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2/192)

132화

카라샤펠은 소풍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공작에게 이게 다 어찌 된 일인지, 아파서 요양 갔다가 돌아왔다던 공녀가 왜 가족들에게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물어보려 했다.

실패했다.

“아아악!”

“전하, 목청이 아주 크십니다!”

“그러는 공도 지금 마차 문짝 날아갈까 봐 붙잡고 있잖아!”

“바람 때문에 그런 거지, 겁나서 그런 게 아닙니다!”

“이렇게 가는 거면 기사들을 데려올 걸 그랬어!”

“기사라고 폭풍 속에서 무사할 것 같습니까!”

“내 기사들은 괜찮아!”

황녀는 미친 듯이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이리저리 머리를 부딪쳤다.

“이 금수가 혹시 일부러 마차를 흔드는 건가?”

그때 거센 바람에 마차의 작은 창이 깨지고 말았다.

얼른 의자에서 일어난 공작은 날아오는 파편을 몸으로 막으며 황녀를 보호했다.

마차는 한바탕 더 흔들린 이후에야 멈춰 섰다.

황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한 후 긴 숨을 내뱉었다.

“……베르고 공. 고맙긴 하지만 그래도 그대는 내 삼촌뻘이라 국혼은 힘들어. 심지어 공은 재혼이잖아.”

디에르고는 재활용 안 되는 쓰레기 보듯 황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가 다치시면 그게 보통 큰일입니까? 그리고 전하 말씀대로 제 조카뻘이시니 감싸는 거지요.”

황녀는 그의 눈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지친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농담이야……. 웃지도 않네. 재미없긴.”

“매번 쓰레기 같은 농담을 잘도 하십니다.”

“가정 교육을 덜 받아서 그래.”

황족이 가정 교육을 덜 받았다고 하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 할 말이 없어 디에르고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내리시죠, 전하.”

마차 문의 경첩이 거센 바람에 고장 났는지 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해도 삐걱거리기만 하자 디에르고는 문을 걷어찼다.

문이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밖으로 발을 내딛은 공작은 따라 나오는 카라샤펠의 손을 잡아 주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들판과 곳곳에 높이 자라난 나무가 만들어 낸 그늘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냈다.

태양을 잔뜩 머금은 잔디가 윤기를 내뿜으며 산들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이런 땅이 있었나?”

“마물이 나온다고 해서 아무도 밟지 않은 북부의 경계선입니다. 처음 와 보셨겠지만.”

“지금 황위 계승자인 나를 마물들의 땅에 데려온 거야?”

“용도 있고, 용을 부리는 제 딸도 있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짜증 섞인 디에르고의 말대로 마차에서 내린 솔레아는 들판을 보곤 우와!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힘차게 앞으로 뛰어나갔다.

“막내야! 뛰지 마! 다쳐!”

티온이 말리려고 뒤따라갔지만 들판을 달리던 솔레아는 곁에서 같이 뛰고 있는 아무스에게 손을 뻗었다.

아무스는 솔레아를 입으로 물어 올려 제 등에 던져 태우곤 창공을 향해 날았다.

둘은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추며 하늘을 날아다녔다.

카라샤펠 황녀는 검은 점이 되어 버린 솔레아를 보며 디에르고에게 물었다.

“……공, 영애가 말을 탈 줄 아나?”

“그럭저럭…….”

“용은 탈 줄 아는군.”

“……보시다시피.”

근처 호수만 가도 괜찮다던 말이 무색하게 솔레아는 잔뜩 신난 듯 보였다.

그렇게 한참 하늘을 날던 솔레아가 갑자기 공중에서 뛰어내렸다.

“아가!”

놀란 디에르고가 솔레아를 받기 위해 두 팔을 뻗었다. 그는 제 품으로 눈송이처럼 사뿐히 떨어진 딸을 꼭 안았다.

마력으로 하강 속도를 늦춘 모양이었다.

“놀랐잖니, 아가.”

걱정하는 아빠의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솔레아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얼굴로 말을 쏟아 냈다.

“공작님! 여기가 어디예요? 이런 데 처음 와 봐요! 엄청 넓고! 공기도 너무 좋고, 아빠 여기 진짜 너무, 너무 좋아요! 너무,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요, 라는 말밖에 못 하는 것처럼 솔레아는 상기된 얼굴로 공작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공작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아빠가 여기 찾느라 애 좀 썼다.”

어느새 사람으로 돌아온 아무스가 솔레아와 공작의 뒤에서 말했다.

“아니지, 젊은이. 여긴 내가 알려 줬잖아. 비록 돈은 자네가 냈지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솔레아가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티온이 아무스를 덮쳐서 쓰러뜨렸다.

“악!”

아무스가 바닥으로 엎어졌다.

