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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128/192)

128화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 정도면 모르는 게 더 힘들었다.

하루 종일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던 아무스가 눈에 보이지 않아 찾아보면 공작님의 방에 가 있거나, 그레이나 헤이먼, 티온과 붙어 있었다.

아무스 하나만 그러면 모르겠는데 앤마저 거동이 수상했다.

앤이 보이지 않아 부르면 복도 저 끝에서 헐레벌떡 뛰어오곤 했다.

공작님의 집무실이 있는 방향이었다.

뭔가…….

이 저택에서 솔레아만 모르는 은밀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괜히 마음이 불안해져 솔레아는 지나가는 라트엘을 붙잡고 물었다.

“있잖아요, 라트엘.”

“예, 아가씨. 편히 말씀하십시오.”

정작 편히 물으라고 한 라트엘도 손에 한가득 들고 있는 종이뭉치를 뒷짐을 지며 등 뒤로 숨겼다.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죠.”

“제가 아가씨한테 숨기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가씨가 제게 숨기는 게 있으시겠죠.”

“내가 뭘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솔레아를 보며 라트엘은 빙긋이 웃었다.

“다들 쉬쉬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가씨가 갑자기 용을 타고 다니지 않으십니까? 마력을 갖게 되신 것도 신기하고, 아니 그리고 마법사의 목은 왜 베셨습니까? 이 경우엔 ‘왜’가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하겠군요.”

“어, 그건…….”

잠깐 말을 흐리던 솔레아는 주변 눈치를 살피곤 조심스럽게 말했다.

“말하자면 엄청 긴데 그놈이 사실 진짜 굉장히, 매우 나쁜 놈이었어요.”

“그랬습니까?”

“네. 너무 갑자기 죽어서 조금 혼란스럽겠지만, 제가 관련된 자료를 찾고 있거든요. 즈, 증거 같은 것도요.”

“그렇군요.”

“네. 아무튼 그, 제가 막 갑자기 살인자가 됐다니까 무섭고 놀라셨겠지만……. 마법사가 됐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마땅한 해명을 찾지 못했는지 솔레아는 약간 허둥거리며 말을 끝맺지 못하고 줄줄 이어 나갔다.

물론 라트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변함없이 무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전 괜찮습니다.”

“정말요?”

“네, 정말요. 전 괜찮습니다. 아가씨는 여태 그래 오셨듯, 편안히 지내시면 됩니다. 저는 이 집 사람이잖습니까? 아가씨 또한 베르고의 소중한 일원이고요.”

“네에…….”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6시라.”

“아. 미안해요. 내가 오래 붙잡고 있었네요.”

고개를 꾸벅 숙인 라트엘이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저택을 빠져나간 후에야 솔레아는 깨달았다.

‘숨기는 거 있죠?’

라는 질문에 대한 그 어떤 답도 듣지 못했다는 걸.

“아, 낚였다.”

하지만 퇴근한 라트엘에게 후진이란 없었다.

* * *

“솔레아.”

“네, 공작님.”

가족들이 다 모인 저녁 식사에서 공작님이 때아닌 진지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말하기 쉽지 않은 얘기인지 공작님의 얼굴 역시 꽤나 차갑게 굳어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듣거라.”

“……네.”

왜 무서운 얼굴을 하고 말씀하시는 거지.

나도 모르게 공작님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내일은 소풍을 가는 날이다.”

“네. 알겠습…… 네?”

잘 못 들었습니다?

“말 그대로란다. 우린 내일 소풍을 간다.”

공작님은 두 팔을 테이블 위로 올려 깍지를 끼고는, 전쟁을 진두지휘하는 장군처럼 사뭇 날카로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빠들에겐 일주일 전쯤 말했고, 네게는 하루 전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지금 말해 주는 것이다.”

“아, 네……. 소풍, 내일이군요…….”

“걱정 마라. 아주 단단히 준비했으니.”

“처음 소풍 얘기를 꺼낸 날로부터 거의 한 달 가까이 지나서 잊으신 줄 알았어요.”

그레이가 놓친 포크가 땡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너어는 진짜. 어? 듣는 오빠들 서운하게 소풍 잊었단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하니.”

“좀! 놀리지 마. 말한 나도 까먹고 있었다고.”

“……잊고 있었어? 나는 막내랑 소풍 간다고 해서…… 옷도 새로 맞췄는데.”

티온의 흉터가 찌글 구겨지며 길고 날카로운 눈꼬리가 축 처졌다.

