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원래 아무스의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1.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짝 방문 노크하기.
‘책 읽고 있어. 들어오지 마.’
라는 대답 듣고 일단 물러나기.
2.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검은 새로 변해 2층 짝의 방 창틀에 앉아 책 읽는 짝 바라보기.
……들키기.
3. 아침 먹기 전에 공복 운동 한다고 후원을 뛰는 짝 옆에서 같이 달리며 말 걸기.
이때쯤엔 정령들도 대부분 함께라 대체적으로 시끄럽다.
‘임시 주인! 마력 넘치는데 왜 뛰어?’
‘임시 주인! 이제 운동 안 해도 되는데!’
‘임시 주인 회초리 한 방 휘두르면 되는데!’
‘응! 검도 있잖아!’
‘짝! 달릴 때 머리카락 휘날리는 거 멋있어!’
‘너네 다 조용히 해라.’
4. ……혼나기.
5. 아침 식사 하는 짝이 머쓱한 얼굴로 응시하면 젊은이가 짝의 눈치를 살피며 아침 인사 건네는 걸 바라보기. (아무래도 젊은이는 아직 짝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 같아.
6. 아침 식사를 끝낸 뒤에 공부하거나 일하는 짝 옆에 앉아 있다가 솔레아 방해하지 말라며 처형한테 끌려 나가기.
7. 처형 훈련하는 거 구경하다가 몰래 빠져나가서 짝 일하는 거 또 보기. 이번엔 아가 불곰 처형한테 잡혀가기.
8. 짝이 젊은 공작과 단둘이서 차 마실 때의 어색한 공기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분홍이한테 끌려 나오기. (두 사람이 서로 얘기도 좀 하게 그만 따라다니고 나와, 인마.)
9. 해 질 무렵엔 인간으로 있는 거 지쳐서 본모습으로 돌아가 정원에 누워 있기.
10. 정원사 포드릭에게 잔디랑 꽃이 다 뭉개졌다며 한 소리 듣기.
11. 나는 용인데…… 아무튼 잔소리 듣기.
12. 짝 잠드는 거 보겠다고 몰래 방에 들어가려다가 처형한테 잡히기.
13. 근데 이미 짝 방에 들어가 있는 아가 불곰과 분홍이가 싸우는 걸 구경하기.
‘막내 잘 때 무슨 일 있으면 어떡해. 내가 옆에 있을게.’
‘형. 그냥 좀 나와. 레아도 자야 될 거 아냐.’
‘……막내 혼자 못 자면 어떡해. 동화책 읽어 줄까?’
처형이 끼어든다.
‘형. 쟤 동화책 그런 거 안 읽어. 되게…… 원초적인 거 읽어.’
분홍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 나도 전에 봤는데 막 사람 묶어 놓고 욕하고 때리고 그런…….’
말하면서도 민망한지 분홍이 얼굴이 빨개지고, 결국 화가 난 짝이 베개로 오빠 셋 두들겨 패서 쫓아내는 거 구경하기.
14. 몰래 뱀으로 변신해서 방구석에 숨어 있다가 들켜서 ‘너도 나가.’ 소리 듣고 쫓겨나기.
15. 조금 슬프지만 어쨌든 손님방에서 짝 생각하면서 잠들기.
……였는데 오늘은 달랐다.
아무스는 그레이에게 찰싹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침 식사를 하던 디에르고 공작은 이 해괴한 모습에 눈을 몇 번 비볐다가 다시 떴다.
“……그레이. 네 등에 꼭 귀신 같은 게 붙어 있구나.”
“예. 저도 왜 제 어깨에 얘가 매달려 있는지 모르겠네요. 지 의자에나 처앉지.”
“싫어. 나도 이제부터 완전 친하고 소중한 친구 만들 거야. 처형. 나랑 친구 해.”
“……이게 친구냐. 밥도 못 먹게 하는 게 친구냐고.”
그레이가 불편한 얼굴로 수프를 떠먹고 있었지만 솔레아는 일부러 아무스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솔레아 입장에선 뜬금없이 저 혼자 화나서 삐친 놈을 굳이 달래 줄 이유가 없었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한 공작이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아가. 지윤아.”
“네, 공작님.”
식사를 할 땐 주변 사용인들을 모두 물린 터라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사용인들이 공작저에 용이 산다는 걸 알면서도 여태 비밀을 지키고 있지만, 솔레아가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걸 알리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굳이 솔레아가 지윤임을 밝히는 건, 베르고의 위상을 드높이고 가문의 영예를 되살리려는 솔레아의 목적에서 멀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 사용인들은 용이 저택에서 지낸 지 몇 주가 지나자 그냥 좀 커다란 파충류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원사 포드릭이 잔디 뭉개진다고 매일 우는소리를 하는 것만 봐도.
