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 * *
금화 몇 푼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 진짜 가보였다니.
이 와중에 저 멀리에서 어느 기사의 환호가 들려왔다.
“와! 찾았다! 제르노아 9대 황후셨던 라리아나 폰 베르고 황후 폐하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미친!”
손이 떨려 온다.
17억 로또 종이를 잃고 이 세계로 떨어졌다. 아니, 물론 이젠 로또에 미련은 없지만…….
지금 이 넓은 땅 구석구석에 로또들이 묻혀 있다는 거잖아.
“아무스! 나 좀 도와줘! 아무스!”
애타게 불렀지만 공작님 옆에 있는 아무스는 올 기미가 전혀 없어 보였다.
“아가. 아무스는 나와 함께 보물을 숨겼기 때문에 너를 도와주는 건 규정 위반이란다!”
“아무스 이놈 자식아! 언제든지 내가 부르면 오겠다며!”
아무스는 일평생 고민이라곤 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말끔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미안! 젊은이가 나보고 짝 도우면 규정 위반이래!”
“야! 내가 네 짝이지, 우리 아빠가 네 짝이야?!”
“미안해! 근데 모른 척해야 다음에 가족끼리 초상화 그릴 때 나도 끼워 주겠대!”
“아이고, 그래라! 나 없는 내 가족 초상화에 들어가라!”
“레아, 네가 없다니 무슨 소리니!”
“압, 공작님도 됐어요! 말 걸지 마세요!”
“아가아아아!”
손으로 확성기 모양을 만들어 외치는 공작님이 미웠다.
내 일확천금.
내 돈.
원래 돈이라는 게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지지만, 있으면 있는 대로 확 땡기고 싶은 건데.
나는 공작님을 있는 힘껏 노려보며 외쳤다.
“공, 아빠 미워요! 아빠 진짜 미워요!”
아빠라고 부르는 게 타격이 더 클 것 같아 일부러 그렇게 불렀다.
이젠 그렇게 불러도 아프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가!”
당황한 공작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를 설득하려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공작님과 떠드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베르고의 보물들이 다 이 땅에 묻혀 있다니.
이렇게 짜릿한 보물찾기는 태어나서 처음인데.
나는 손안에 마력을 모아 땅을 뒤흔들었다.
“짝 이제 마력 너무 잘 써!”
아무스가 기립 박수를 보냈다.
땅이 흔들리며 마력의 기운으로 쪽지가 숨겨진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저기다!”
내가 나무 아래로 뛰어가려는 순간, 그레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비켜!”
“아빠악! 얘 치사하게 지 혼자 마법 써요!”
“솔레아! 마법은 반칙이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내 능력인데!”
“정확히는 아무스 마력이니 안 되지! 공평하게 겨뤄야지!”
“아빠 두 번 미워요!”
“아아, 솔레아…….”
이 와중에 정령들은 할 일을 찾았는지 평원 구석구석에서 해설을 하고 있었다.
‘아, 방금 조쉬 선수가 1년 치 연봉이 담긴 금화 주머니를 찾았네요!’
‘울고 있어요, 조쉬 선수!’
‘들고 올 수 없는 건 쪽지에 써 놓고, 숨길 수 있는 사이즈는 물건을 숨겨 뒀나 본데요!’
‘쪽지만 찾을 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보물은 모두 찾아야 하나 봅니다!’
‘말씀드린 순간! 아가 불곰이 뭔가를 찾아냈습니다!’
‘……아, 안타깝게도 꽝이라고 적힌 종이였네요.’
‘종이를 확인한 불곰 선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집니다…….’
‘괜찮아요, 또 찾으면 됩니다. 불곰 선수. 포기하지만 않으면 돼요!’
‘아가 불곰 울지 마!’
‘괜찮아! 짝!’
‘괜찮아, 짝!’
“너네 시끄러워!”
정령들에게 윽박지른 후 두 발로 뛰기 시작했다.
마법을 쓸 수 없다면 남보다 더 빠르게 뛰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땀 흘리며 뛰다 보니 나무 그늘 아래에서 공작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황녀 전하가 보였다.
“전하는 왜 보물찾기 안 하세요!”
“내 궁의 지하에 더 비싼 보물이 많으니까! 난 쓸데없는 땀은 흘리지 않는다! 그런데 전하가 누구지?! 나는 랏샤 코리아 13!”
