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스르릉, 검이 뽑히는 소리에 솔레아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티온과 그의 기사들이 검을 거꾸로 쥔 채 결연한 표정으로 제 배를 겨누고 있었다.
“잠깐!”
솔레아가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다들 그런 솔레아를 멀뚱멀뚱 바라만 볼 뿐이었다.
“왜, 왜 다들 가만히 있어요? 장기 자랑이 자기 장기를 자랑하는 거겠냐고요. 아니 물론 장기는 장기인데 발음이 다르다고! 장‘끼’ 자랑이란 말이에요! 장기 말고! 위, 간, 창자, 그런 거 말고요!”
장기 자랑을 하자고 얘기를 꺼낸 디에르고마저도 의아하단 표정이었다.
“하지만 분명 듣기로는 장기 자랑이라고……. 저 용이.”
“나는 틀린 말을 전하지 않았다. 분명 짝의 어릴 적 꿈에서 소풍을 가면 장기 자랑을 했다고 했어.”
솔레아는 당장이라도 아무스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지만 꾹 참고 공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공, 아빠는 이상한 거 눈치 못 채셨어요? 기사들이 장기를 자랑하면 다들…… 목숨이 위험해지잖아요.”
애써 준비한 장기 자랑 타임이 허사로 돌아간 게 머쓱한지 디에르고는 먼 산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아니, 뭐……. 둘, 셋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해서……. 저 용이 내 팔도 다시 붙여 줬으니까 숨만 붙어 있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결국 솔레아의 만류로 장기 자랑은 무산되었다.
맬다와 조쉬가 ‘저희는 죽어도 괜찮습니다! 공녀님을 향한 충성심을 보일 수만 있다면 장기 정도는!’이라고 말하며 각오를 표했지만 그런 충성심은 필요 없었다.
남의 생생한 장기를 보며 박수를 치고 싶진 않았다.
장기 자랑 시간이 텅 비어 버린 탓인지 디에르고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결국 솔레아가 21세기의 온갖 놀이들을 언급했다.
“‘무, 무궁화꽃이, 아니 데이지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고요. 피구도 하고, 배구도 합시다. 발야구도 해요. 날씨도 좋잖아요.”
데이지와 피구라면 이제 프로가 된 기사들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데이지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동안 황녀가 몇 번 움직였지만 그냥 내버려 뒀다. 황족인 그녀의 손을 잡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원래 하던 대로 멱살을 잡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그때 정령들이 나타나 황녀의 양 손목에 각각 밧줄을 묶은 뒤 줄을 짧게 늘어뜨렸다.
‘이 밧줄 끝을 잡으면 되지! 그럼 몸에 손을 안 댈 수 있잖아!’
“좋은 생각이구나!”
놀이를 지속할 수 있어서 신난 건지, 평소에 대화를 할 때마다 싸웠던 황녀의 손목이 묶인 게 신난 건지는 구별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디에르고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카라샤펠은 제 양 손목에 묶여 있는 밧줄을 보며 씨익 웃곤 솔레아에게 물었다.
“이게 영애 취향인가?”
“아. 그냥 집에 가고 싶다.”
황녀와 꽤 친해져 말을 무시할 정도가 된 솔레아는 모른 척 게임을 진행했다.
역시 엉망진창이었고, 즐거웠다.
“움직이셨잖습니까! 전하!”
“밧줄이 움직였지, 내가 움직였나!”
“용. 너 움직였지?”
“나는 지금 나를 둘러싼 바람조차 멈추게 하고 마력으로 스스로를 고정하고 있다. 그런 내가 움직였을 리 없지.”
“마법 썼으니까 반칙이네. 너 나와.”
“……힝.”
데이지를 몇 판 돌린 뒤엔 피구를 했다. 하지만 너무 여러 번 해서인지 반응이 영 시들해 다시 배구로 바꿨다.
“배구 진짜 재밌어요. 인원은 팀당 여섯 명이고, 이렇게 두 손 모아서 공 튕기고! 이게 리시브. 이렇게 공을 위로 올리면 토스, 팡! 하고 때리면 스파이크고. 서브는 이 선 바깥에서! 이렇게, 서브! 언더 서브는 밑에서 쳐 올리듯이 이렇게. 세 번 안에 상대편으로 넘겨야 돼요.”
신나서 배구 룰을 설명하는 솔레아를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 이해했어요?”
“그럼.”
