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라트엘이 다시 문을 닫고 나가자 하나둘씩 고개를 들고 키득거렸다.
“아, 진짜 미쳤나 봐. 왜 그래, 다들.”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데 이번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또 라트엘이야? 교관이 너무 자주 오면 재미없다고 누가 한마디 해 줘.”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의 교관이 빙의됐다고 할 정도로 메소드 연기를 하고 있는 라트엘이라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을 텐데.
이상하게 아무도 문을 열고 들어오질 않았다.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똑똑똑 세 번 울렸다.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 더 빠르고 다급한 박자였다.
“누구세요?”
결국 내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전혀 생각도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사라.”
연한 갈색 머리카락을 대충 올려 묶은 사라 나사니엘 영애가 녹안을 빛내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흑, 공녀님!”
두 팔을 벌려 나를 꼭 끌어안은 사라는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웅얼대며 말을 이었다.
“공녀님. 아프셨다면서요. 엄청 아프셔서 밖에 못 나오신 거라면서요. 흑, 진짜 걱정 진짜, 진짜! 많이 했어요.”
“고마워요. 나 이제 괜찮아요.”
“정말요? 이제 하나도 안 아프신 거 맞죠? 안 아프시죠?”
“네. 그럼요.”
이달론에게 붙잡힌 난 수백 년 동안 환상의 시간 속에 갇혀 있었지만, 이쪽에선 고작 몇 주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사라의 얼굴을 보고 잊었던 그리운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건 당연하지만, 사라 입장에선 정말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사라, 걱정 많이 했어요?”
아기 토끼 같은 사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섭섭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당연하죠! 공녀님! 우린 친구잖아요!”
“아하하.”
“아닌……가?”
내 눈치를 살피는 사라를 꼭 안고 그녀의 정수리에 볼따구를 마구 비볐다.
“맞아요, 우린 친구예요. 고마워요. 나 걱정해 주고, 기억해 주고, 내게 마음 써 줘서, 정말 고마워요.”
“고맙, 제가 더 고맙, 감사합니다.”
당황한 사라의 옆에 서 있던 검은 그림자가 살짝 움직였다.
반쯤 열린 문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는데 빌도 함께 온 모양이었다.
“깜짝이야! 빌도 같이 왔네요.”
“공녀님…….”
빌 역시 아팠다던 나를 걱정했는지 울상을 지은 채 내게 두 팔을 벌려 왔다.
“빌.”
나 역시 두 팔을 벌리려는데 갑자기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티온, 내려…… 아무스?”
어느새 인간이 된 아무스가 온 몸에 이불을 칭칭 감은 채로 나와 사라를 한꺼번에 들어 올려 방 안으로 들여다 놨다.
“젊은 친구. 신사답게 행동해. 공녀님을 안으려고 하면 안 되지.”
“너나 신사답게 행동해. 가서 옷 입고 와.”
아무스는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방을 빠져나가 손님방으로 향했다.
방 안으로 들어온 빌과 사라가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이불이 사방에 깔려 엉망이 된 방을 둘러봤다.
하지만 그들은 곧 어색하게 이불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다.
“잠옷을 입고 왔네요, 둘 다?”
“그레이가 잠옷을 입고 오라고 했습니다.”
“오빠가 빌이랑 사라 둘 다 불렀어?”
“어. 가족끼리 있는 것도 좋긴 한데 친구들도 있으면 네가 더 재밌어할 것 같아서.”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한 그레이는 제 옆으로 다가와 선 빌과 투닥거리며 싸움을 시작하긴 했다.
“왜 내 옆에 오냐고. 너 오늘 우리 솔레아 친구로 온 거 몰라?”
“공녀님보다는 너랑 더 친하니까!”
“야. 우리 오늘 상황극이 말하자면 긴데……. 이따가 라트엘이 와서 문 벌컥 열거거든. 그때 절대 깨어 있는 걸 들키면 안 되고 자는 척해야 돼.”
“재밌겠다!”
“어, 그치? 알아서 잘해라.”
“라트엘이 오면 나한테 말해 줘. 내가 저기 누워서 코를 골고 있을게!”
“알아서 잘하라고 했잖아, 이 자식아.”
