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당황한 하인이 솔레아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흥분한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아, 아무스! 어디 있어? 아무스! 왜, 왜 어디 갔어! 아무스!”
“아가씨, 진정하십시오. 아가씨!”
솔레아는 하인을 뿌리치고 순식간에 안대를 벗었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공작저 내의 넓은 부지에 서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자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들과 사용인들이 보였다.
솔레아의 고함 소리를 들었는지 디에르고 공작과 그녀의 오빠들이 타고 있던 마차에서 내려 우르르 달려왔다.
하지만 솔레아의 시선은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안대를 벗었음에도 솔레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아무스를 찾았다.
“아무스! 아무스!”
“레아, 아가!”
가장 빠르게 뛰어온 디에르고가 솔레아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솔레아는 야멸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놔!”
“……아가?”
오빠들 또한 솔레아를 불렀지만 이번 역시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마치 추위에 떨듯 솔레아의 윗니와 아랫니가 딱딱 부딪치기 시작했다.
“야, 너 왜 그래!”
“솔레아!”
“막내야, 막내야!”
주위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아무리 공작가 사람들이 비밀을 지켜 준다 한들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외부인인 나사니엘 백작가의 남매도 와 있었고,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인 카라샤펠까지 함께였다.
그런데도 솔레아는 옆구리에 액세서리처럼 달려 있던 손가락만 한 작은 검을 꺼내 순식간에 크기를 키웠다.
솔레아는 커다란 검으로 제 주변의 땅을 둥글게 긁어 내곤 독한 눈으로 사방을 훑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독기가 가득 서린 서슬 퍼런 두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솔레아의 자색 눈동자에 입을 틀어막은 채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라와 그녀의 오라비인 빌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고,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황녀도 보였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아무스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스, 아무스 어디 갔어.”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듯 말을 빠르게 뱉어 냈다.
“공작님. 아무스 어디 있어요? 또 아빠가 보냈어요? 왜요? 이번엔 나를 지키려고 아무스를 보낸 거예요? ……또?”
공작의 눈에 짙은 죄책감이 서리는 순간, 솔레아의 시야가 온통 새카매졌다.
커다란 검은 날개가 솔레아를 뒤에서 감쌌다. 숲을 닮은 시원한 체향이 폐부에 가득 들어찼다.
솔레아의 손에서 검을 빼낸 아무스가 그녀를 품 안에 안고 다독였다.
“나 여기 있어.”
날개 너머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사람이 아니었어?’
‘시커먼 날개가 공녀님을 감쌌어.’
‘공녀님이 검을 꺼내셨잖아. 대체 검이 어디서 난 거야?’
‘……왜 공작님이나 도련님들은 놀라지 않으시지?’
공작저 깊숙이 들어온 적이 없는 몇몇 사용인들은 아무스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웅성대는 소리가 커지자 아무스는 솔레아에게 들리지 않도록 주변의 소리를 차단시켰다.
둘만의 세계에 적막이 찾아왔다.
“괜찮아. 나 떠난 거 아니야. 젊은이가 도와 달라고 해서 소풍 준비 한 거야.”
작은 알에 들어온 듯한 안락함에 솔레아는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등을 다독이는 커다란 손의 박자를 따라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그래도 솔레아는 붙잡고 있는 아무스의 옷깃을 놓지 못했다.
“아무스. 갑자기 사라지지 마. 너도 없어지지 말라고.”
아무스는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솔레아를 내려다봤다.
어두운 곳에서도 환히 빛나는 그의 노란 눈은, 기억을 잃고 어둠 속을 거닐던 짧고도 긴 시간 동안 솔레아의 유일한 빛이었다.
“나 몰래 어디 가고 그러지 마.”
아무스는 커다란 손으로 솔레아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저를 등지고 있던 그녀의 몸을 제게로 돌렸다.
“나 봐, 내 얼굴 봐. 난 지금 네 앞에 있어. 나는 지금처럼 네가 부르면 올 거야. 어디 있어도, 네가 손을 내밀면 내가 잡을게.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혼자라고 생각하지도 말고.”
“……응.”
“저기 봐 봐.”