어쩐지 ‘모두에게 사랑받는 쁘띠 공녀님’ 같은 세계관에 갇힌 듯했다.
솔레아는 조심스럽게 아무스 곁으로 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스. 사람들이 자꾸 나를…… 뭐랄까, 너무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는 거 같지 않아?”
아무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히 답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곧 너도 너를 좋아하게 될 거야. 너는 사랑받아 마땅한 멋진 사람이거든.”
“웬 딴소리야.”
왠지 부끄러운 기분에 솔레아는 마력을 실어 아무스의 어깨를 퍽 쳤고, 어깨가 빠진 아무스는 남몰래 어깨를 다시 제자리에 끼워 맞췄다.
몸을 쓰는 기사들이 대부분이라 그런지 다들 금방 동작들을 따라 했다.
비교적 키가 작은 솔레아와 황녀는 수비 전문인 리베로를 맡았다.
한 판 정도 멀쩡하게 굴러가나 싶었는데 티온이 스파이크를 날리려다 공을 터뜨렸고, 이어서 디에르고 공작도 공을 터뜨렸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라트엘은 디에르고 공작이 터뜨린 공들만 개수를 체크하여 공의 값만큼 공작의 개인 예산을 삭감했다.
결국 공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은 황녀가 코피를 터뜨리며 배구도 끝나고 말았다.
코를 움켜쥔 채 주저앉은 황녀는 손에 묻은 피를 확인하자마자 말했다.
“저 기사를 살려 줄 테니 솔레아는 황궁으로 와서 나랑 일주일 동안만 같이 있어.”
“……무슨 일을 시키시려고요.”
솔레아는 잠깐 고민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면 살릴 수 있는데 그냥 페이온을 넘길까. 죽기 전에 치료하면 되잖아.’
“……공녀님. 아가씨. 저 살려 주세요.”
“살려 드려야지, 살려는 드릴게. 그런데…… 아, 황궁은 싫은데.”
웃음기가 짙게 밴 황녀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솔레아가 안 따라올 걸 알고 일부러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코피가 터지자마자 솔레아가 마력으로 치료했으니 이젠 아프지도 않을 터였다.
디에르고는 시끌벅적한 사람들에게 떨어져 나와 그늘에 앉았다.
‘비켜! 은발 놈! 내가 아끼는 꽃이야!’
정령들의 목소리가 들려 살짝 몸을 틀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보라색 제비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디에르고는 조용히 정령에게 물었다.
“죽은 아이는…… 어디로 가니?”
정령은 활짝 피어난 제비꽃들 사이에 앉아 은발 놈에게 말했다.
‘죽은 아이는 사라지지.’
“그래……. 사라지는구나.”
씁쓸한 듯 말끝을 흐리는 은발을 불만스레 올려다보던 정령이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조금 이르게 낙화한 보라색 꽃 한 송이를 들고 디에르고의 눈앞으로 날아갔다.
‘그래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이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 있지.’
작은 정령은 디에르고의 가슴속에 보라색 꽃을 넣어 주었다.
‘은발! 표정이 죽는 중이야! 씨바 웃어!’
박력 넘치는 작은 정령의 말에 디에르고는 큰 소리로 웃고는 제 옆의 제비꽃 군락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솔레아는 다른 아이들에게서 천천히 잊히겠지.”
정령은 제비꽃 사이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디에르고를 비웃었다.
‘무슨 소리야. 임시 주인은 어제저녁에도 너희가 후원 구석에 만들어 놓은 솔레아의 무덤에 갔다 왔어.’
“뭐?”
‘소풍을 간다, 너도 함께라면 좋았을 거다, 내일 네가 나랑 같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네 몫까지 재밌게 놀다 오겠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래?”
디에르고는 어쩐지 울컥해 입가를 매만지며 울음을 삼켰다.
정령은 신이 났는지 곧장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소풍 오기 전에 말이야! 아가 불곰이 그 자리에 가 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어 줬어. 곰돌이와 친구가 된 꼬마 공주님이라고, 되게 지루한 내용이었어.’
정령은 제비꽃의 보라색 꽃가루를 온몸에 묻힌 채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헤이먼이 그 자리에 보라색 꽃이 피는 등나무를 심기 위해 상단에 주문을 해 두었고, 그레이가 반쯤 바닥에 드러누워 어렸을 때 동생에게 불러 주던 노래를 살짝 바꿔서 불러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정령은 그레이가 불렀던 노래를 기억해 내 공작의 옆에서 맑은 목소리로 불러 주었다.