“티온? 티온. 오빠. 아니야. 제발. 눈 다시 올려. 입꼬리도 올려. 웃어. 웃어. 감자 입에 집어넣어. 밥 마저 먹어. 힝구 하지 마. 반칙이야.”

“……응.”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티온이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공작님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내일.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소풍을 간다.”

“네, 알겠어요. 몇 시에 일어나면 될까요?”

“아침에 깨우마. 멀리 가야 하니까 푹 자두렴.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으니 걱정 마라. 긴장할 것 없다.”

그러는 공작님이 더 긴장하신 것 같은데.

입맛이 없으신 건지 그릇 위엔 음식들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이후로 소소한 얘기를 나누다가 공작님은 먼저 방으로 올라가셨다.

그의 그릇엔 여전히 음식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왜 저러시는 거지. 나랑 소풍 가는 게 부담되시는 건가.

혼자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누워 있는데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나야.”

“나도.”

“……나도 있어.”

방문을 열어 보니 그레이와 헤이먼, 티온이 잠옷 차림으로 복도에 서 있었다.

“……왜, 왜 여기 이러고 있어? 이 야밤에?”

그레이는 내 질문엔 답하지도 않은 채 문을 더 활짝 열고 방 안으로 몸을 쭉쭉 밀고 들어왔다.

“야, 내가 다 알아봤어. 걱정하지 마.”

“그래, 레아. 우리는 괜찮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대체 뭐가!”

소리를 빽 지르는데 티온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는 게 보였다.

‘곰돌이와 친구가 된 꼬마 공주님♥ʕ•⍵•҂ʔ♥’

“……나가.”

티온이 황급히 동화책을 등 뒤로 숨겼다.

“밤에 잠을 잘 못 잔다길래!”

잠이 오지 않았던 건 사실이긴 했다.

그도 그럴 게, 공작님이 너무 걱정이 태산 같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셨으니까…….

“너 무슨 생각 하는지 다 들린다. 그런 거 아니니까 여기 누워.”

“아, 내 나이가 몇인데 오빠들이랑 같이 누워.”

“야. 괜찮아. 괜찮아. 너 악몽 꾸면 뱀한테 잡아먹으라고 할게.”

그레이가 챙겨 온 커다란 상자를 열자 뱀이 된 아무스가 억울하다는 듯 노란 눈을 빛내며 쒹쒹 숨을 내뿜고 있었다.

“이, 이거 동물 학, 아니 잠깐만. 인간 학대, 아니…… 어, 아무튼 학대 아니야?”

“같이 가고 싶다는데, 인간 모습으로 한방에 있는 건 좀 그래서 뱀으로 변하라고 했어. 너 악몽 꾸면 얘가 먹는대.”

“그럼 오늘 여기서 다 같이 자겠단 소리야? 그게 말이 돼?”

목소리가 꽤 날카로웠는지 티온이 들고 있던 동화책을 테이블 위에 놓아두곤 홀연히 방을 떠나 버렸다.

“아니, 오빠! 잠깐만!”

그런데 몇 초 지나지 않아 티온이 집채만 한 이불들을 한가득 들고 돌아왔다.

“응, 막내야. 왜?”

“이불……을 왜?”

“아. 그레이가 아버지의 소풍은 내일부터지만 우리의 소풍은 오늘부터래서.”

“……뭐?”

티온이 바닥에 이불을 깔기 시작하자 헤이먼이 도왔다.

“그레이. 넌 안 도와?”

헤이먼이 한마디 꺼내자 뱀무스와 장난을 치고 있던 그레이가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힝. 솔레아만 없으면 그레이가 이 집 막낸뎅! 막내는 그런 거 안 하는데!”

이젠 그레이가 하는 저런 말이 농담인 걸 알아서인지 웃음이 터졌다.

뱀무스가 냉큼 상자에서 튀어나와 그레이의 머리를 앙앙 물어 댔다.

“아! 아! 아프다고! 이 뱀 대가리 새끼! 아, 알았다고. 한다고!”

그레이는 제 머리를 깨물고 있는 뱀무스를 어깨에 매단 채로 이불들을 내 방 바닥에 깔았다.

넓던 방이 어느새 폭신한 이불들로 가득 찼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오빠 니네 정말 왜…….”

“야. 다 들었어. 이렇게 하는 거라며?”

그레이가 내 손목을 잡고서는 나를 빈자리에 눕혔다.

