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192)

127화

디에르고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그건 아주, 아주 난잡한 외설 문학이었는데.’

겨우 기억을 찾아 마음을 열어 가는 아이에게 그런 문란한 책은 정신 건강에 해로우니 읽지 말라고 해야 할까.

혼냈다가 아이가 영영 마음을 닫으면 어떡하지.

문득 에일린이 미치도록 보고 싶어져 디에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여보. 아이를 키운다는 건 정말…….”

아무스가 산통을 깼다.

“장인. 나는 그대의 여보가 아니다.”

“……네놈 부른 거 아니니까 나가. 그리고 장인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무스는 조금 시무룩해진 모습으로 방을 나섰다.

‘그래도 장인을 도왔으니 나도 소풍에 데려가겠지.’

장인이라 부르지 말라는 디에르고의 말은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소풍 갈 생각에 들뜬 아무스는 어느새 꼬리가 바지를 찢고 밖으로 튀어나온 것도 모른 채로 신나게 복도를 걸었다.

검은색의 길고 두터운 꼬리가 좌우로 흔들릴 때마다 바지 뒷부분 박음질이 조금씩 뜯어졌다.

붕붕 소리를 내며 공포스럽게 움직이는 꼬리보다도 조금씩 힘을 잃어 가는 바지가 더 위태로워 보였다.

그때 어디선가 슈퍼맨처럼 날아온 앤이 아무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흐압!”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약간 놀라긴 했지만 어린 인간이니 그럴 수도 있지, 싶어 아무스는 태연히 말했다.

“인간. 너도 알다시피 내겐 짝이 있다. 이런 건 옳지 않아.”

“예, 이런 건 옳지 않아요. 용 님.”

앤은 손에 들고 있던 침대보를 아무스의 허리에 꽉 묶으며 답했다.

그제야 아무스는 제 꼬리가 사방팔방으로 정신없이 날뛰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또 큰 실례를 범할 뻔했군. 고맙다. 들떠서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앤은 사람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봐요.”

“짝과 소풍을 갈 거다.”

“……아가씨랑요?”

“응.”

“싸우셨는데……. 같이 가시게요?”

앤의 질문을 듣고서야 아무스는 지금 솔레아와 다소 소원한 관계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되돌리기엔 너무 많이…… 들떠 있었다.

처음으로 다 함께 가는 소풍인데.

아무스의 긴 눈꼬리가 살짝 아래로 내려왔다.

“가고 싶은데, 몰래 가면 안 되겠지.”

“아무래도 몰래 가시는 건 조금 그렇죠. 저도 아가씨 몰래 책을 사 모으다가 들켰을 때 엄청 혼났는걸요.”

“그렇구나.”

아무스는 조금은 단조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용 님이 외양은 젊어 보이셔도 천 살이 훌쩍 넘은 할아버지시니까 제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조금 도와드릴게요!”

“……공경이 아니라 공격 같은데.”

앤의 악의 없는 악담에 올라갔던 아무스의 입꼬리가 다시 천천히 내려왔다.

아무스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한 앤은 복도를 앞서 걸으며 꽤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말했다.

“제가 이래 봬도 로맨스 소설을 엄청 많이 읽었거든요. 인외존재? 벌써 너무 맛있다.”

“오, 나를 먹어 보려는 인간은 꽤 오랜만이구나. 꿈이 용사가 되는 거니?”

“아뇨!”

앤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질색하더니 어디선가 빠르게 바지를 구해 왔다.

“용 님. 이거 입으세요!”

“고맙구나. 그런데 누구의 바지지?”

“이 방에 머무시던 서대륙 마법사님의 바지인데 어느 날 갑자기 떠나셨더라고요.”

“그래?”

아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떠난 지 오래되었어도 마법사가 입었던 것이라면 마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텐데 이 바지에 남은 마력은 그저 평범한 일반인의 것에 불과했다.

어쩌면 서대륙의 마법사라고 속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거겠지.

인간은 늘, 용인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했다.

아무스를 서대륙 마법사의 방으로 밀어 넣은 앤은 방문을 닫고 복도에서 열심히 로맨스의 정석에 대해 설파했다.

