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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135/192)

135화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마차를 똑바로 응시하던 돈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마차를 가리켰다.

마치 다음은 이 안에 든 사람 차례라는 것 같았다.

황녀는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이름을 가지고 자라났다.

그것은 디에르고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놈이 노리는 건 솔레아, 지윤이었다.

이를 악문 공작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아무스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솔레아가 잠에서 깨어났다.

“……어, 마차가 왜 멈춰 있어요?”

아직도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딸의 얼굴을 보던 디에르고는 무심코 시선을 돌려 밖을 바라봤다.

텅 빈 벌판 위엔 작은 집 한 채만 서 있을 뿐, 방금 전까지 누군가 서 있었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실이라는 여자는 빨래를 모두 걷어 집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아빠. 왜 멈춰 있어요? 누가 멀미라도 했어요?”

디에르고가 대답하기 전, 누군가가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그레이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문을 열자마자 소리쳤다.

“아빠! 방금 보셨어요? 솔레아! 너도 봤어? 저기…….”

“그래. 커다란 독수리가 작은 송아지를 채 가더구나. 신기한 광경이었다.”

“네?”

그레이는 뜻 모를 소리를 하는 디에르고를 이해할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황녀와 아무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러게, 정말 신기하네. 황궁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었어.”

“망나니. 걱정 마라. 1,000년을 넘게 살면 그런 것쯤은 몇 번 더 볼 수 있으니.”

“오, 1,000년을 넘게 살았으면 금수는 이제 죽어도 될 것 같은데.”

세 사람이 모두 태연하게 말하는 탓에 그레이는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자는 분명히 돈이었다.

같은 마차에 타고 있던 헤이먼도 돈을 알아봤는데.

티온 역시 그 광경을 봤다. 다만 남색 머리칼의 남자가 누군지는 몰라 헤이먼이 설명을 해야 했다.

그는 한때 노예였으며, 얼마 전까지 솔레아가 서대륙의 마법사로 신분을 위장시킨 채 데리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티온에게 설명을 마쳤는지 앞에 멈춰 서 있던 마차에서 헤이먼이 뛰쳐나와 이곳을 향해 달려왔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그의 긴박한 표정에는 분노와 공포마저 서려 있었다.

그때, 솔레아가 입을 열었다.

“진짜? 나만 자느라 아무것도 못 봤네.”

……자고 있었어?

빠르게 달려온 헤이먼이 솔레아의 이름을 부르기 직전 그레이가 손을 뻗었다.

“솔레, 억!”

자기도 모르게 형의 목을 손으로 움켜쥐며 초크슬램을 걸어 버린 그레이는 잠깐 당황했지만 얼른 말을 맞췄다.

“어, 형. 솔레아도 봤대. 독수리가 송아지 잡아 가는 거.”

“콜록, 뭐?”

헤이먼이 목을 쓸어내리며 되묻자 그레이는 평소처럼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진짜 엄청 컸잖아! 발톱도 크고! 솔레아는 자느라 못 봤대!”

“아……. 못, 못 봤구나.”

겨우 상황을 알아차린 헤이먼이 다시 마차로 돌아가려는데 티온이 수많은 기사들과 함께 긴 보폭으로 땅을 울리며 뛰어왔다.

“아버지! 막내, 억!”

그레이와 헤이먼은 마차 뒤에 실려 있던 나무 상자를 티온에게 집어 던졌다.

날아오는 상자를 주먹으로 깨부순 티온은 가족들 앞에선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전장의 야차 같은 얼굴로 마저 걸어왔다.

“헤이먼, 그레이. 무슨 짓이야.”

“……혀, 형. 얼굴 표정 좀 풀고 얘기해. 솔레아가 아무것도 못 봤대. 도, 독수리가 날아와서 송아지 잡아채 가는, 그, 그거. 아무튼 못 봤대. 솔레아 자고 있었대.”

“막내야. ……자고 있었구나.”

티온은 얼른 뒤돌아서 소 떼처럼 몰려오는 기사들에게 달려갔다.

무리의 제일 앞에서 소리 지르며 달려오던 맬다가 티온의 주먹에 나가떨어져 기절했다.

“막내는 못 봤다!”

“예? 아, 아! 예!”

기사들은 냉큼 상황을 알아차리고 기절한 맬다를 들쳐 업었다.

바깥의 소란에 솔레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 올리곤 상체를 창문 밖으로 내밀었다.

“진짜 독수리가 그렇게 컸어?”

헤이먼이 냉큼 대답했다.

“어, 형만큼.”

“……티온만큼 컸다고? 세상에 그런 독수리가 있어? 나 깨우지!”