계속해서 싸우던 빌과 그레이는 아무스가 다시 등장하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헤이먼이 그레이의 귀에다 대고 속살거리는 모양새를 보아 하니 뱀으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해 놓고서 왜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냐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스는 불퉁한 얼굴로 팔짱만 끼고 있었다.
그때 사라가 조심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왔다.
“공녀님, 공녀님.”
“네?”
“저분은 이렇게 방 안이 어둑어둑한데도 눈이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시네요.”
“……아, 하하. 하하하. 그런가? 저는 잘 모르겠는데?”
뱀이니까요. 아니, 용이니까요.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며 사라가 말을 이었다.
“꼭 짐승 같은 안광이에요!”
……이래서 눈치 빠른 귀족 영애는 싫다니까.
나는 얼른 손을 뻗어 아무스의 눈을 가렸다.
“하하하. 얘가 어릴 때 약을 잘못 먹어서, 밤 되면 눈이 좀 번쩍거리고 그러기도 해요. 약간, 그, 체질이 조금 바뀐 거죠. 동물적으로.”
“우와!”
신기했는지 사라는 박수를 짝 치며 신기해했다.
그때 또 복도에서 터벅터벅 발소리가 울렸다.
아까 빌과 사라가 찾아왔을 때는 두 명이었음에도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이번엔 꽤나 당당한 발걸음인 걸 보아 하니 십중팔구 라트엘인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모두에게 손짓으로 눕자는 신호를 보냈다.
사라는 냉큼 이불 안으로 쏘옥 들어갔고, 빌은 누울 자리를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다가 그레이에게 오금을 차여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듯 쓰러졌다.
티온은 제 옆자리를 한껏 넓혀 놓고 있었다.
저기가 제일 넓어 보이니까 저기로…….
가려던 순간 아무스가 커다란 날개를 꺼내 나를 감싸더니 그대로 이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대책 없는 미친놈아.
마침 빌과 사라가 이불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봤으면 어쩌려고.
애써 놀란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고개를 들어 아무스를 바라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미쳤어? 오빠들 다 있는데 왜 이래!’
‘나랑은 포옹하는 것도 싫어하면서. 저 젊은 친구한테는 왜 두 손을 내밀어? 나는 기다릴 거지만, 네가 기다리라고 하는 만큼 기다릴 거지만……. 너도 내 생각 가끔 해줘.’
‘포옹 때문에 그래?’
사라의 말대로 아무스의 두 눈은 두꺼운 이불에 파묻혀 어둠만이 가득한 곳에서도 노랗게 빛이 났다.
예전이었으면 무서워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스는 내게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공포를 준 적도, 불안을 준 적도 없었다.
‘너 기다린다며.’
‘……기다리겠다고 했지, 질투하지 않는다고는 안 했어.’
뚱한 얼굴이 된 아무스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며칠 전에도 별것도 아닌 문제로 싸우기도 했고, 이번에도 그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 어쩐지 아무스가 귀엽게 느껴졌다.
나는 두 팔을 살짝 벌려 아무스를 살며시 안았다.
‘자. 됐지?’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날개 안에서 느껴지는 아무스의 체온이 순식간에 훅 올라갔다.
‘야, 너 열나?’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그의 얼굴을 만지자 뜨거운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그때 티온과 그레이가 피부 가죽까지 뜯어낼 기세로 이불을 잡아당겼다.
다행히 그와 동시에 아무스가 나를 감싸고 있던 검은 날개를 순식간에 접었다.
하지만 나를 안은 단단한 두 팔은 그대로였다.
물론 나는 이불이 젖혀짐과 동시에 놀라서 팔을 떼고 몸을 움츠렸지만.
“라트엘 갔는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너네. 어? 지금. 어? 가족들이 버젓이 두 눈 뜨고 보고 있는데. 돌았냐?”
“……죽인다. 용.”
“용이요?”
“무슨 용 말씀이십니까, 티온 공자님?”
빌과 사라의 질문에 티온의 움켜쥔 주먹이 살짝 떨렸다.
“……서 못 해. 이 파렴치한 놈.”
“아.”
“하긴 그러실 만도 해요, 어느 댁 공자님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공녀님은 아무도 못 줘요! 우리 공녀님은 아직 결혼 안 하실 거란 말이에요! 저랑 둘이서도 소풍 가기로 했었는데!”
