 인간.”
“아니, 무슨 지는 인간 아닌 것처럼 말하네.”
한껏 빈정거린 소녀의 옆으로 새하얀 불꽃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악! 깜! 짝……이야.”
불꽃이 지나간 자리에 있던 바위들이 조명처럼 발광하기 시작했고, 소녀는 그제야 동굴 안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온몸이 시커먼 비늘로 덮인 커다란 용이 이를 악문 채 소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보석처럼 빛나는 노란 눈이 번뜩였다.
“……나가.”
용이 인간의 말을 하며 소녀를 매섭게 째려봤다.
까드드득.
그의 길고 날카로운 발톱이 땅을 긁는 소리가 괴이하게 동굴을 울렸다.
“저기요. 다, 다치, 다친 것 같은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소녀의 앞으로 휙 날아든 두껍고 단단한 꼬리가 땅을 내려쳤다.
쾅 소리와 함께 눈앞에 뽀얀 흙먼지가 일었다.
“너 같은…… 어린 인간이 들어올 산이 아니니까 꺼지라고.”
소녀도 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발목을 삔 터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 발목을 다쳤는데요.”
“알 바 아니야. 꺼져.”
이 용 싹수가 멸종했나?
보통 인간이었다면 벽을 기어올라서라도 동굴을 빠져나가려 발버둥 쳤겠지만 소녀는 그러지 않았다.
여태 살아왔던 경험을 토대로 판단해 보건대, 도망치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심지어 손해를 보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소녀는 굳이 상대방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면, 최대한 배려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그녀는 땅에 떨어진 약초들 중 진통 효과가 있는 것을 손에 쥐어 들고는 입에 넣어 꼭꼭 씹으며, 용의 말도 꼭꼭 씹었다.
“나가란 말 안 들려?”
“말할 힘 있으시면 이거 씹으세요. 고통에 둔감해지게 해 주거든요. 어디 아프신 거 같은데.”
소녀는 팔꿈치로 바닥을 기어 다니며 약초를 주워 멀리 떨어져 있는 용에게 던졌다.
“들짐승 취급 하는 것도 아니고…… 감히 풀때기를 던져?”
이를 갈며 말하는 용을 보고도 소녀는 겁먹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멀어서요.”
“나가란 소리 안 들려? 내가 몇 번을 더 말해야 알아들을 거지?”
“불쾌하신 건 알겠는데 제가 지금 발목을 다쳐서 동굴 벽을 타고 오르는 건 불가능해요. 아마 반도 못 올라가서 떨어질걸요. 이렇게 볼품없이 마른 인간을 드시는 취미가 있으신 게 아니면 며칠만 참아 주세요. 발목만 멀쩡해지면 이 정도 높이는 거뜬하니까.”
소녀의 말본새를 보아 하니 설득하는 것도 무리일 것 같아 용은 포기하고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길게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을뿐더러 용이 인간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로 봐선 사회화도 덜 된 모자란 인간 같았다.
몇 시간쯤 지났을까, 조용히 고통을 참고 있는데 소녀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너무 캄캄하고 추운데 아까 그 불 한 번만 더 쏴 주시면 안 될까요?”
“넌 나가라는 내 말도 안 듣는데 나는 왜 네 부탁을 들어줘야 하지?”
“……맞는 말이네. 알았다.”
갑작스레 들려온 반말에 용이 고개를 들었다.
“왜 반말을 하는 거지.”
“불도 안 쏴 주는데 내가 왜 존댓말을 해 줘야 하지?”
“……알았다.”
싸가지 없는 것.
용의 입장에서 보면 아까 태어난 것과 다름없는 아이가 반말을 하는 게 탐탁지 않았지만 타이를 기력도 없었다.
하지만 용과 달리 소녀는 다리를 다쳤으면서도 기운이 넘쳤다.
“화장실 어디야?”
“목마른데 저기 안에 흐르는 저 물 마셔도 되는 물이야?”
“먹을 건 없지? 용은 밥 안 먹나? ……아니야. 나 맛없어. 째려보지 마.”
소녀가 하도 떠들어 대는 통에 아픈 것도 까먹을 정도로 짜증이 치솟았다.
“입 좀 다물고 있을 순 없나?”
“그럼 화장실 어딘지 말해 줘. 여기서 볼일 보면 너한테도, 나한테도 안 좋을 거 같단 말이야. 그리고 저 물 마셔도 돼?”
