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누가 공격할지도 모르니까 막내는 내 옆에서 자.”
“말 안 듣는 사람 목도 제대로 못 써는 티온 공자가 동생을 지키겠어? 영애. 내 옆에서 자.”
“저, 저, 전하. 제국의 미천한 빛이 인사를 드리고, 그, 그리고 공녀님이 원래 저랑 놀기로 약속도 해 두셨었고…….”
“어린 그대는 인사부터 제대로 배우지 그래. 미천한 빛이라니. 이제 황자도 죽고 없는데 어느 황족이랑 결혼을 꿈꾸고 있는 거야?”
“사라는 황족과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저도!”
“그러는 너는 인마, 나한테서 좀 떨어져라. 새끼야. 넌 왜 자꾸 들러붙어 있어!”
“그레이! 결투는 포기했지만 이제 우린 친구니까!”
“짝. 나랑 자.”
“정령들, 내 목소리 들리면 니네 주인 그냥 닥치고 자게 해 줘. 나 외로워서 울어.”
‘분홍이 울면 안 돼!’
‘응! 분홍이 안 울게 해 줄게!’
“으르릉.”
“짐승 같은 남자를 데려왔군. 진짜 짐승인가? 눈이 신기하게 빛나는군.”
“적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다.”
“어이, 금수. 눈 한쪽만 황가에 기부하도록 해. 연구하고 싶으니.”
“전하! 말 좀 곱게 하세요!”
“영애, 많이 아팠나 봐. 나를 어떻게 부르는지 잊었어?”
“랏샤. 그냥 좀 잡시다. 제발.”
“그래, 얼른 누워.”
“레아, 내 옆에 누워.”
“공녀님! 제일 푹신한 베개 여기 있어요!”
“솔레아. 너 그냥 침대 위에서 혼자 자.”
“솔레아를 혼자 침대 위에서 재우겠다고? 그레이 자네는 나를 불러 놓고 손님 대접을 이리 막 할 수가 있어?”
“아, 그럼 황녀 전하는 옆방 가서 침대에서 주무시든지요.”
“……치워.”
“뭘 치우란 말씀이세요?”
“랏샤! 방금 밖에 있는 호위 기사들이 우리 오빠한테 검 들이댔죠?!”
“거리가 있으니 검은 아니고 아마 독침일 거야.”
“랏샤! 제발, 좀!”
‘임시 주인! 이왕 길들였으니 황녀 옆에서 자!’
‘야, 이 바보야! 만점짜리 신랑 옆에서 자라고 해야지! 우리 주인이 누군지 잊었어?’
‘하지만…… 하지만 우리 주인은 자꾸 바지를 까먹는걸!’
‘지금도 벗고 있어?’
‘아깐 벗고 있었는데!’
‘아까 입었잖아!’
‘그럼 지금은 입었나?’
귓구멍이 터질 것 같았다.
‘내일이 소풍이라니! 너무 떨려서 잠이 안 와!’
라고 말하는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은 아마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 텐데.
소풍을 하루 앞둔 아이들도 이렇게 정신없이 시달렸을까.
재밌었던 것도 잠깐이지,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라트엘은 왜 안 오는 거야. 차라리 라트엘이 문이나 벌컥 열어 줬으면 좋겠어.
“큰오빠. 라트엘 왜 안 와?”
“……아. 2시까지만 해 주기로 약속했어. 그 이상 넘기면 자기 수면의 질이 깨진다고…….”
“젠장. 빌어먹을 워라밸.”
내 등 뒤에 바짝 붙어 있던 아무스는 사라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조심스럽게 주제를 바꿨다.
“친구들끼리 밤을 새울 때는 무서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들었어.”
“금수 자네 분위기 전환하는 데 일가견이 있군.”
“망나니 자네 무서운 이야기 잘할 거 같은데 해 보지 그래.”
서로를 금수와 망나니로 부르는 황녀와 아무스는 여전히 기 싸움 중이었다.
황녀가 해 준 무서운 얘기는 흥미진진하긴 했지만 내가 아는 종류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녀가 어릴 때 황제를 따라 사냥터에 놀러 나갔다가 독살을 당할 뻔한 적이 있었는데, 암살자를 피해 도망을 다니다가 납치를 당했고, 서대륙으로 가는 배에 시체가 되어 실릴 뻔했으며, 이 모든 일은 3 황비의 계략이었다는…… 어마어마한 궁중 암투였다.
졸고 있던 사라는 잠이 확 달아난 듯 연두색의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손을 모은 채 오들오들 떨었다.
“그래서 어떻, 어떻게 됐어요?”
“난 무사히 돌아왔고, 3 황비의 하나뿐인 아들이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지. 아, 떠나게 했지. 살아 있었으면 황태자가 됐을지도 몰라. 머리가 좋았거든, 제 어미와는 달리.”