공작은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원래 하던 일들 말이다…….”
“네, 공작님.”
“일이 한두 개가 아니고 아주 많더구나. 염색 양모 사업을 전체적으로 관리하고 있고, 솔리안 상단도 네가 체크하고, 그 상단에서 하는 일만 해도 예술 지원 사업에 복지 제도까지. 심지어 복지는 베르고의 이름으로 하고 있다며.”
“네, 복지 제도를 좀 더 세분화하기 위해서는 영지 전체의 가구 내 소득을 조사해야 돼요. 그거에 맞게 복지를 하려고.”
“와, 아빠 왜 애 밥 먹는데 일 얘기를 해요?”
그레이는 등에 귀신 같은 흑장발 미남을 얹은 채로도 아빠에게 면박을 줄 수 있는 강철 체력이었다.
구박을 들은 공작이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도 내려놓은 채 두 손을 휘휘 저으며 솔레아를 바라봤다.
“아니, 레아. 내 말은 일 얘기가 아니라…….”
“괜찮아요, 공작님 편하신 대로 말씀하세요.”
“그…….”
한참 망설이던 공작이 겨우 말했다.
“네가 못 해 본 것들을, 내가…… 같이 해 보고 싶은데.”
“네?”
“일이 많이 바쁘지 않다면, 조금 미루고 말이야.”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가 가지 않아 솔레아는 보라색 눈을 크게 뜨고 공작을 바라봤다.
못 해 본 것들이 무슨 말이지?
묵묵히 고기를 씹던 티온의 묵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막내 매일 업어 주기.”
“형, 그건 자주 하잖아.”
“그래, 티온. 안 그래도 네가 솔레아를 너무 들고 다녀서 하녀들이 신종 괴롭힘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더라.”
아버지의 말에 티온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물론 겉으로 티는 안 나고 흉터만 조금 찌그러졌다.
헤이먼이 물을 한 잔 마시더니 의견을 냈다.
“가족끼리 그림 그리는 건 어때요? 솔레아는 발을 좋아하니까 다 같이 발만 그림으로 남겨서.”
“아, 나 발 안 좋아한다고!”
소리 나게 물 잔을 내려놓은 솔레아의 반응에 그레이가 키득거리는 동안 공작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내 발이 좋아서 그렸다지 않았니……?”
솔레아는 황급히 말을 붙였다.
“아니, 공작님. 네, 공작님 발 너무 멋지죠. 근데 가족끼리 그림을 남길 거면 다 같이 있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지. 발만 다섯 개 있는 건 이상하잖아요. 그건…… 네, 이상하잖아요.”
아무스가 그레이의 귓가에 대고 뭐라 중얼거리자 그레이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그레이가 제 등에 업힌 사람과 실랑이를 시작했다.
“네가 왜 껴!”
“……나도 짝이랑 짝인데.”
“아니, 상처받은 눈 하지 말고, 하……. 연세도 많으신 분이 눈은 커 가지고 사람 죄책감 들게 하네. 그게 아니라 이건 직계 가족들끼리 남기는 거잖아.”
“나도 같이 남기고 싶어.”
“설령, 야, 진짜 만약에 솔레아가 너랑 결혼을 한다고 쳐. 그래도 이런 건 직계만…….”
“우리 아가 결혼 안 한다.”
솔레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공작을 바라봤다.
디에르고 공작 역시 제가 한 말에 당황했는지 잠깐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이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보통 부모 밑에서 18년 정도는 있어야 성인이 되고, 제 짝을 찾는 거지.”
아무스와 솔레아를 비롯한 티온과 헤이먼, 그레이 모두 조용히 공작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디에르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는 우리 곁에 온 지 아직 1년이 안 됐으니까 한 살이 안 된 거다.”
“어?”
“예?”
“오, 젊은이…….”
“……아빠 계산이 너무 신박한데요.”
“저기 공작님?”
하지만 디에르고의 표정은 진지했다.
“한 살도 안 됐다. 그러니까 결혼하려면 아직 18년이 남은 거지.”
아무스가 그레이의 등에서 내려와 평소와 달리 장난기가 쏙 빠진 얼굴로 공작에게 말했다.
“젊은이. 난 괜찮다. 1,000년을 기다렸어. 18년 정도는 더…….”