“한국인도 아니면서 뭐가 코리아야, 진짜 웃기는 사람이야!”
“한국이 뭐고, 코리아는 뭐지, 영애!”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면서 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대해 설명하자니 골치 아파 나는 모른 척 다시 다른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침 티온이 눈에 보여 그를 불렀다.
“오빠! 큰오빠!”
“응, 막내야!”
“나 목말! 목말!”
“응!”
티온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내 허리를 잡고는 몸을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에 앉혔다.
“오빠, 어깨 좀 밟을게!”
“응. 안 넘어지게 조심해.”
나무 위를 살피기 위해 발로 티온의 어깨를 디디고, 두 손으론 나무를 짚으며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나뭇가지 끄트머리에서 반짝이는 작은 상자가 보였다.
‘도굴꾼 코리아 13! 멋진 상자를 찾았습니다!’
‘과연, 뭘까요!’
정령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재빠르게 상자를 열었다.
책이었다.
‘책이네요!’
‘책입니다!’
‘‘남편이 너무 잘해요.’라는 책을 찾았네요, 솔레아 선수!’
‘지금은 솔레아가 아니라 도굴꾼 코리아 13이죠!’
‘남편이 뭘 잘한다는 걸까요?’
‘여러 방면으로 굉장하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이게 뭐야!”
나는 벌레라도 만진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책을 집어 던졌다.
어딘가에서 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우리 아가씨가 좋아하는 책들♥’
“아악!”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 아래로 떨어지자 티온이 나를 안아 들었다.
“막내야. 무슨 책인데 그래?”
나는 티온이 제목을 읽기 전에 얼른 검은 공간을 열어 그곳으로 책을 집어 던졌다.
“아빠! 왜 이, 이딴 책이 있어요!!”
마치 내가 책을 찾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공작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네가 좋아하는 종류의 책들이라고 추천을 받았다!”
“아빠 세 번 미워!”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아 입에 갖다 댄 채 내게 소리치던 공작님이 침울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쓰럽긴 하지만 왜 이런 걸 준비하신 거야.
그래도 내가 제일 먼저 찾아서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저 멀리서 헤이먼과 함께 걷고 있던 사라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저도 상자를 찾았어요!”
“사라 영애!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열어 보십시오!”
“안 돼! 헤이먼! 사라! 열지 마!”
내 외침이 닿기 직전, 사라가 상자를 열었다.
다행히 사라는 상자를 열기만 하고 내용물은 살펴보지 않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녀님, 왜요?”
상자 안을 확인한 헤이먼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헤이먼은 사라의 손에서 상자를 뺏더니 뚜껑을 닫고, 수류탄을 던지듯 저 멀리 던져 버렸다.
“꺅! 공자님! 제가 찾은 건데!”
놀란 사라가 헤이먼에게 언성을 높였다.
“위험한 물건이었습니다. 사라 영애가 다칠까 봐 일단 멀리 던졌습니다.”
“정말요? 역시 무서운 땅이네요.”
“예, 아무래도 원래는 마물들의 땅이었으니까요.”
다행이다.
대체 책을 몇 권이나 숨겨 둔 거야.
공작님이 계신 방향을 힘껏 흘겨봤지만 공작님은 정령들의 해설에 푹 빠져 계셨다. 어쩐지 본인이 더 신나신 것 같았다.
‘아! 방금 우리 분홍이가 ‘파멸의 밤’을 던졌습니다!’
‘요즘엔 꽤나 보기 드문 하드코어 명작인데요!’
‘앤이 가장 좋아하는 책인데!’
‘남자 주인공이 밤만 되면 이성을 잃고 가차 없이 밀어붙이는 게 포인트죠!’
나는 지금 저런 책들이 ‘공녀님이 좋아하는 책들’이라고 소문이 날까 봐 간이 후달리는데 저것들이 진짜.
정령들과 공작님이 신난 건 둘째 치고, 난 보물이고 뭐고 책들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막내야, 내가 도와줄까?”
“아니! 아니, 응!”
아직도 나를 내려놓지 않고 서 있는 티온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하여 다시 티온의 어깨 위에서 목말을 타고 움직였다.
난 용을 잃었지만 불곰을 가졌지.
“가자! 불, 오빠!”
“응!”
티온의 어깨 위에 올라탄 채 나폴레옹처럼 팔을 앞으로 휘둘렀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티온 목말.