“영애가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면서 자는데 깨울 수가 있어야지.”

“제가 코를 골았다고요? 전하!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빠. 저 코 골았어요?”

디에르고는 먼 산을 보며 얼버무렸다.

“어, 음, 약간?”

눈이 동그래진 솔레아를 보며 싱긋 웃어 보인 디에르고는 황녀에게 힐긋 시선을 주고는 말을 꺼냈다.

“레아, 잠깐 황궁에 가 있는 게 어떻겠니?”

“……왜요?”

“네가 자는 동안 황녀 전하와 네가 하는 사업에 대해 얘기를 나눴단다. 전하께서 네게 도움을 줄 수 있으시다는구나.”

“집, 집에서…… 하면 안 돼요? 편지를 주고받아도 되고, 저 그리고 이제 마력 덕분에 공간을 이동하는 데 제약이 없어서 궁이랑 집이랑 오갈 때 시간도 별로 안 걸려요…….”

공작저를 떠나기 싫은 모양인지 두 손을 맞잡은 솔레아는 엄지를 만지작대며 손톱 거스러미를 뜯기 시작했다.

황녀가 큰 선심이라도 베푸는 것처럼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영애. 그대의 셋째 오빠도 같이 초대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레이도요?”

“응. 내가 베르고 공작저에 하루 있어 보니 황궁에 박아 놓을 데릴사위가 하나 필요할 거 같아.”

“무슨 소리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그레이만 보내든가.”

“싫어요! 황녀님 어차피 결혼 안 하셔도 황제 되실 것 같은데 왜 자꾸 오빠들을, 아니 오빠들한테만 그러면 몰라, 아빠한테까지 왜 그러세요?”

“그리 걱정되면 너도 와. 어차피 사업 얘기도 해야 하니까. 우란 상단의 불법 자금을 베르고에서 처리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나라에서 처리해 상단을 아예 없애 버리는 건 괜찮잖아. 지금 우란 상단이 힘을 잃긴 했어도 아직 완전히 무너지진 않아서 결정타가 필요해 보이던데.”

“그건 그런데…….”

“싫으면 오빠만 보내든가.”

“아, 그건 완전 싫어요!”

솔레아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긴 했지만 그레이는 파랗게 질리는 안색을 숨기지 못했다.

꿈에서라도 싫었다.

“우리 오빠 얼굴 좀 보세요. 새파랗게 질렸잖아요.”

“저런. 황족한테 저리 대놓고 싫은 티를 내다니. 참, 그대의 금수도 필요해.”

“아무스는 왜요?”

“전설 속 동물이잖아? 이것저것 알아봐야지. 비늘도 몇 개 떼 주고, 이빨도 하나 뽑아 줘.”

솔레아는 세상에 두 번 없을 쓰레기를 보듯 카라샤펠을 흘겨봤다가 열린 문밖으로 아무스를 밀어 냈다.

“아무스.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어. 나 전하랑 얘기 끝나면 다시 돌아갈게. 절대 집 밖으로 나오지 마. 이분 농담 안 하셔. 진짜 네 생니를 뽑으실 거야. 오빠는 타고.”

아무스는 울상을 지으며 공작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아무스는 그레이의 검 끄트머리를 살짝 쥔 채 제 마력을 힘껏 쏟아 넣었다.

기운을 느꼈는지 그레이는 마차에 바로 올라타지 않고 잠깐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그레이가 자연스럽다 못해 진심이 우러나올 정도의 죽상을 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전하, 전 그냥 제 동생 돌보러 가는 거니까 저한테 말 걸지 말아 주세요.”

“다행히 나도 아직까진 그대의 동생에 대한 마음이 더 커. 아무래도 국법을 바꿔야겠어.”

“……전통을 지키셔야죠. 전하.”

그레이는 솔레아의 손을 꽉 잡고 제 쪽으로 당겼다.

“이왕 이렇게 나눠 탄 김에 황궁으로 바로 출발하지.”

카라샤펠이 명령을 하자 마부가 묵묵히 대열에서 벗어났다.

본격적으로 길이 갈라지기 전, 아무스가 솔레아가 탄 마차로 날아와 울상이 된 얼굴로 어리광을 부렸다.

덩치에 어울리진 않았지만, 평소 성격과는 잘 맞는 귀여움이었다.

“짝……. 나 보고 싶어도 울지 마. 나도 안 울고 꾹 참을게.”

“안 울어. 너 얼른 가. 조심해. 이상한 사람이 비늘 달라고 해도 주지 말고. 조심해야 돼!”