“물론 그때 레아가 결혼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집도 넓고 방도 많으니까 아빠는 괜찮다.”
노골적으로 아무스가, 아니 결혼이 싫다는 티를 내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공작뿐만이 아니라는 거였다.
티온이 또 묵직하게 끼어들었다.
“맞아. 아직 막내 한 살 안 됐어.”
티벳 여우 같은 표정으로 티온을 바라보며 솔레아가 말했다.
“티온. 그럼 내년 내 생일에 초는 한 개만 꽂을 거니?”
“물론.”
“거기서 압, 공작님이 왜 대답을 하세요.”
“언제든지 아빠라고 불러도 좋다, 레아.”
식사 분위기가 엉망이 돼 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나누던 대화 주제가 뭐였는지도 날아가고 이제 솔레아가 몇 살인지에 대한 토론만 오갔다.
“레아는 아직 한 살이 안 됐다.”
“아버지 말이 맞아.”
“형. 돌았어? 쟤가 어떻게 한 살이 안 됐다는 거야. 쟤 열여덟이야. 공부도 우리보다 잘할걸. 쟤 사업하잖아. 형!”
그레이는 옳은 말을 하는구나. 그래도 쟤 하나는 제정신이네.
솔레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헤이먼이 몸을 숙여 그레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 그럼 지금 당장 누가 솔레아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 보낼 수 있어? 쟤 성인이니까 괜찮은 거야?’
그레이의 표정이 굳었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그레이가 솔레아에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너는, 어? 아직 한 살도 안 된 애가 사람 머리나 잘라 오고, 용 타고 놀러 다니고 말이야, 어? 위험하게! 사고 나면 어쩌려고!”
학교 규정에 맞지 않게 머리를 새하얗게 탈색한 채 오토바이 타고 다니는 날라리 막냇동생을 타이르는 말투였지만 내용은 전혀 달랐다.
공작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래! 솔레아는 아직 어려! 20년은 더 있어야 돼!”
저기요, 공작님. 은근슬쩍 2년이 늘었는데요.
디에르고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솔레아를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
“그래, 아가. 원하는 게 뭐니?”
“뭐…… 돌잔치 같은 거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뭐니? 원한다면 해 주마.”
“아니, 아니에요. 제가 대화 맥락을 못 따라가겠어서요.”
솔레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소풍?”
가족들의 눈이 흥미를 가득 담고서 커졌다.
“소풍?”
“소풍 가고 싶다고?”
“어디로?”
“휴양지 말이냐?”
“마침 리카론에 사 놓은 땅이 넓은 평원이라…….”
“아빠 거기 저택 아직 짓는 중이잖아요. 식물원에 꽃도 덜 폈고.”
“아, 참 그렇지.”
“바다는 어때, 막내야?”
“야. 솔레아. 배 빌려서 서대륙으로 놀러 갈까?”
“아가, 레아. 멀미가 있으면 힘들 수도 있으니 큰 배를 빌리마.”
“레아가 아직 어려서 불편할 수도 있으니 사는 건 어때요.”
“그래, 그러자꾸나.”
“젊은이. 내가 짝이랑 같이 날아가 주겠다. 내 짝이니까.”
디에르고는 아무스의 말을 가뿐히 무시했다.
“서대륙에 쉴 만한 땅이 있나?”
“사람 시켜서 알아보고 괜찮은 거 있으면 하나 사요.”
“그래, 좋은 생각이다. 헤이, 분홍아.”
“헤이 분홍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헤이먼보다 분홍이라고 불러 주는 것이 좋다고 정령들이 그러던데.”
“밖에서 실수하시면 어쩌시려고요!”
“아니, 아무튼 그럼 서대륙 땅을 살까? 레아. 아가, 네 생각은 어떠니?”
솔레아는 멍한 얼굴로 이 부잣집 놈들과 부자 아저씨를 바라봤다.
“전 그냥 평범하게…… 돗자리 챙겨서, 근처 공원 가서 샌드위치도 먹고, 경치 구경도 하고…… 앉아 있다가 오고 싶은데요.”
“아.”
“아.”
“아.”
공작은 심각한 얼굴로 다시 고심했다.
하지만 진짜 지윤이와 함께하는 첫 소풍이니 대충 준비하고 싶지 않은데.
공작의 눈빛에 담긴 마음을 눈치챘는지 그레이와 헤이분홍이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티온은 일단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길래 같이 끄덕였다.
“가서 막내한테 동화책 읽어 줘도 돼?”
“아, 좀. 오빠!”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