용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은 마셔도 되는 물이고…… 볼일은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해결해. 사방이 막힌 벽 같은 건 없으니까 투덜대지 말고.”
“알았어.”
한 발로 콩콩 뛰어 동굴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소녀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저건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이 망할 인간은 눈앞에 보이면 보여서 짜증 나고,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짜증이 났다.
“억! 나 이끼에 미끄러질 뻔했다!”
말하는 꼬라지를 보니 미끄러질 뻔하긴 했지만 다치진 않은 것 같았다.
“소리 들리면 어떡해! 동굴이라서 울리잖아!”
“좀 닥쳐!”
“……노래 불러!”
설마 나한테 말한 건가?
물론 이 동굴 안에는 저 시끄러운 인간과 저 둘밖에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면 용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할 리 없지.
용은 모른 척 조용히 눈을 감았다.
“빨리! 소리 울리잖아! 나 급하단 말이야!”
“……네가 불러! 이런 미친!”
“알았어! 듣고 웃지 마!”
소녀는 정말로 노래를 시작했다. 하도 큰 소리로 쩌렁쩌렁 불러 대는 통에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노랫소리는 소녀가 한 발로 다시 콩콩 뛰어오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았다.
소녀는 아까 앉아 있던 자리에 다시 앉고 나서야 노래를 멈췄다.
“나 노래 잘하지?”
대답할 가치도 없다 생각해 무시했다. 소녀 역시 대답을 원한 것 같진 않았다.
소녀의 콧노래 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그 뒤로도 소녀는 몇 번 더 볼일을 보러 갔고, 발이 부어서 아프다며 혼자 콩콩 뛰어가 물속에 발을 담갔다 오기도 했다. 가만 앉아 있는 꼴을 볼 수가 없었다.
“배가 고플 텐데 좀 노력해서 동굴 밖으로 나가 보지 그래.”
“괜찮아, 밖에서도 자주 굶어서.”
꺼지란 소린데 못 알아듣는구나. 눈치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이틀째 되는 날 밤, 용의 끙끙대는 신음이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풀 좀 씹어 삼켜. 아까 줬잖아.”
“신경 꺼.”
“네 끙끙대는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잖아.”
죽일까.
잠깐 갈등했지만 보금자리에서 먹지도 않을 것을 죽이는 게 더 손해 같아 그는 참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고통이 온몸을 좀먹듯 잠식해 와 용은 자기도 모르는 새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 보니 밖은 훤한 대낮이었고 몸을 불태우는 것 같던 격통은 잠잠해져 있었다.
그런데 입이 썼다. 그것도 이루 말할 수 없이.
“퉤. 퉤!”
“아우, 시끄러워. 왜 그래.”
“……뭘 먹인 거야.”
“하도 끙끙대길래 내가 풀 꼭꼭 씹어서 네 입에 넣었어. 아까보다 덜 아프지?”
“뭐?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왜 소리를 질러! 아프면 아프다고 지랄, 약 먹였더니 쓰다고 지랄! 어쩌란 말이야!”
“이 멍청한 인간!”
용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동굴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동굴이 흔들릴 정도의 괴성을 지르며 용은 앞발로 소녀의 온몸을 짓눌렀다.
“감히 내 성장통에 너 따위 하찮은 인간의 체액을!”
거대한 자신의 앞발에 가려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컥컥대는 이 어린 여자애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여자의 배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모욕을 들었는데 성장통을 겪는 와중에도 인간의 도움을 받다니.
“하! 너도 내가 반쪽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인간의 도움을 받아서 성장한 용이라는 꼬리표라도 달아 주려고?”
소녀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 구름이 움직였는지 동굴 안으로 환한 햇빛이 들이쳤다.
소녀의 얼굴 반쪽은 바위처럼 진한 회색빛을 띤 채 온통 울퉁불퉁하게 불거져 있었고, 왼쪽 눈은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용은 자기도 모르게 앞발에 힘을 빼고 살짝 물러났다.
겨우 공기를 들이마신 소녀가 콜록대며 용의 발톱 사이로 기어 나왔다.
“……누가 반쪽이라는 거야? 지금 뭐, 나보고 자기소개라도 하라고?”
