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디에르고는 하루 종일 심각한 얼굴이었다.
“흐음…….”
“다음은 이 건입니다. 아가씨께서 부탁하신 가구 내 소득 분위를 따지기 위해선 영지 전역의 대대적인 조사가 필요한데요, 그에 대한 자금은 아가씨께서 충당하겠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공작님께서 살아 있는 딸 장례식까지 치를 뻔하셨으니 이 정도 예산은 베르고에서 내 주시는 게 사리에 맞겠죠?”
“흠…….”
라트엘이 평소처럼 와다다 말을 뱉어 내는데도 디에르고는 굳어 있는 표정을 쉽게 풀지 못했다.
그는 마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처럼 책상에 팔을 올린 채 턱을 괴고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책상 옆에 서 있던 라트엘이 약간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공작을 내려다봤다.
“오, 제 생각보다 더 양심이 없으시네요. 일단 여기 사인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제가 알아서 영지 예산에서 공작님 생활비 부분을 삭감하여 이쪽으로 빼 보겠습니다. 티가 안 날 수도 있고, 확 날 수도 있습니다.”
“음……, 어떡해야 할지…….”
“어떡하긴요. 죽지도 않은 딸 장례식을 치를 뻔한 아버지는 펜 들고 계신 김에 여기 빈칸에 사인하시면 됩니다.”
양심에 쌍칼을 꽂아도 디에르고는 도무지 반응이 없었다.
“으으음…….”
결국 라트엘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아, 공작님! 아가씨한테 돈 몇 푼 드리는 게 그렇게 아까우세요?!”
“뭐? 뭐, 그게 무슨 소린가?”
“제가 여태껏 한 얘기 하나도 안 들으셨습니까? 여기 사인하시라고요!”
“이게 뭔데?”
라트엘이 내민 건 빈 종이였다.
아예 백지는 아니었지만, 상단에 ‘하반기 베르고 예산 목록’이라는 제목만 적혀 있을 뿐 그 아래는 공백이었다.
“날더러 백지에 사인을 하라고?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저 못 믿으세요? 유능하잖습니까?”
“영지 예산으로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말해 줘야지.”
라트엘이 짜증 난다는 듯 한숨을 작게 한 번 내쉬곤 간단하게 말했다.
“공작님 품위 유지비, 식비 등 생활비를 싹 다 빡빡 긁어모아서 아가씨한테 쏟아부을 겁니다.”
“아. 그건 괜찮지.”
빠르게 납득한 디에르고는 라트엘이 내민 종이에 사인을 마친 후 그를 보며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올렸다.
“근데 내 생활비를 빼지 않아도 돈은 충분할 텐데?”
라트엘은 모른 척 서류를 정리하며 아까 그에게 대미지를 먹이지 못한 쌍칼을 다시 갈아 꽂아 넣었다.
“예. 그렇죠. 멀쩡히 살아 계신 아가씨의 장례식을 후닥닥 해치우려고 하신, 대단하신 공작님의 생활비를 빼지 않아도 베르고는 충분히 먹고살죠. 아! 양모 사업 같은 거 안 해도 베르고는 돈이 많으니까 상관없겠네요. 명예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아가씨가 헛수고를 하고 계시네. 다 쓸모없는 짓이었네. 가서 말씀드려야지.”
“……옷이야 많으니까 돌려 입지 뭐. 밥도 남은 거 먹어도 되고.”
“예. 이렇게 된 김에 준비하시던 장례식의 주인공이 되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디에르고는 책상 의자에서 일어나려다가 도로 앉고 말았다.
장난기가 담긴 빈정대는 말투긴 했지만 라트엘이 아니면 그 누구도 공작에게 하지 못할 말들이었다.
물론 그레이가 하루에 한 번씩 ‘아, 오늘 가짜 막내랑 놀아야지.’라며 양심을 찌르긴 했지만 딱히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아이에게 상처를 준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나마 헤이, 분홍이는 이달론에게 조종당하는 심정을 공감해서인지 그레이가 놀릴 때면 제 편을 들어 주어 다행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그레이. 아버지께 너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그런데 아버지, 오늘따라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혹시 가족들이 전부 다 핏줄이 안 섞인 가짜라서 언짢으신가요?’
라고 했…….
디에르고는 머리를 감싸 쥔 채 고개를 숙였다.
