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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136/192)

136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공간 안에서 아무스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평소처럼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을 건넨다거나 ‘젊은이. 나를 업어라.’라는 식의 농담도 하지 않았다.

디에르고는 제 손과 발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는 이 공간 안에서 앞서 걷는 아무스의 어렴풋한 인영만을 보고 따라 걸었다.

“……나의 공간이다. 그래서 나와 내 마력을 받은 이들만 이곳에서 길을 잃지 않지. 어렴풋이 빛이 나는 것도 그래서야.”

“그렇군. 만약 다른 이들이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나?”

“길을 잃고 헤매다 죽겠지.”

아무스는 디에르고의 호기심을 풀어 준 뒤 걸음을 재촉했다.

디에르고는 이상하게 긴장돼 주먹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사람을 죽여 본 경험은 질리도록 넘쳤다.

전쟁터에서 이 손으로 직접 벤 인간이 몇 명이던가.

인간의 배를 가르고 태어나, 인간의 음식을 먹고 자란 같은 인간들을 얼마나 수없이 죽여 왔던가.

죄책감으로 얼룩져 한 걸음 떼기조차 힘들었던 날들도 분명히 있었지만, 죄책감으로 얼룩질 여력조차 없어 적군을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여긴 적도 많았다.

그런 면에서 마물은 상대하기가 편했다.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죽이러 가는 것은 인간인지 인간이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디에르고는 숨을 가다듬으며 아무스에게 물었다.

“어떤 마법사들은 본인이 가진 마력을 천천히 운용시켜 오래 살기도 한다고 들었다. 이달론도 그런 방법으로 오래 사는 건가?”

그저 시커멓기만 한 공간 속에서도 아무스는 이달론이 남긴 행적을 쫓는 건지 주변을 둘려보며 답했다.

“그자는 인간이 아니다. 정확히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인간이길 포기한 자다. 그래도 내가 잠들기 전까진 시시한 편법을 쓰는 흔한 늙은이였는데, 내가 잠을 자는 동안 제대로 된 인간을 제물로 삼았나 보군. 자연의 힘을 훔쳐 쓴 걸로도 모자라 신체가 박살 났는데도 도망칠 수 있는 힘이 있는 걸 보면.”

아무스는 힐긋 뒤를 돌아봤다가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디에르고를 안심시키려는지 덤덤하게 말했다.

“금방 끝날 일이다. 네가 이성만 잘 붙잡고 있는다면.”

“이봐, 아무스. 이성을 붙잡는 게 내 의지만으로 되는 건지 모르겠군. 전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그자에게 조종당했지 않나.”

“이번엔 공격받을 거라는 예상을 하고 가는 거니 지난번과 달리 경계할 수 있겠지. 그러니 어떤 수작을 부려도 절대 현혹되지 마.”

한참 걸어가던 아무스의 걸음이 드디어 멈췄다.

뒤돌아선 아무스는 디에르고와 눈을 맞췄다.

노란 안광이 짙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뭐?”

“너의 불완전함을 마주했을 때 두려워하지 마라. 그거면 된다. 나머진 내가 해결할 테니.”

디에르고는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향하려는 아무스에게 물었다.

“……솔레아한테, 지윤이한테 이렇게 매달리는 이유가 뭔가.”

아무스는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나는, 온전하길 꿈꾸는 불완전한 인간이 된 것 같아. 늘 그랬지.”

“불완전한 인간이 된 것 같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데.”

“디에르고.”

용의 시선이 디에르고 너머, 두 사람이 걸어온 끝없이 펼쳐진 검은 공간으로 향했다.

“스스로가 더 이상 더할 것 없이 완전하다 느껴질 때가 찾아오면…….”

그는 멈춘 공기 속에서 추억을 더듬는 듯 살며시 눈을 감고는 말을 이었다.

“자네도 죽고 싶어질 거야. 매일, 매일. 아주 지겹도록.”

용은 이내 눈을 반짝 뜨고는 생기 있는 표정으로 디에르고를 내려다봤다.

“나는 살고 싶어. 나를 살게 해 주는 사람과. ……사랑을 하고 싶어.”

발갛게 달아오른 볼과 살짝 떨리는 눈동자, 목이 타는지 움찔거리는 울대,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 스민 다정한 미소.

세상에 홀로 남은 용은, 인간의 사랑을 꿈꾸고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아무스를 바라보던 디에르고가 별안간 눈을 질끈 감았다.