솔레아는 아무스가 턱짓으로 가리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스가 날개를 살짝 펼쳐 주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랫입술을 덜덜 떨며 제자리에 우뚝 서 있는 디에르고 공작은 솔레아가 있는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고개를 숙일 때 아래로 맑은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오빠들 역시 심각한 표정이었다.
티온은 사냥하기 직전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킨 맹수처럼 아무스를 노려보고 있었고, 헤이먼과 그레이 역시 울상이었다.
“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저렇게나 많아. 나만 있는 게 아니야. 그치? 저기도 봐 봐.”
사라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울먹거리며 빌에게 뭐라 말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마치 사라에게만 확성기를 가져다 댄 듯 그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오빠, 오빠가 가 봐. 공녀님 저기 안에 계시잖아. 공녀님 아프신가 봐. 오빠가 가서 뭐 좀 해 봐. 응? 공녀님 어떡해. 오빠아, 빨리. 아니면 검 줘. 내가 가서 공녀님 구할게. 빨리!”
“……사라는 내가 검을 휘둘렀는데도 날 걱정하네.”
“그럼. 넌 항상 강하고 따듯한 사람이었으니까.”
아무스는 솔레아를 꼭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네 곁에 나만 있는 게 아니야. 네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저렇게나 많아.”
“……응.”
솔레아는 천천히 아무스의 날개를 열고 그의 품을 벗어났다.
커다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조심스럽고도, 세찬 발걸음이었다.
“저기, 다들 미안해요. ……조금 당황해서 그랬어요.”
공작은 제게 다가온 솔레아의 손을 꾹 잡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고, 세 오라비들은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두에게 미소를 보이던 솔레아가 몸을 돌려 아무스를 바라봤다.
“아무스.”
아무스는 솔레아를 향해 따스한 눈빛을 보내다가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웃음기를 얼굴에 띠고 공작에게 말했다.
“젊은이. 깜짝 파티는 망한 것 같으니 그냥 지금 밝혀야겠어.”
그는 사용인들이 보는 앞에서 순식간에 용으로 변했다.
굳은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황녀마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집채만큼 커다래진 용을 바라봤다.
“……이봐, 자네 진짜 금수였군.”
“……저기요, 전하. 용한테 금수라니. 쟤가 저래 봬도 꽤 능력이 있어요. 예를 들면 뱀으로 변한다거나 옷을 찢는다거나, 아! 너 방금 또 옷 찢었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일부러 장난스럽게 얘기하던 그레이가 말하던 도중 갑자기 용에게 돌멩이를 집어 던지며 분개했다.
이로써 찢어 먹은 셔츠와 바지가 작은 배 한 척을 채울 정도가 됐다.
용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레이에게 답했다.
“어쩔 수 없었다. 원래는 젊은이가 부탁한 대로 구석에서 옷을 벗고 용으로 변하려고 했는데.”
“공공장소에서 옷 벗겠다는 소리를 당당하게 하네.”
용무스는 긴 꼬리를 휘둘러 정원의 흙을 그레이에게 흩뿌렸다.
“아푸! 퉤, 퉤! 이 용 새끼! 내가 너 뱀일 때 어깨에 짊어지고 다닌 게 몇 번이고, 어? 너 인간일 때 업고 다닌 게 몇 번인데!”
“그레이! 나랑은 결투 한 번을 제대로 안 해 줬으면서, 용은 업었나!”
“이 새낀 눈치가 없나.”
그레이와 빌이 또 아웅다웅 다투기 시작할 때, 디에르고는 솔레아의 손을 꼭 잡고 그녀에게 다짐했다.
“다시는 널 혼자 두지 않을 거다, 아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쑥스러운 듯 웃는 솔레아와 함께 마차에 타려던 공작의 어깨를 황녀가 붙잡았다.
“베르고 공. 오랜만에 둘이서 얘기나 할까요? 나 그대에게 듣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
“으. 전하. 왜 자꾸 우리 아빠랑 둘이 얘기하려고 하세요?”
“그대가 날 받아 주지 않으니 그대의 아버지라도 내 곁에 두려고 하는 거지. 그럼 우리가 한 집에 살게 되지 않을까?”