아니, 잠깐만. 이게 소풍을 간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닌데?
비록 솔레아가 먼저 가족이 되고 싶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이달론에게 조종당하는 동안에 그 아이에게 입힌 상처를 어떻게 보상해 줄 수 있지?
게다가 솔레아뿐 아니라 아들들도 상처를 입은 것 같은데.
결국 디에르고의 고민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망했어.
화를 내다 갑자기 잠잠해진 공작이 이상해 라트엘이 조금은 덤덤한 목소리로 공작에게 말을 할 때였다.
“공작님, 혹시 무슨 일…….”
“라트엘.”
“예.”
“……소풍을 어떻게 가야 잘 갔다고 소문이 나지?”
“……예?”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가야 우리 아가가 좋, 아니 솔레아가 좋아할까?”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곳으로 가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물론 솔레아가 원해서 소풍을 가는 거지만 아들들도 좋아했으면 하는데.”
디에르고의 심각한 목소리에 드디어 공감을 해 주려는지 라트엘이 턱을 매만지며 살포시 눈을 감았다.
“공작님이 빠지시면 좋아들 하시지 않을까요.”
“나가.”
“공작님 소풍 가면 업무는 누가 본답니까?”
“네가.”
“저한테 작위를 물려주시게요? 공작님께서 저를 고용하신 뒤 직접 교육하며 쓸 만하게 키우셨다지만, 저는 베르고가 아닌데요.”
“나가라고.”
“물론 제가 업무를 맘껏 할 수 있는 공식적인 절차가 있긴 합니다.”
“응?”
문득 불안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디에르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라트엘을 바라봤다.
“저와 솔레아 아가씨가 결혼한 뒤 아가씨께서 작위를 물려받으시면 제가 업무를 보는 게 그리 큰.”
“이 파렴치한 놈! 아직 한 살도 안 된 애를!”
“네?”
말을 뱉은 후, 디에르고는 라트엘의 구겨진 얼굴을 보고서야 제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바로잡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 저기, 뭐야, 거, 건강해진 지 아직 1년도 안 됐는데! 내 딸이랑 네가 왜 결혼을 해! 나가, 인마! 레아 방에 들르지 말고 곧장 네 집으로 가!”
“아직 4시인데요?”
“가! 일찍 퇴근해! 가 버려!”
“내일 두 시간 일찍 오라고 하시기 없습니다.”
“알았으니까 가라고!”
신이 난 라트엘은 발에 불이 붙은 듯 빠르게 방을 나갔다.
어찌나 신이 났는지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마저 쿵짝짝쿵짝짝 일정한 박자로 울려 댔다.
저놈은 결혼을 해도 아내랑 각방을 쓰고, ‘10시니 각자 방으로 돌아가죠.’라며 개인 시간을 즐길 놈이었다.
암, 저런 놈을 솔레아가 마음에 들어 할 리 없지.
방에 홀로 남은 디에르고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곳으로 가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라트엘이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지윤이가 어떤 소풍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모른다는 것이었다.
공작은 착한 막내딸 지윤이가 했던 말을 종이에 적어 내려갔다.
― 평범하게 돗자리 챙겨서.
― 근처 공원으로 가서.
― 샌드위치를 먹고.
― 경치 구경도 하고.
― 앉아 있다가.
― 오기.
“……이게 무슨 재미가 있지?”
레아가 원하는 소풍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그 아이가 살아온 삶을 알지 못하니.
아이가 돌아온 후 종종 단둘이서 어색한 티타임을 가질 때면 원래 살던 곳에서의 삶을 넌지시 묻곤 했었다.
하지만 레아는 그때마다 버석하게 메마른 얼굴로 잠깐 웃고 말 뿐이었다.
결국 물어볼 놈은…….
때마침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고 생각하고 있던 그놈이 검은색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집무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젊은이, 처형이 나랑 친구 하기 싫다는군. 자네가 그나마 나랑 나이가 비슷하니 우리 친구 하는 게 어떤가.”
“천 살도 넘은 파렴치한 늙은 뱀이랑 내가 어떻게 나이가 비슷한가.”
“난 용인데. 젊은이.”
디에르고는 그의 말을 가뿐히 씹어 먹었지만 1,000년 넘게 산 뱀 역시도 디에르고의 무시 의사를 가뿐히 씹어 먹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친구가 되려면 대화가 중요하지.”