“……청혼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이달론이나 죽인 뒤에 지윤이한테 가서 해라. 내 앞에서 아양 떨지 말고.”

디에르고가 정색하며 말하자 아무스가 픽 웃었다.

“그레이가 자네 아들이 맞긴 한가 보군. 그레이도 자네도 내 얼굴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내게 꼬리 치지 말라고 했거든.”

‘……이 용이 내 딸도 모자라 아들까지?’

디에르고의 살의가 충전되었다.

이달론이 눈앞에 보이면,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불타오르는 이 살의로 그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디에르고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아무스는 곧장 검은 공간을 열었다.

울창한 숲이었다.

커다란 나무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솟아 있었고, 바위 곳곳엔 이름 모를 풀과 이끼들이 한가득 자라 있었다.

사방이 꿉꿉한 습기로 가득 차 있어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이런 숲은 베르고뿐 아니라 제국 그 어디에도 없는데.”

목이 꽉 막힐 정도의 뜨거운 온도에 디에르고는 외투의 단추들을 잡아 뜯다시피 재빠르게 풀어 버렸다.

디에르고와 아무스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때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뒤로 새빨간 머리카락을 흔들며 지나가는 여자가 보였다.

“솔레아?”

섣불리 부를 순 없었다.

이달론의 함정일 수 있다는 생각에 디에르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움켜쥐고는 아무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네 마력을 가진 이들만 이곳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고 했지. 그럼 솔레아도 그 공간을 지나 여기까지 올 수 있나?”

“……원한다면. 이 세계 그 어디에도 그 사람이 못 갈 곳은 없으니까.”

“그럼 방금 지나간 사람이 진짜 솔레아일 수도 있다는 거군. 그런 건 서로 마력으로 알아챌 수 없나?”

“뭔가가 있긴 했어. 그 이상은 알아채기가 힘들군……. 이 숲 자체가 그놈의 마력으로 만든 곳이다. 그러니 갑자기 추워졌지.”

그제야 깨달았다.

아까 단추 몇 개를 푼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온몸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시간,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정신 차려라, 디에르고. 이제 겨우 10분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어쨌든 그자가 이곳에 있는 건 확실하니까 이성을 잡고, 차분하게…….”

아무스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 수풀 사이에서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공작님!”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그쪽으로 돌아갔다.

“솔레아!”

디에르고가 본능적으로 검 끝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수풀 사이에서 튀어나온 여자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작님! 왜 저를 그런 이상한 눈으로 보세요?”

솔레아와 닮았지만 피부색이 좀 더 짙은 살굿빛이었고, 머리카락 역시 곱슬기가 강했다.

그녀의 눈은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가 매일 밤 입 맞췄던 동그랗고 커다란 눈.

마지막 순간에도 다시 한번만 눈을 뜨라고,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나를 바라봐 달라며, 벌써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무릎을 꿇은 채 애걸했지만 무정하게도 보여 주지 않았던 그, 초록색 눈이었다.

“……에일린.”

디에르고의 머릿속에서 수천 개의 문장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왜 여기 있어? 당신은 죽었잖아. 내 곁을 떠났잖아. 나와 함께 건강하게 살 거라고 해 놓고 혼자 갔잖아. 온 저택에 네 손길을 가득 묻혀 둔 채 마음대로 가 버렸잖아. 나랑 아이들만 두고 갔잖아.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야? 왜 내가 이상하다는 듯 날 봐? 에일린. 너는……. 왜 넌…….

보고 싶었는데.

내가 얼마나 당신을 그리워했는데.

아무스가 붙잡으려고 했지만 디에르고는 빠르게 검을 던지고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에일린! 에일린!”

“디에르고! 가지 마!”

“에일린! 왜, 왜 여기 있어?! 너는, 당신은, 쉬고 있어야 되잖아! 편하게 쉬겠다면서 눈을 감았잖아! 에일린!”

디에르고는 미친 사람처럼 수풀을 헤치고 숲을 뛰어다녔다.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왜 꿈에 한 번을 안 나왔어? 당신이 떠난 뒤로 단 하루도 제대로 잠든 날이 없는데, 왜 한 번도 얼굴을 보여 주질 않았어?! 에일린! 제발, 다시! 한 번만. 에일린.”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히면서도 디에르고는 광기에 서린 뜀박질을 멈추지 못했다.

그가 청혼했던 날과 같은 감색 드레스를 입은 에일린이 저 멀리서, 환하게 웃으며 뒤돌아봤다.