“세에상에! 황자 전하는 전염병 때문에 가신 줄 알았는데!”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지. 3 황비도 머지않아 아들을 따라갔어.”
“어머, 상심이 크셨나 봐요…….”
“죽을 뻔했던 내 상심이 컸지. 그래서 아들 따라가라고 길 닦아 줬다.”
그레이가 질색하는 눈으로 황녀를 바라봤다.
“으. 전하. 사람 죽인 얘기를 뭐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세요.”
“이것만큼 무서운 얘기가 또 어디 있다고. 그렇게 따지면 티온 공자도 우리한테 말해 줄 무서운 얘기가 많을 텐데.”
동그랗게 모여 앉은 사람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티온에게 쏠렸다.
잠깐 주춤하던 티온은 주머니에서 안경집을 꺼내 안경을 쓰더니 숨을 깊게 한 번 들이마시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처음으로 참전한 마물 전쟁, 그러니까 다섯 번째 전투가 끝난 직후의 밤이었습니다…….”
아, 제발. 우리 언제 자.
울상을 지으며 마른세수를 했더니 내 뒤에 있던 아무스가 다른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에 마력을 담아 작게 말했다.
‘졸리면 자, 너 눈 뜨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게.’
‘됐어. 그게 무슨 징그러운 마법이야.’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뒤로 뻗어 아무스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아무스는 그런 작은 손길조차 기쁜 듯 내 어깨에 조심스럽게 머리를 기대 왔다.
티온의 이야기가 끝나자, 빌은 제 어깨에 기대어 잠든 동생을 안아 들었다.
‘빌! 사라 내 침대에서 재워요.’
‘공녀님의 침대에서 동생을 재울 순 없습니다!’
‘괜찮아요. 아무리 이불이 깔려 있어도 바닥에서 어떻게 재워요.’
결국 빌은 내 고집을 꺾지 못하고 사라를 침대 위에 누였다.
황녀는 내 옆에서 자겠다고 똥고집을 피우다가 벌떡 일어나서는 ‘이불을 아무리 깔아도 바닥이라 딱딱하군.’ 하더니 침대로 가 사라의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파랗게 동이 터 올 즈음의 시간이었다.
* * *
“레아, 네 오빠들이 사라졌다! 레아, 지윤아.”
디에르고 공작은 솔레아의 방에서도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자 다급하게 문을 열었다.
아이들이 모두 사라지다니, 혹시 그 마법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건가? 차라리 나를 데려가지, 왜 내 아이들을…….
들을…….
응……?
걱정했던 아이들은 모두 솔레아의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잠들어 있었다.
게다가 나사니엘 백작가의 남매도 있었고, 침대 위에서 가지런히 금발을 늘어뜨린 채 자고 있는 이는 아무리 봐도 황녀 전하였다.
“이게 대체 무슨…….”
그때 텅 비어 있던 공중에서 갑자기 하얀 쪽지가 생겨나더니 하늘하늘 아래로 펼쳐졌다.
‘장인 왔나.’
“이게 돌았나.”
그 아래에 글씨가 또 생겨났다.
‘어제는 모두 즐겁게 놀았다. 다만 너무 즐겁게 놀아서 새벽 5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어.’
“5시라고?”
지금은 겨우 7시였다. 잠든 지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면 노크 소리를 못 들을 만도 하지.
그러는 와중에도 쪽지에는 새로운 글씨가 나타났다.
‘젊은이들끼리 노는 데 나이 많은 장인이 끼면 분위기가 깨질 수 있어 부르지 않았다.’
“지는.”
‘9시에 일어나겠다. 짝이 자고 있으니 조용히 나가 줘.’
평소라면 일어나고도 남았을 시간에 다들 도롱도롱 자고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웃기고 평화로워 보였다.
디에르고는 조심스럽게 문손잡이에서 손을 떼 내고 틈새로 방 안을 살폈다.
황녀 전하는 마치 관에 들어간 시체마냥 온몸을 쭉 편 채 침대 위에서 고이 잠들어 계셨고, 그 옆의 사라는 혼자 이불을 덮은 채 모로 누워 있었다.
게다가 두 다리 모두 황녀 전하에게 올린 채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어쩐지 황녀 전하가 불쌍해 보이는군.
시선을 돌리자 창가와 가장 가까운 쪽에서 큰아들 티온이 홀로 찬 바람을 막으며 자고 있었다.
티온 옆에는 제 큰형과 똑같이 한쪽 팔을 베고 모로 누운 그레이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등진 채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불을 덮고 있는 그레이의 다리가 너무 길었다.