아무스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이제야 내 적수가 나타난 건가.”
나는 손으로 아무스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눈. 눈. 눈! 눈 좀 그렇게 뜨지 마. 안 그래도 밤에 보면 무서운 눈을 왜 그렇게 뜨고 이 어린 사람을 쳐다봐.”
용인 상태로 큰 귀가 달려 있었다면 분명히 아래로 축 처지고, 펼쳤던 날개도 꾸깃꾸깃 접었겠지.
하지만 인간이라 아무스는 그냥 조용히 구석으로 가 이불로 몸을 똘똘 말고 내게 등을 보인 채 누워 버렸다.
“짝은 맨날 나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해.”
아, 이상하다.
아무스 저거 맨날 저러는데 왜 점점 귀엽게 느껴지지. 웃기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면서 아무스를 보고 있었는지 헤이먼이 굳은 얼굴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너 아직 한 살 안 됐어. 너 어디 못 보내. 너 아직 우리랑 쌓아야 될 추억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넌 한 살도 안 된 애가 왜 남자 친구를 사귀려고 하는 거야?”
“공녀님이 한 살이 안 되셨다니요?”
사라의 질문에 내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긴, 정상인이 들으면 이해 못 할 논리지.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어떻게든 농담이라고 해명하려는데 헤이먼이 진지하게 답했다.
“솔레아가 건강해진 이후부터 새로운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기로 했거든요. 기억도 거기서부터 시작됐으니, 저희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지 아직 1년이 안 된 거죠.”
무슨 궤변이야.
“아! 그럼 공녀님이 이번에 크게 아프셨으니까 또 리셋 해야겠네요! 공녀님 아까 태어나신 걸로 해요!”
……사라도 정상인이 아니었던 걸까?
“좋은 생각입니다. 나사니엘 영애.”
“사라라고 불러 주세요. 공자님.”
“헤이먼이라 부르시죠.”
티온은 마음에 든다는 듯 나를 눕혀 놓고 아까 그 동화책을 가져와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 아까 태어난 공녀님이 가족들과 살고 있었어요.”
“아. 좀. 오빠!”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모두 키득거리고 있는데, 노크도 없이 방문이 끼익 열렸다.
도로 냉큼 자리에 누웠지만 라트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누구지, 싶어 실눈을 뜨려는데 그레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맞다. 한 분 더 불렀다. 이리 들어오세요.”
“뭐? 누구?”
“카라샤펠 황녀 전하.”
“카라샤펠 황녀 전하?”
일기장을 통해 모든 기억을 찾긴 했어도 수백 년의 시간을 홀로 보낸 탓인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카라샤펠 황녀 전하가 누구야?”
그때 방 안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대, 나를 잊었어?”
황녀가 직접 들고 온 마력 램프가 그녀의 길게 늘어뜨린 금발과 새파란 눈동자를 비췄다.
아…….
하필 지금 선명하게 기억이 떠오르네요.
나는 최대한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카라샤펠 황녀 전하가 누구야? 대단한 사람이시지∼”
잠깐 정적이 흐르던 방 안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황녀는 램프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깔깔 웃으며 내 앞에 앉았고 사라 역시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정작 말을 꺼낸 나는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들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들 그만 웃어요.”
“많이 아팠던 거야? 어떻게 나를 잊어?”
“네. 심하게 아팠어요. 그러니까 그만 웃으시라고요.”
“내가 호위 두 명만 데리고 황궁에서 몰래 빠져나오기가 쉬운 줄 알아? 일부러 드레스 코드까지 맞춰 입고 왔더니.”
“아니, 어떻게 저랑 똑같은 잠옷을 입으셨어요?”
“영애가 너무 걱정돼서 마음으로 응원이라도 하고 싶었어. 그래서 같은 옷을 입었지.”
랏샤가 흐르지도 않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콕콕 닦아 내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나를 휙 잡아당겼다.
또 아무스였다.
“이번엔 확실하다. 당신이 내 적이로군.”
“……처음 보는 놈이긴 한데 네놈 생긴 걸 보아 하니 나도 느껴진다. 간만에 호적수를 만났군.”
둘은 서로의 눈을 피하지도 않고 신경전을 벌였……건 말건,
제발 그만. 내일 소풍 간다면서요. 이제 그냥 자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