“용 님. 듣고 계세요? 그러니까 요즘 대세는 직진 남주거든요. 다른 여자 눈에 담으면 죽여 버릴 거예요.”

“역시 네 꿈은 용사인가 보구나. 아직 늦지 않았으니 도전해 보렴. 마물은 세상의 끝자락에 넘치도록 있단다.”

방 안에서 마물 전쟁 참전을 추천하는 미친 용 대가리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게 아니라요, 용 님. 다시 로맨스 얘기로 돌아오자고요. 우리 아가씨는 평범한 직진 그런 걸로는 부족해요. 아가씨는 원체 타고나시기를 특별하게, 다정하게, 아름답게, 사랑 만빵으로 태어나셨어요. 마음이 따뜻한 분이시잖아요. 사랑받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세요!”

“그렇게 보인다니 내가 다 기쁘구나, 어린 용사야.”

“아니, 용사 아니라니깐요. 아무튼 그런 우리 아가씨께 그저 그런 직진 고백은 부족할 수 있어요. 제가 옆에서 아가씨를 모시면서 느낀 건데 용 님의 미모와 멋진 목소리로도 효과가 미미한 것 같더라고요.”

“……직진만으론 부족하다라. 확실히 하늘을 빙글빙글 돌며 날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 적응한 모양이야.”

“적응. 그래! 말씀 잘하셨어요! 우리 아가씨는 지금 용 님의 직진 사랑에 너무 적응하셔서 당연하다 생각하시는 걸지도 몰라요!”

흥분한 탓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진 앤이 코가 거의 맞닿을 정도로 방문에 바짝 붙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 아가씨는 용 님의 직진 사랑에 익숙해지셔서 이게 얼마나 멋지고 특별한 일인지 모르시는 걸 거예요! 이럴 때는 무관심 작전이나 질투 작전 그런 게 잘 먹혀요.”

“무관심? 질투?”

“네, 네!”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신이 난 앤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무관심은 아예 관심을 끄고, 마치 너를 잊었다는 듯이 구는 거고, 질투는 말 그대로 질투가 나게끔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는 거예요. 물론 조금 힘드시겠지만 짝사랑이 다 그래요. 그래도 이런저런 고생을 겪다 보면 결말을 찾아가니까…….”

앤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레 열린 문에 앤이 몸을 휘청거리며 앞으로 넘어가려던 때, 새로운 옷을 입은 아무스가 그녀의 왼쪽 어깨를 살짝 잡았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맞췄다.

“어린 용사는 아주 똑똑하구나.”

“정말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앤을 보며 마주 웃어 준 아무스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순간도 짝을 잊어 본 적이 없으니 그런 연기는 할 수 없고, 짝이 질투하는 모습 역시 보고 싶지 않아. 나는 괜찮아.”

“아니 그래도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문을 조금 더 열어젖힌 아무스는 방 밖으로 나와 앤을 돌아봤다.

“네 말대로 그 사람은 아주 특별하잖니.”

“……네.”

“그럼 1,000년을 기다린 이의 사랑을 올곧게 받아도 되겠지. 다행히 나는 수명이 길어 오래 기다릴 수 있으니.”

“아, 아니 그러다가 꼬부랑 할머니가 되시면…….”

아무스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웃을 때 눈꼬리가 접히는 모양 그대로 주름이 생기면 예쁘겠다. 그 사람 머리가 은빛으로 하얗게 물들면 꼭 보석 같지 않겠니.”

다정했지만, 물론 아주 다정한 말이었지만.

어리디어린 로맨스 광인에게는 조금 부족했다.

“젊고 창창할 때! 힘이 넘칠 때! 미친 듯이! 서로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을 하셔야죠! 아니, 해 주세요!”

주먹을 꼭 말아 쥔 채 말하는 앤의 모습에선 패기가 넘쳐흘렀다.

아무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어린 용사는 정말로 활기가 넘치는구나! 내 보기엔 아가 불곰보다 너의 생명력이 더욱 강하고 아름다우니 마물을 상대하기엔 네가 더 알맞겠다!”

결국 앤의 양쪽 입꼬리가 아래로 뿌엥 내려갔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이었다.

어린애한테 자꾸 전쟁터에 나가서 마물을 썰고 다니라고 하니.