마치 사람 두 명을 합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우리 셋째 키가…… 맏이보다 컸던가?
호기심을 참지 못한 디에르고는 까치발을 한 채로 조심조심 방 안으로 걸어가 그레이가 덮고 있는 이불을 살짝 걷어 냈다.
“우으으응…….”
남의 집 아들이 내 아들 다리를 끌어안은 채 자고 있었다.
그레이에게 머리채를 잡힌 걸 보아 하니 잠들기 직전까지 싸운 게 분명했다.
디에르고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았다.
빌은 숨이 막히지도 않는지 상반신 전체에 이불을 덮고도 쿨쿨 잘만 잤다.
아이들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고개를 들어 방 안을 살펴보니 이상하게 헤이먼의 머리 위에만 햇빛 한 줄기 비치지 않고 그늘이 져 있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헤이먼의 곁에 정령들이 있는 게 분명했다.
꿈속에서 함께 노래라도 부르는지 헤이먼은 살짝 미소 지었다가 발갛게 볼을 붉혔다.
참 예쁘게도 자네.
객식구 아무스는 용일 때 생긴 습관인지 베개를 끌어안은 채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내 딸 옆에서.
……이 용 자식이.
디에르고가 주먹을 불끈 움켜쥐는 순간, 적의를 느꼈는지 아무스가 눈썹을 움찔거리며 눈을 살짝 떴다.
그러고는 조금 흐트러진 솔레아의 이불을 다시 덮어 주고 머리카락을 넘겨 준 뒤 도로 잠들었다.
방 한가운데에 서 있는 디에르고를 눈치 못 챈 걸로 봐선 그냥 본능적으로 한 행동인 듯 보였다.
……왜 내 딸 옆에서 자냐고 화를 낼 수가 없어 디에르고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 * *
11시가 되자, 라트엘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며 솔레아의 방문을 부술 듯 두드려 모두를 깨웠다.
정신없이 일어난 사람들은 팅팅 부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낄낄거렸다.
“사라.”
“예, 황녀 전하…….”
“나를 깔고 자더니 잘 잤나 보군.”
잠이 덜 깬 사라는 공포에 둔감했다.
작게 하품을 하고는 온몸을 동그랗게 만 채 이불을 덮더니 황녀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참신한 불충이네.”
“한 시간만 더 잘게요…….”
결국 라트엘에게 달달 볶인 앤이 문을 활짝 열고 무릎을 꿇었다.
“저어어언하! 일어나시옵소서!”
“난 일어났으니 이 어린 영애 좀 누가 데려가.”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바닥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빌은 제 동생 얘기에 눈을 번쩍 뜨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사라를 안아 옮겼다.
“솔레아 아가씨! 우리 아가씨! 눈이 숫자 3 모양이 됐어요! 아이고, 우리 아가씨!”
“앤. 거울 좀…… 아니, 어제 누가 자꾸……. 밤에 몰래 먹어야 된다고 부엌에서, 으하아아암. 하몽을 들고 와서 입에 자꾸 넣어서……. 헤이먼 너지?”
헤이먼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그런데 몇 초 지나지 않아 헤이먼 혼자 마사지라도 받은 것마냥 온몸의 붓기가 싹 빠지고, 얼굴에선 광채가 흘렀으며, 엉망이던 머리까지 깔끔하게 정리됐다.
“공자. 자네 마력이 늘었나?”
아직 잠이 덜 깬 헤이먼은 황녀의 질문에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
“저 사랑 많이 받아서요. 헤헤.”
……쟤 진짜 조금만 더 사랑받았다간 나라를 기울어지게 할 미인이 되겠는데.
같은 생각을 했는지 솔레아와 황녀는 서로 마주 보며 깔깔 웃었다.
“전하, 아가씨! 그만 웃으세요! 모두 씻으신 다음 아침 드시고 소풍 갈 준비하셔요!”
앤의 닦달 아닌 닦달에 모두 뭉그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먼저 씻는다.”
공장 기숙 생활을 오래 한 탓에 습관처럼 말한 솔레아가 아, 참, 하며 제 입술을 때리자 아무스가 끼어들었다.
“같이 씻자. 시간 단축되게.”
아무스는 티온에게 멱살이 잡혀 들려 나갔다.
“짝! 같이 씻, 악! 난 진짜 괜찮은데! 짝! 악! 너 이놈! 큰 처형! 사람이 아니구나!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결국 예정된 시간보다 더 늦게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아주 단단히 소풍 준비를 했는지 디에르고는 마차에 타기 전, 모두에게 안대를 나눠 줬다.
시야가 검게 변하자 조금 긴장한 솔레아는 하인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라타기 전, 무심코 아무스를 찾았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아무스. 나 손 좀 잡아 줘. 아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