동굴로 굴러떨어지며 옷이 찢어졌던 건지 너덜너덜해진 천 사이로 드러난 소녀의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회색 따개비들이 붙은 것처럼 몸 여기저기가 우둘투둘했다.
잠깐 말을 잇지 못하던 용은 이내 몸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곤 다시 온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끼어들지 마. 네 일도 아니면서.”
“아, 그래. 미안하게 됐다. 어둠 속에서 열심히 약초 찾은 것도 미안하고, 쓴맛 참고 꼭꼭 씹어서 입 안에 넣어 드린 것도 아주 미안하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용은 말없이 머리를 숙여 긴 꼬리 안에 집어넣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소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어설 힘 있으면 나 밖으로 보내 줘.”
“뭐야?”
“방금 화내면서 일어났잖아. 안 아플 때 나 좀 들어서 밖으로 보내 줘.”
소녀의 요구를 들어주긴 싫었지만 그렇게 해야지만 다신 안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용은 몸을 일으켜 소녀를 조심스레 물고 동굴 입구로 향했다.
밖으로 냅다 던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또 왜 나를 던졌냐며 온갖 난리를 부릴 것 같아 용은 그녀를 얌전히 땅에 내려 줬다.
소녀는 햇빛을 받아 빛나는 용의 샛노란 눈을 보며 물었다.
“……넌 언제까지 아픈데?”
“몰라. 꺼져.”
“하여간 오래 산 놈치고 친절한 놈을 못 봤어. 다 나 등쳐 먹을 생각뿐이지. 됐어. 간다. 올려 줘서 고마워.”
발목이 멀쩡했으면 동굴 벽을 거뜬하게 타고 올랐을 거란 말은 거짓이 아닌 듯, 소녀는 한 발로도 중심을 잡으며 거대한 바위 사이를 내려갔다.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용은 중얼거렸다.
“……미안.”
그는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고작 이틀 남짓인데도 사람이 있다가 없으니 그새 적막이 낯설게 느껴졌다.
한참 전에 죽어서 벌써 흙이 되고도 남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갑자기 떠올랐다.
‘너도 더 크면 외로움을 느낄 텐데, 그때 엄마가 없어서 어떡하지.’
하지만 그는 여태 봤던 용들에게서 그 어떤 외로움도 보지 못했다.
고결하며 우아한 자태 그 어디에도 외로움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모습은 없었다.
그에게 외로움은 가장 ‘인간다운’ 감정이었다.
반쪽 용은 늘 그래 왔듯 다시 꼬리 속에 머리를 파묻었다.
해가 넘어가는 오후가 될 즈음 다시 고통이 찾아오자, 용은 문득 소녀를 떠올렸다.
다시 볼 일은 없을 텐데,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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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결에 무슨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어우씨, 이게 뭐야.’
‘……왜 불쑥불쑥 커져? 이것도 성장기인가?’
‘덮어 둘 거 없나?’
이상하게 편안한 기분에 눈을 떠 보니 동굴이 유난히 넓게 느껴졌다.
화들짝 놀란 용이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비늘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저도 모르는 새 인간화했나 보다. 날개뼈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은 비늘과 똑같은 검은색이었다.
드디어 인간화까지 할 수 있게 됐구나.
기쁜 와중에 이질감이 들어 살펴보니 다리 사이에 바구니가 엎어져 있었다.
……설마 이 인간이 또?
“깼어?! 아까 눈앞에서 사람으로 변하길래 깜짝 놀랐네!”
동굴 입구에서부터 이어져 있는 긴 나무줄기를 두 손으로 잡은 소녀가 한 발로 벽을 콩콩 디디며 활기차게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입이 썼다. 또 약초를 먹인 모양이었다.
“미친 거야?! 여기가 어디라고 또 와?”
“어?”
볼품없는 낡은 가방을 멘 소녀는 놀란 듯 용을 바라봤다.
“……네가 사과했잖아. 미안하다며. 나 들었는데. ……그러면 우리 화해한 거 아니야?”
“자존심도 없는 멍청한 인간 같으니라고. 밖에 친구도 없나 보지? 인간도 아닌 나 같은 존재를 들여다볼 정도면?”
이전의 비아냥은 통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제대로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소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메고 있던 가방을 통째로 용에게 집어 던지고는 다시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갔다.
떨어진 가방 안에서는 고통을 덜게 해 주는 약초만 한가득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