아무스가 어디로 가서 누구를 죽이려는지 솔레아가 알 리가 없는데, 조심하라는 그녀의 말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아무스는 활짝 웃었다.

“응.”

아무스의 미소가 어쩐지 평소와 달리 불안하게 느껴지는 탓에 솔레아는 떠나려는 그의 옷소매를 살짝 잡았다.

“……너 나 기다리고 있을 거지? 나 다시 집으로 금방 갈 거니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야 돼.”

아무스는 열린 창문 안으로 몸을 들이밀어 솔레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언제든지 네가 부르면 갈게. 설령 날 부르지 않아도 계속 기다릴게. 나 기다리는 거 잘하잖아. 그러니까 안심해. 날 믿고, 널 믿어.”

말을 마친 아무스는 커다란 날개를 펼쳐 날아갔고, 솔레아와 그레이, 황녀를 태운 마차는 황궁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 * *

아무스는 이달론을 잡기 위해 혼자 떠나려 했지만 디에르고가 그를 붙잡았다.

“자네 혼자 가는 것보단 나라도 있는 게 낫지 않겠나.”

아무스가 열어 놓은 검은 공간 안에서는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의 공간에 들였던 한쪽 발을 다시 밖으로 빼낸 아무스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디에르고. 자네는 오지 않아도 된다.”

평소의 순진한 말투와는 확연히 달랐다.

느리게 깜빡이는 두 눈과 굳게 닫힌 입매, 흐트러짐 없이 곧게 선 몸은 마치 다른 인물을 보는 듯했다.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처럼…….”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는 디에르고를 보고도 아무스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내 짝은 옛날부터 경계심이 강해 무정한 이에게 마음 주는 것을 꺼린다. 그래서 다음에 만날 땐 더 많이 웃으며 다가가야겠다고 생각했어.”

“뭐라고? 다음이라니, 그럼 이전에 만났다는 건가?”

놀란 눈으로 질문하는 디에르고와 검은 공간을 번갈아 살피던 아무스는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운지 아까보다 빨라진 말투로, 그러나 여전히 무심하게 말했다.

“그자는 인간의 몸에 기생한다. 자네를 데려가면 또 달라붙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몸에 익숙하지 않은 지금 잡아야 돼.”

아무스가 눈을 한 번 깜빡거릴 때마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잠깐 넓어졌다가 좁아지길 반복했다.

그동안 너무 친숙하게 굴어 실감하지 못했지만 인간이 아닌 자였다.

하지만 디에르고는 그가 인간이 아니라 해도 상관없었다. 딸을 지킬 수 있다면 그가 용이 아닌 그 무엇이더라도 손을 잡을 수 있었다.

디에르고는 굳은 음성으로 그에게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나……?”

아무스는 무심한 얼굴로 답했다.

“없어. 평범한 인간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말을 마친 아무스는 곧장 검은 공간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마법 방어구를 착용한 티온과 헤이먼이 정원으로 뛰쳐나왔다.

“아무스! 돈을 죽이러 가는 거야? 그자를 죽이면 솔레아는 괜찮은 거야?!”

“……그자가 돈이었나?”

아무스의 머릿속에 상심한 얼굴로 축 처져 있던 솔레아가 떠올랐다.

‘아무스. 얼마 전부터 계속 돈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을 안 줘. 나한테 많이 화났을까? 내가 모질게 말해서 이제 다신 나랑 연락하기 싫은 거겠지…….’

친구를 잃었다는 걸 알게 되면 또 자책하겠지.

……그런 걸 다시 볼 순 없어.

아무스는 디에르고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따라와. 미끼가 필요하니.”

아무스의 말을 들을 티온과 헤이먼이 서로 가겠다며 다투기 시작했다.

“왜 아버지를 데려가려는 거야! 날 데려가!”

“나를 데려가라. 용. 내가 가장 튼튼하니.”

아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가 불곰은 맑은 영혼으로 꽉 차 있어서 이달론이 들어갈 수 없고, 분홍이는 이제 갓 영혼이 자라난 상태라 차지해 봤자 그다지 이득이 없다. 미끼가 될 거라면 디에르고뿐이야.”

딱딱한 말투로 애칭을 부르는 모양새가 심히 웃겼지만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디에르고는 덤덤히 말했다.

“내가 가겠다. 그자에게 갚아야 할 빚도 있으니.”

“만약 실패하면 나는 자넬 통째로 삼킬 거야. 난 자네가 또 짝에게 상처 주는 걸 두고 볼 생각은 없거든.”

디에르고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두 번 다시 이달론에게 조종당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 가지 마세요. 위험해요.”

디에르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헤이먼과 티온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금방 올게. 다녀오마.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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