그러자 티온이 내 머리를 들어 올려 손수 베개를 받쳐 주었고, 헤이먼은 도톰한 이불을 덮어 줬다.

그런 뒤 다들 내 옆과 머리맡에 자리를 잡고는 앉거나 누웠다.

“대체 왜들 이래?”

“괜찮아. 오늘을 위해 누군가에게 특별히 부탁도 했어.”

“너희 말고 또 누가 와?”

그때 복도 밖에서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헤이먼은 재빨리 일어나 정령들을 이용해 방의 불을 모두 꺼 버렸다.

저거 아주 이젠 지가 주인이네.

노크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자라. 떠들지 말고.”

……라트엘?

물어보고 싶었지만 티온이 이불로 내 온몸을 휘감고 입을 막아 버려서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그레이는 태연하게 코를 골고 있었다.

방금까지 떠들었으면서 갑자기 코를 골아? 제정신인가?

“너희 말소리 밖에 다 들린다. 나중에 또 올 거니까 그만 떠들고 자.”

왜 반말을 하는 거야, 라트엘?

근데 이 상황 너무 익숙하잖아!

라트엘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헤이먼이 티온의 등짝을 퍽퍽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형! 미쳤어? 솔레아 질식할 뻔했잖아!”

“미, 미안. 근데 원래 밤에는 교감한테 들키지 않아야 된대서.”

“교감 아니고 교관 아니야?”

티온의 이불에서 겨우 빠져나온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

티온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제야 이해가 가네.

이 오빠들은 지금 나랑 수련회라도 온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서 키득거렸다.

“왜 이러는 거야, 대체. 이 저택이 다 우리 집인데 왜 이런 놀이를 해?”

“네 말처럼 우리 집이니까 이런 놀이를 하지. 걱정하지 마. 라트엘한테 초과 수당에 야근 수당까지 주기로 했어. 네 돈 아니고 아빠 돈에서 쓱싹했어.”

따스한 목소리로 영주인 아버지 돈을 횡령했다는 말을 한 헤이먼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소풍 전날엔 어차피 잠도 잘 안 온다면서. 그러니까 이렇게 놀면 되잖아.”

“그래.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놀겠어. 형 또 전쟁터 나가서 마물 죽이고 오면 어떡해.”

티온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이제 손에 피 안 묻힐 거야.”

“형, 표정이 왜 그래. 이달론 죽이고 온 솔레아 민망하게.”

장난기 다분한 그레이의 말투에 나는 웃었지만 헤이먼은 정색하고 그레이를 베개로 후려쳤다.

“너 진짜 미쳤냐? 솔레아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걸 농담이라고 해?”

“아이씨, 농담으로 계속해야 얘가 그 일을 가볍게 여기고 넘기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마!”

헤이먼이 베개로 계속 퍽퍽 소리가 나도록 그레이를 때리자 그레이 역시 옆에 있던 커다란 베개로 헤이먼을 가격했다.

“억!”

얼굴을 정통으로 맞았는지 헤이먼이 휘청거렸다.

군사 훈련을 받아 온 그레이보다 헤이먼이 약한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헤이먼, 괜찮아?”

내 질문에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허공에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누가 우리 아기 때렸어?’

‘누가 우리 분홍이 때린 거야?!’

‘분홍이 또 아야 했어?’

‘꼬마 호랑이가 그랬구나!’

‘처형이 그랬구나!’

정령들은 큰 소리로 말하며 허리에 손을 짚더니 저마다 작은 베개를 하나씩 만들어 그레이를 둘러싸고는 밀가루 반죽 치대듯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아, 잠, 잠깐만. 야. 공정하지가. 아. 아야. 아. 베개에 돌멩이 넣은 정령 누구야. 아! 나와. 야. 니네 주인 내 어깨 위에 달려 있, 이 새끼 어디 갔어?”

아무스는 이미 재빠르게 내 어깨 위로 자리를 옮긴 이후였다.

정령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방 안을 뛰어다니던 그레이는 결국 헤이먼을 끌어안았다.

정령들이 공격을 멈추려던 그때, 다시 방문이 벌컥 열렸다.

서 있던 그레이와 헤이먼, 앉아있던 나와 티온은 동시에 철퍼덕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너희 자꾸 안 자고 떠들지?! 단체로 기합받고 싶어?!”

……라트엘은 그냥 극단에 들어가지 그랬어요. 연기를 너무 잘하는데.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나는 입을 꾹 틀어막았다.

다들 유치하기 짝이 없는데도, 마냥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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