티온은 재빨리 겉옷을 벗어 아무스에게 덮어 주었고, 다른 마차를 타고 온 베르고의 기사들이 예상한 상황이라는 듯 여벌의 옷을 들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오, 과연 전설의 금수다운 씩씩한 기상을 지녔구나.”

명백히 놀리는 듯한 황녀의 어투 덕분에 솔레아는 무슨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스가 또……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가 되었구나.

기사들은 인간 벽을 만들어 솔레아에게 아무스가 보이지 않도록 하고는 아무스에게 옷을 입혔다.

디에르고는 혹여 솔레아가 고개를 돌릴까 봐 딸의 얼굴을 붙잡고 제게 고정시켰다.

까딱했다간 귀한 공녀님께서 험한 꼴을 보셨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맬다는 깊이 분노했다.

“옷 좀 입고 다녀! 우리 공녀님이 보시면 어떡할 건데! 숨어서 변한 다음에 옷을 입고 나타나든가! ……요!”

“어차피 사방이 트여 있으니 굳이 숨을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스는 평소처럼 당당한 태도로 흰 튜닉과 검은 바지를 입었다.

“부끄러운 감정은 세월이 지나면 무뎌지니 그대들도 작은 일에 사사로이 분노하지 마라.”

기사들은 심각한 얼굴로 저들끼리 떠들었다.

“정말 저 사람, 아니 용이 우리 공녀님 짝이라고?”

“그럴 리가.”

“아까 공녀님이 저놈, 아니 용한테 매달리셨잖아.”

“썅, 우리 공녀님이 매달리셨다니 그게 말이 돼?”

“너 왜 공녀님 거론하면서 욕하냐? 돌았냐?”

“아니, 화나서 그러지.”

“그건 그래. 우리 공녀님이 너무 아까우시잖아.”

“야, 이 새끼들아. 공녀님은 누굴 갖다 대도 아까우신 분이야.”

“그럼.”

“그럼.”

“당연하지.”

‘응! 임시 주인은 멋져!’

“으악! 깜짝이야!”

한군데 옹기종기 모여 떠들던 기사들이 폭죽 터지듯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손바닥만 한 정령들이 작은 빛을 내며 나타난 까닭이었다.

‘이제 우리 안 숨어도 된댔는데!’

‘응!’

‘누가 그랬지?’

‘주인이 그랬나?’

‘우리한테 한 말이 아니고, 주인이 안 숨어도 된다는 뜻 아니었어?’

‘아, 그랬나?’

‘그럼 우린 계속 숨어?’

‘그럴까?’

‘그러자!’

한꺼번에 나타났던 정령 무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솔레아는 또 티벳 여우 같은 얼굴로 서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야 이 씨……. 다 들킨 마당에 뭘 숨어.”

솔레아의 말에 정령들이 다시 우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안 숨어야지!’

‘와아! 신난다!’

‘너무 좋아!’

‘자연 최고!’

카라샤펠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정말. 황궁보다 여기가 몇 배는 더 재밌네. 공, 아들 셋 중에 하나만 줘.”

“랏샤! 무슨 제 오빠들을 쿠키 달라고 하듯…….”

“난 그대도 좋아.”

“악! 그레이! 랏샤 왜 불렀어! 넌 오늘부터 오빠도 아니야!”

“아, 왜! 넌 나한테만 그러더라!”

멀미하고 있는 빌과 사라의 등을 두드려 주던 그레이가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고는 소리 질렀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탁 트인 공간인데도 온 사방이 시끄럽고 정신없었다.

그래도 이 상황이 웃겨서 솔레아는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 * *

“자, 오늘 소풍의 첫 번째 순서는 보물찾기입니다.”

“베르고 공이 전쟁을 지휘했다는 건 익히 들어 알지만 소풍을 지휘하는 건 처음 보는군.”

“전하, 한 번만 더 태클 거시면 퇴장입니다.”

“……여기에서 어디로 퇴장시킨단 거야?”

아무스가 상큼한 얼굴로 대신 답했다.

“이승에서 퇴장이다.”

“아무스. 방금 그 발언으로 자네 팀은 추가 점수 10점을 획득했네.”

편하게 놀기 위해 바지로 갈아입은 황녀가 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가 봐도 벌점을 줘야 하는 거 아냐?! 나를 죽인다는데?!”

“우리 딸 소풍이니까요.”

카라샤펠은 다시 조용히 잔디밭에 앉았고 솔레아는 꽃송이를 엮어 만든 팔찌를 사라의 손목에 채워 주며 기분 좋게 웃었다.

“딸, 아빠 말하는 거 들었니?”

“네! 보물찾기요.”

“그래.”

인자하게 미소 지은 디에르고가 말을 이었다.

“아무스가 근처에 마력으로 벽을 쳐 뒀으니 마물들은 이곳에 들어오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숨겨 놓은 보물을 찾으세요. 찾은 보물은 모두 자기 것입니다. 기사들도 함께 참여하니 우리 아이들도 열심히 해야겠지?”