빨간 머리카락이 태양 빛을 받아 번쩍거리며 빛났고, 에메랄드빛의 청명한 눈동자는 풍성한 속눈썹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에일린은 큰 소리를 내어 웃으며 디에르고에게 손짓했다.

“디엘, 빨리 와!”

둘만 있을 때 부르던 애칭까지 알고 있구나. 그렇다면 이달론이 만들어 낸 환상은 아닐 거야.

……에일린이 내 꿈에 찾아온 거야. 드디어 나를 보러 와 준 거야.

눈 아래로 흐르는 게 척척하게 젖은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지만 디에르고는 그녀를 잡기 위해 미친 듯 달려갔다.

“에일린, 나 다 왔어! 에일린! 조금만, 천천히 가! 에일린!”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거칠게 뱉으며 손을 앞으로 뻗는 순간, 무언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스였다.

“이성을 잃지 말라고 했잖아! 네 아내는 죽었어! 그것도 십수 년 전에! 정말로 그자가 여기에 살아 있을 거라고 믿어? 이달론이 만들어 놓은 공간 속에서? 이 멍청한 인간!”

아무스는 디에르고를 뒤로 거칠게 밀쳤다.

그는 힘없이 뒤로 밀려났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낭떠러지였다.

심지어 구름 한 줄기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자라 하늘을 빽빽이 가리고 있던 나무들도 없었다.

주위는 그저 넓은 평원이었고 지금 그가 디디고 선 곳은 그 평원의 끝자락, 바다를 마주한 절벽이었다.

디에르고는 아무스의 말이 모두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에일린은 죽었고, 이곳에 있을 리 없다.

그래도 보고 싶었다.

꿈에조차 한 번을 나와 주지 않는 모진 사람이라.

디에르고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내가 이렇게 미련이 많은 걸 알고 일부러 얼굴도 보여 주지 않는 사람이라서…….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스는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디에르고의 멱살을 잡았다.

“미끼가 되기 위해 빈틈을 보이는 건 좋지만 잊지 마라, 디에르고. 너와 나는 지금 산 자들을 위해 이 땅에 온 거야.”

디에르고는 말없이 제 멱살을 잡고 있는 아무스의 손을 떨궈 냈다.

“……그래.”

땅에 내던진 검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어차피 아무스의 말대로 미끼로 왔으니 적당히 제 몸 하나 지킬 수 있는 무기만 있으면 될 일이었다.

디에르고는 허리춤에서 중간 길이의 검을 꺼내 손안에서 몇 번이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아직도 에일린의 얼굴이 어른거리지만, 아무스의 말이 옳았다.

아내는 죽었고, 그는 자식들을 지켜야 했다.

디에르고가 이를 악물고 다시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이번엔 맞은편에서 티온과 헤이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아버지!”

기어코 검은 공간까지 졸졸 따라왔는지 티온과 헤이먼은 걱정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디에르고에게 다가왔다.

“혼자 가시면 어떡해요. 걱정했어요…….”

“참, 위험하니까 오지 말래도.”

디에르고는 한숨을 쉬며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예리한 검 끝이 바닥을 향하려던 찰나, 디에르고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무섭진 않았니?”

“네?”

“……아무스도 없이 너희 둘이서만 왔는데도 길을 잃지도 않고 잘도 왔구나.”

디에르고는 말을 끝마치자마자 앞에 서 있는 티온을 향해 검을 던졌다.

역시 환영이었는지 티온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때 헤이먼의 분홍색 눈이 서서히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아무스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 마력으로 주변을 둘러싸며 이달론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돈은 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디에르고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을 한 번도 쥐어 본 적이 없는 노예일 텐데, 그는 디에르고와 대등하게 싸우면서 마법을 미친 듯이 쏟아부었다.

명백한 살의를 띤 공격이었다.

아무스는 디에르고에게로 향하는 강력한 마법들만 막아 주면서 바로 돈을 해치우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디에르고가 적당히 지쳤을 때 그 몸을 넘기는 척하며 돈에게서 이달론을 빼내야 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디에르고가 지쳤으니까.

아무스가 돈의 마력 공격을 골라내며 주변을 둘러싼 마법 자기장에도 신경을 쏟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날카로운 무언가가 아무스의 왼쪽 날개 아래, 역린을 꿰뚫었다.

“……내가 인간의 몸만 탐할 거라고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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