‘디에르고 공작님, 에일린! 공작 부인, 티온은 큰형, 헤이먼은 작은형, 잘생긴 그레이! 솔레아는 예뻐! 지윤이는 막내! 우리는 베르고 가족∼’
아이들은 나름대로 솔레아를 기억하고,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기리고 있었다.
결국 디에르고가 훌쩍거리기 시작하자 정령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디에르고의 등을 퍽 쳤다.
‘은발! 힘내! 가만 보면 네가 제일 마음이 약해!’
디에르고는 울다가 웃고 말았다.
정령의 위로를 받은 후, 디에르고는 다시 아이들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해가 지기 전에 공작저로 되돌아갈 채비를 했다.
외출을 나왔으니 마차를 타고 천천히 가고 싶다는 솔레아의 말에 검은 공간을 열어 베르고 근처까지 간 후, 거기서부터 두 시간 정도는 마차를 몰아 가기로 했다.
그러나 바깥 구경이 하고 싶다던 솔레아는 피곤했는지 마차에 타자마자 아무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어 버렸다.
솔레아가 잠들자마자 공작과 황녀, 아무스는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은 채 잠든 솔레아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창밖에서 어떤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도와줘요! 도와주세요! 미친 사람이에요!”
이맛살을 찌푸린 카라샤펠이 커튼을 살짝 젖혀 밖을 바라봤다.
어떤 남자가 여자의 팔을 붙잡은 채 잡아당기고 있었다.
“뭐야, 저놈은.”
뒤이어 상황을 확인한 디에르고가 마차를 세웠다.
도와줄 기사를 보내려던 찰나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여보, 나야. 세실, 나라고! 나 레이놀드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제발!”
“누구야! 놔!”
여자가 발악을 하며 남자를 떼어 내려고 했지만 남자는 비굴해 보일 정도로 처절하게 여자에게 매달렸다.
“여보, 제발. 레이놀, 아니. 나 란이야. 내 이름 기억해? 우리 예전에, 같이 도망 다니던 그때. 응? 제발, 세실, 나 좀 봐. 네가 내 새로운 이름을 지어 줬었잖아!”
여자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질색하며 남자를 밀쳐 냈다.
힘없이 뒤로 밀려난 남자가 다시 그녀를 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그의 손이 여자의 몸을 통과하고 말았다.
여자는 잠깐 멍하게 서 있다가 방금 전의 난리를 잊은 것처럼 바닥에 떨어진 빨랫감들을 하나둘 줍기 시작했다.
“어휴, 빨래 다시 해야겠네.”
소리를 지르던 남자의 목소리가 서서히 작아지고, 그의 몸 또한 투명해졌다.
목에 벌건 핏대가 올라올 정도로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남자는 이내 몸을 돌려 먼 곳에 세워진 마차 행렬을 향해 맹렬히 뛰어왔다.
“도와주세요! 도와줘요! 제가 보이세요? 여러분, 제발! 제 이름은 레이놀……!”
점점 작아지던 남자의 목소리는 이내 들리지 않았고, 그의 몸 역시 연기처럼 흩어졌다.
한 인간이 세상에서 지워졌다.
그의 아내에게서 완전히 잊힌 채로.
마차에 탄 모든 이들이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굳은 듯 앉아 있었다.
주먹을 움켜쥐는 아무스의 손가락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던 그때, 황녀가 조용히 오른손을 들어 바깥을 가리켰다.
레이놀드가 사라진 그 자리에 익숙한 인영이 나타났다.
큰 키에 짙은 남색 머리칼, 늘 조용히 아래를 향하던 검은 눈동자.
그는 마차를 지긋이 응시하다가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사방으로 흩어진 영혼의 조각들을 모았다.
그리고 입술을 열어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뭉쳐진 영혼의 조각들은 순식간에 작은 구슬로 변했고, 그는 그것을 입 안으로 넣어 꿀꺽 삼켜 버렸다.
“……저놈은 분명 진짜 마법사가 아니었는데…….”
황녀가 작게 중얼거리자 돈은 입꼬리가 귀에 걸릴 정도로 입술을 가로로 쭉 찢으며 활짝 웃어 보였다.
멀리 있어도 확연히 보이는, 징그러울 정도의 환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