“어떤 보물입니까?”

헤이먼의 질문에 공작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었다.

“……찾아봐라. 우리 가문의 전부를 그곳에 두고 왔다.”

티온과 헤이먼의 얼굴이 사색으로 뒤덮였고, 그레이와 솔레아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재밌겠다……!

“그럼. 재밌게 놀아라, 얘들아. 제한 시간은 한 시간이다. 준비, 시작!”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기사들은 소리를 지르며 일확천금을 향해 뛰어나갔지만 나사니엘가와 베르고가의 아이들은 멍한 얼굴이었다.

다들 심각한 표정인데 솔레아만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린 채 좌우로 목을 꺾었다.

진지하다 못해 엄숙한 표정이었다.

“이제부터 이 들판의 보물은 다 내 거다. 난 예전부터 일확천금을 꿈꿨지.”

“……솔레아 너 언제부터 이렇게 탐욕이 많았지?”

“누가 솔레아지? 나는 도굴꾼 코리아 13이다.”

“뭐라고? 13은 대체 뭔데?”

“배구 국가대표 박정아 선수 등번호.”

“그게 뭐야?”

“수세에 몰렸을 때 점수를 내며 팀을 승리로 이끄는 클러치 박을 모르는 인생이 불쌍하군. 헤이분홍이.”

헤이먼은 골이 아프다는 듯 양손으로 머리를 싸맸다가 그레이의 어깨를 툭 쳤다.

“야. 그레이! 솔레아 좀 말려!”

하지만 그레이는 늘 그랬듯 솔레아와 죽이 잘 맞았다.

“누가 그레이지? 나는 킬러 호랑이 13. 가자! 도굴꾼 코리아 13!”

“좋아!”

솔레아와 그레이는 대답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빠르게 달려 나갔다.

사라는 두 손을 모은 채 종종거리다가 고민에 빠졌다.

“저, 저도 별명이 있어야 할 거 같아요.”

“사라 영애, 그런 것은 필요 없습니다. 쟤네는 정신 연령이 아직…….”

빌이 결심한 듯 앞으로 뛰어갔다.

“킬러 도굴꾼 무화과파이 코리아 13! 지금 출발하지!”

“……사라, 왜 영애의 오라버니는 자신을 무화과파이라고 하는 겁니까? 아니 왜 온갖 걸 다 갖다 붙이는지…….”

“그, 어, 아마, 자기가 못 먹는 거라 무화과파이를 넣은 듯하고, 다 갖다 넣은 건 그냥 그게 강해 보여서 그런 거 아닐까 하는…….”

묵묵히 서 있던 티온마저 걸음을 옮겼다.

“형, 우리랑 같이 움직여!”

아무래도 사라와 단둘만 남는 건 어색해서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티온은 싸늘히 굳은 얼굴로 헤이먼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내 이름은…… 도굴꾼 불곰 27. ……스, 스물일곱 살이다.”

막상 말로 내뱉자 부끄러웠는지 티온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자리를 피했다.

결국 헤이먼과 사라만 남았다.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서 양심상 남의 집 영애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어 헤이먼은 어색한 공기를 꾹 참고 사라에게 말을 걸었다.

“놀라셨죠? 제 형제들이…… 다소 자유로워서…….”

“아, 괜찮아요! 그건 저희 오빠도 마찬가지라서…….”

“천천히 걸으며 찾아볼까요?”

“네.”

두더지마냥 미친 듯이 땅을 파헤치고 바위 사이를 뛰어다니며 보물을 찾는 솔레아와 그레이를, 아니 도굴꾼 코리아 13과 킬러 호랑이 13을 보고 있자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그레이는 틈을 놓치지 않고 사라와 나란히 걷는 헤이먼을 놀려 댔다.

“둘이 뭐야! 나 눈치 되게 좋아. 뭐야, 뭐야!”

“내 동생을 놀리지 마라! 그레이!”

격분한 빌이 커다란 통나무를 그레이에게 집어 던졌다. 또다시 둘의 몸싸움이 시작되었다.

솔레아는 냉큼 그레이를 내버려 두고 통나무가 원래 놓여 있던 자리로 가 보물이 적힌 쪽지를 찾아냈다.

“와! 내가 제일 먼저 찾았어! 700년 전에 장인이 직접 구운!  베르고의 가보로 내려오는! 최고급! ……식기 세……트.”

당황한 솔레아가 작은 목소리로 쪽지 안에 적힌 내용을 다시 읽어 보았다.

“……공작님……. 농담이 아니고 진짜 가보를……. 아니, 진짜 가보를…….”

멀리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는 공작은 환히 웃으며 보물을 제일 먼저 찾은 솔레아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