* * *
공작에게서 믿기 힘든 이야기들을 듣고도 카라샤펠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저 무덤덤하게 앞을 바라보며 짧게 신음만 뱉어 냈다.
“흐음.”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공의 말이 사실이라면 딸을 잃은 아비 앞에서 깜짝 놀라는 건 예의가 아닌 듯하여. 안 그래도 소문과는 영 달라 신기하다 여기긴 했었거든. ……설마 이럴 줄은 몰랐지만.”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황녀는 아까보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공께서는 저이를 딸로 받아들였습니까?”
디에르고는 잔잔한 미소를 띤 채 한참 동안 먼 곳을 바라보았다.
솔레아가 티온의 머리를 붙잡고 방향을 지시하면 티온은 그곳으로 마구 달려갔다. 솔레아는 상자를 찾는 즉시 열어 본 후에 즉각 검은 공간을 열어 그 안으로 책을 던져 버렸다.
“……공?”
황녀의 목소리에 디에르고는 조금 늦게 답했다.
“늦었습니다.”
“뭘? 대답이? 난 그 정도도 못 기다리는 주군은 아니니 편히 대답하세요.”
황녀의 여유로운 농담에 픽 웃은 디에르고가 마저 말했다.
“저 아이를 딸로 받아들이는 것이…… 늦었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저기 보십시오, 전하. 누가 봐도 가족 아닙니까.”
그 와중에 티온의 도움을 받아 올라간 나무 꼭대기에서 금화 주머니를 찾았는지 솔레아는 주변을 살피면서 금화를 품에 넣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아래로 내려가 티온의 앞에 섰다.
뭐라 묻는 티온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텅 빈 두 손을 펼쳐 보이는 모양새를 보아 하니 아무것도 못 찾았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큰오빠에게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마저 막내다웠다.
“조심성도, 경계심도 많은 공이 내게 이 모든 걸 얘기해 주는 이유가 뭡니까?”
“……저는 물론 반대하지만 전하께선 우리 딸 친구가 아니십니까. 우리 지윤이가 정이 많아서.”
“지윤, 지윤…….”
낯선 형식의 이름이 신기하다는 듯 카라샤펠은 몇 번이나 솔레아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다.
“조심하세요, 전하. 아이는 비밀이 밝혀지는 걸 원치 않으니.”
“친구 아빠가 신신당부하니 유념하도록 하죠.”
친구 아빠라는 호칭이 재밌는 듯 공작은 부드러운 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솔레아가 보너스 시간을 주지 않으면 지금 당장 여기서 아무스와 결혼하든가, 랏샤를 따라 황궁에 가서 살겠다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보너스 시간 30분이 추가됐다.
아무스는 보너스를 주는 게 어디 있냐고 발을 구르며 공작에게 매달렸고, 늘 시큰둥하고 여유 넘치는 표정이던 황녀까지 공작의 팔을 붙잡고 부탁했다.
“베르고 공. 나 정말 그대의 딸이랑 같이 일해 보고 싶어. 저이는 능력이 너무 많아. 넘쳐. 뭘 가르쳐도 잘할 거야. 어디에 데려다 놔도 살아남을 인재란 말이야. 나 줘. 베르고 공. 공. 공작. 내 말 들려? 공.”
“우리 딸이 인재인 건 내가 제일 잘 압니다. 됐어요.”
공작은 아무스와 랏샤를 매몰차게 떨쳐 냈고, 솔레아는 얻어 낸 30분 동안 기어코 숨겨진 보물들을 모두 찾고 돌아왔다.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빛나는 깃털 펜과 222가지 색의 파스텔, 배구하기에 딱 좋은 동그랗고 하얀 공, 남부 시카르피아 섬의 땅문서까지.
그중 앤이 추천한 수많은 책들은 단 한 권도 없었다.
과연 앤이 조언해 준 대로 지윤이는 부끄러움이 많아 남들이 보는 앞에선 책을 숨기는군.
다행이었다.
공작저의 공용 서재에 그쪽에 관련된 책들로만 가득 채운 서가를 준비해 뒀으니 돌아가서 깜짝 놀라게 해 줘야지.
공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솔레아는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아빠! 우리 이제 뭐 해요?”
디에르고는 야심차게 대답했다.
“장기 자랑을 할 거란다.”
디에르고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순간 싸늘한 공기가 평원을 감쌌다.
티온을 비롯한 기사들이 결의에 가득 찬 얼굴로 검을 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