“악! 진짜 싫어요! 무슨 그런 농담을 하세요! 최악이야!”
솔레아가 평소처럼 질색하며 길길이 날뛰자 황녀가 깔깔 웃었다.
“오빠들에게 가, 영애. 네 애완 금수도 널 보고 있잖아.”
“금수 아니고 용이에요. 그리고 요즘엔 애완이란 말 안 쓰고 반려동물이라고 하는.”
“짝. 나 네 반려야?”
“왁! 깜짝이야!”
갑자기 커다란 얼굴을 들이민 용무스 때문에 황녀와의 대화가 중단되었다.
무섭지도 않은지 용의 커다란 송곳니를 쥔 솔레아가 손바닥으로 그의 콧잔등을 살짝 때렸다.
“대화 도중에 끼어들지 마!”
용무스는 커다란 앞발로 전혀 아프지 않은 콧잔등을 어루만지다가 공간을 찢었다.
“늦었어. 이제 소풍 가자, 레아.”
“아빠 처음부터 아무스한테 공간을 찢어서 가자고 할 예정이셨어요?”
공작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음, 공원 부지를 통째로 샀는데 좀 멀어서…….”
“전 진짜 근처 호수만 가도 괜찮은데!”
“그래도 우리 가족끼리 있는 게 편하지 않겠니.”
말로는 핀잔을 주면서도 솔레아는 신난 표정으로 검은 공간에 발을 들였다.
검은 공간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려던 찰나, 용무스가 솔레아를 입으로 물어 티온에게 던졌다.
“불곰 처형. 다른 처형들이랑 같이 마차에 타. 용의 바람이 밀어 주는 마차를 타 보는 건 처형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일 거야.”
“역시 전설 속의 금수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전하!”
랏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나무와 담을 향해 소리쳤다.
“제이드, 퀴온! 놀랐겠지만 안 따라와도 될 것 같아! 설마 용이 있는데 내가 다치겠어? 메리도 보고 있나? 보고 있으면 용에 대한 전설 다 찾아 놔! 내일까지!”
“으. 놀러 가시는데도 부하 직원한테 업무를 주세요?”
“그레이, 자네 청혼받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가 보군.”
그레이는 냉큼 솔레아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가 ‘누가 저한테 설명 좀 해 주세요!’라고 울부짖는 사라의 목소리에 빌과 사라가 탄 마차로 옮겨 갔다.
티온과 솔레아, 헤이먼이 한 마차를 탔고 공작은 다른 마차에서 황녀와 마주 보고 앉아 어색하고 불편한 공기를 나눴다.
사용인들의 벙찐 표정을 뒤로하고 아무스는 역류성 식도염 환자처럼 울대를 움직였다.
찢어진 검은 공간을 앞에 두고 늘어서 있는 마차들과 커다란 짐마차 두 대를 향해 아무스는 폭풍 같은 바람을 발포하듯 쐈다.
거대한 마차들이 미끄러지듯 검은 공간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고, 아무스 역시 뒤를 따라갔다.
검은 공간이 닫히기 일보 직전, 아무스가 틈 사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꺄아아악!”
사용인들이 아까 미처 지르지 못한 비명을 지르자 아무스는 파충류 특유의 노란 눈을 깜빡이며 마치 동굴에서 말하는 것처럼 울리는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다들 가만 서 있지 말고 가서 소문내. ……베르고는 검은 용이 지키고 있다고.”
아무스는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바람에 이야기를 실어 보내듯 나긋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그 자에게도 전해.”
그르렁대는 아무스의 위협이 베르고 공작저 전체를 울렸다.
“널 놓친 게 아니다, 이달론. 내 짝의 안전이 먼저였을 뿐. 반드시 네 영혼의 마지막 조각까지 갈기갈기 찢어 삼켜 주마.”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사용인들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서 정원사 포드릭이 쇠스랑을 휘두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아이고, 내 꽃! 내 잔디! 다 날아가네!”
아무스는 냉큼 틈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고, 곧이어 틈새가 메워지며 검은 공간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