“……대화가 안 통한다는 것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은 저놈이 옷을 제대로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쩐 일인지 평소보다 셔츠의 품이 넉넉했고, 바지도 길이가 딱 맞았다.
그레이의 옷을 훔쳐 입은 건 아닌 것 같았다.
“드디어 옷을 샀나 보지?”
디에르고의 핀잔 섞인 말투에도 아무스는 태연했다.
“방금 후원에서 기지개를 켜다가 나도 모르게 인간으로 변했지. 사람으로 변할 때의 느낌이 기지개를 켤 때랑 비슷해서 나도 미처 알지 못했던 것 같아.”
“본론만 말해라.”
“마침 짝이 근처에 있었어.”
“……처음부터 말해라.”
“짝이 내 쪽으로 몸을 돌리기 전에 아가 불곰 처형이 미친 곰처럼 달려와 나를 들더니 제 방으로 집어 던졌어. 창문이랑 벽이랑, 또, 책상이랑 옷장이 부서졌어. 그래도 바로 고쳤다! 아무튼 그래서 아가 불곰 처형의 옷을 입었지.”
“……그랬군.”
저 빌어먹을 호칭에도 익숙해졌다.
티온의 방은 2층에 있는데 사람을 거기로 던졌다니. ……하긴. 티온이면 그럴 만도 하지.
디에르고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곤 아무스에게 물었다.
“……이봐. 레아가 원하는 소풍 말인데…… 너는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지?”
“소풍? 응. 짝의 어렸을 때 꿈에서 본 적이 있다. 나는 오랫동안 짝을 지켜봐 왔으니까.”
“네가 짝짝 거리는 걸 듣고 있자니 따귀를 짝짝 올려붙이고 싶군.”
“나도 소풍에 데려가 주면 말해 주지.”
신나서 말한 아무스의 이마에 무언가 날아와 팅, 부딪치고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도였다.
“……젊은이, 방금 나를 죽이려 했어?”
“역시 진짜 용은 평범한 검으로는 상처 입힐 수 없군.”
“나는 우리가 친구가 된 줄 알았는데…….”
“네가 얘길 잘하면 생각해 보지. 그리고 보통 제 반려자의 아버지에겐 친구가 되자고 하지 않아. 장인이니 깍듯하게 모시지.”
“알았다, 장인. 날 벌써 그리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다행이군.”
능글맞게도 대답하는 뱀 새끼 때문에 디에르고는 떨어진 단도를 주워서 제 주둥이를 썰고 싶었다.
아무스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움직여 집무실 책상에 드러누웠다.
“……지금 뭐 하는……?”
“아, 뱀일 때 생긴 버릇이라. 미안해, 장인. 여기엔 누울 만한 소파가 없군.”
“나불거릴 시간에 일어나라.”
디에르고의 말에도 아무스는 아무렇지 않게 옆으로 돌아누워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여전히 세로로 동공이 길게 찢어진 징그러운 노란 눈깔이었다.
“짝은 보물찾기를 해 보고 싶어 했어.”
“……보물찾기?”
오랜 기억 속에서 솔레아의 꿈을 더듬는 듯 아무스는 다시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릴 때 우르르 소풍을 가서 보물찾기하면 친구들은 다 성공하는데 자기만 잘 못 찾았거든.”
디에르고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보물 정도야 얼마든지 준비할 수 있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아무스가 계속해서 말을 줄줄 쏟아 냈다.
“책, 탱탱볼, 구슬왕자 필통, 미키쥐돌이 연필, 세일러달 스케치북, 12색 색연필, 24색 크레파스…… 이게 다 뭐지?”
책과 연필을 빼고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12색, 24색 하는 거 보니 갖가지 색의 화구인가 보군. 지윤이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나?”
“그런 것 같은데.”
“보물이야 있는 거 없는 거 다 모아서 준비하면 될 일이고.”
“그럼!”
“책이야 좋아하는 책들로 사 주면…… 앗.”
디에르고가 입술을 벌린 채 굳어 버렸다.
앤이 분명 ‘아가씨께서 가장 좋아하시던 책’이라며 주고 간 책의 제목이, 기억을 찾은 솔레아가 울면서 품에 끌어안고 있던 책의 제목이…….
「렘샤 부인의 은밀한 사정」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