앤 입장에선 눈물이 핑 돌 수밖에 없었다.

“용 님은 최악이에요. 우리 아가씨는 황녀님을 길들이실 거라고요! 됐어요! 아가씨는 결혼 안 하실 거고 가족분들이랑 천년만년 사실 거고, 용 님은 진짜, 용 님은……. 인외존재 이제 안 읽어요. 흐어엉.”

눈물을 흩뿌리며 사라지는 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무스는 조금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방금 저 어린 용사에게 상처를 입힌 것 같아.”

‘응. 주인 방금 되게 쓰레기 같았어.’

‘앤은 좋은 하녀인데.’

‘임시 주인을 엄청 좋아하는 착하고 좋은 하녀인데.’

‘주인이 울렸어.’

‘주인이 사지로 내몰았어.’

‘앤은 검 드는 거 싫은데.’

‘맞아. 책 읽는 거 좋아하는 앤데.’

‘맞아. 저번에 읽은 「야설을 읽다가 남편에게 들켰다」 그거 재밌었는데.’

‘맞아. 북부대공이 나오는 클리셰였지만 묘사가 세밀해서 좋았어.’

‘맞아. 특히 야설을 읽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남편이 소설 내용처럼 해 보자면서 아내를 안아 들었을 때!’

‘응! 첫날밤 부분에서 두 사람의 감정 묘사와 그에 따른 신체적 변화가 점진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그냥 야해서 좋았다고 해.’

‘응. 개좋아.’

어느새 저들끼리 야설 평론을 시작한 정령들을 내버려 두고 아무스는 복도에 난 창문을 열었다.

넓게 펼쳐진 후원과 그곳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제 짝이 보였다.

높이 올려 묶은 새빨간 머리카락이 그녀가 땅에 발을 디딜 때마다 조금씩 흔들렸다.

아무스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아무에게도 닿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아, 나는 더 기다릴 수 있어. 네가 그러고 싶을 때 날 봐 주면 돼. 나는 그거면 돼.”

훌쩍거리며 아무스가 있는 쪽의 반대편 복도를 걸어가던 앤은 어느새 공작의 집무실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고 공작이 나오더니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앤.”

“네, 네! 깜짝 놀랐어요. ……공작님.”

디에르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복도에 다른 사람이 없는지 살폈다.

다행히 이쪽 각도에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 어느 장소에서 사용인들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사용인뿐 아니라 제 자식들에게도 들켜선 안 됐다.

목소리를 한껏 낮춘 디에르고가 앤에게 말했다.

“앤. 이리 들어와라. 부탁할 게 있으니.”

왜인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은밀한 분위기에 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괜히 아까 용 님이 어린 용사, 마물 어쩌고 하는 바람에 더 긴장됐다.

‘공작님이 나를 전쟁터로 보내시려는 건가? 물론 갑자기 보내실 리는 없지만…… 티온 도련님은 여태 시종 하나 없이 다니셨으니까 나를 거기로 보내시려는 걸까?’

두근대는 가슴팍을 저도 모르게 꼭 붙잡은 앤은 평소에는 감히 하지 못할 질문을 했다.

“왜, 왜요?”

다행히 디에르고는 주변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어 앤을 혼내지 않았다.

“책을 좀 추천해 다오.”

“책이요? 책, 책은 아가씨가 훨씬 많이 읽으셨어요. 아가씨는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고 그, 그리고요…….”

“아니. 너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제, 제가요?”

“솔레아가…… ‘가장’ 좋아할 만한 책들을 추천해 다오.”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앤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그거요?”

“쉿! 은밀히 진행해야 돼.”

“옙.”

고향에서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가씨에게 다신 ‘그런’ 책을 읽지 않겠다고 약속한 탓에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해금되리란 생각에 앤은 냉큼 디에르고를 쫓아 집무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앤은 범상치 않은 미소를 지으며 공작에게 머리를 숙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확실하게 모시겠습니다, 공작님.”

“일단 한 열 권, 아니 백 권 정도만 추천해 줬으면 하는데.”

“제게는 아직 버리지 않은 열두 장의 도서 목록이 있습니다.”

앤의 비장한 미소와 함께 솔레아의 첫 가족 소풍을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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