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베르고 저택을 마음의 집으로 삼기로 결정한 솔레아는 앤을 다시 데려오기로 결심했다.
솔레아가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났다는 소식이 아직 앤에게까지 전해지진 않은 모양인지, 앤은 베르고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앤은 솔레아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가족처럼 의지하던 하녀였다.
디에르고의 방으로 찾아간 솔레아는 두 번 노크한 후 짧게 말했다.
“……공작님. 저예요.”
공작저에서 살기로 결정했고, 솔레아로 불리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그 당사자의 친아버지에게 ‘솔레아예요.’라고 말하는 것에는 익숙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아가. 들어오렴.”
공작은 라트엘과 함께였다.
“무슨 일이니, 아가?”
“으. 공작님. 아가씨 나이가 몇인데 아직 아가라고 부르십니까?”
책상 옆에서 디에르고 공작의 서류를 정리하던 라트엘이 질색하며 의자에 앉아 있는 디에르고를 내려다봤다.
“조용히 해. 지금 몇 시지?”
“아직 오후 3시입니다. 안타깝게도 퇴근까진 3시간이나 남았네요.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30분 휴식.”
“그럼 공작님 그동안 여기 토지 대장이랑, 황실에서 지시한 공무랑…….”
“알았다고. 나가. 아가랑 할 말이 있으니까.”
“아가……. 아가……?”
라트엘은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솔레아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솔레아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고장 난 벽시계처럼 고개를 까딱까딱 움직여 댔다.
“아가……? 아가∼? 아가?”
“아, 좀! 라트엘! 공작님이 나가시라잖아요!”
“아가∼?”
등을 밀어 내서 방문 밖으로 쫓아낼 때까지 라트엘은 솔레아를 돌아보며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장난을 쳐 댔다.
솔레아가 이달론에게 가기 전에 했던 못된 말은 모두 잊은 듯 평소처럼 격의 없는 모습이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솔레아를 다시 만난 라트엘이 그녀에게 처음 건넨 말은 꽤나 건방지게도, ‘용서해 드리죠.’였다.
‘뭘 용서해요?’
‘아가씨께서 불치병에 걸려 죽을 뻔하셨다면서요. 그러니 그리 마음에도 없는 못된 말을 해서 저를 상처 주신 거겠죠.’
‘상처를 받기는 했고요?’
‘저도 사람인데요, 아가씨. 저 그날 이후로 매일 밤마다 혼자 이불 덮고 울었습니다.’
‘거짓말 말아요.’
‘진짭니다. 제 눈이 부은 거 안 보이세요?’
가까이 들여다봤지만 전혀 부어 보이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솔레아를 내려 보던 라트엘이 픽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스치듯 살짝 건드렸다.
‘……왜 만져요?’
‘아가씨가 그때 제 턱을 박력 있게 잡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방금 복수한 거예요?’
‘아뇨. 돌아오신 게 기뻐서 한번 건드려 봤습니다. ……진짜인가 하고.’
진짜.
그 말에 솔레아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술렁거려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라트엘은 여전히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을 걸었다.
‘제 턱이든 손목이든 어디든 잡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혼자 몰래 아프진 마십시오.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내 걱정 했어요?’
6시가 지나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던 라트엘이 어이가 없다는 듯 돌아보며 다소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그럼 안 했겠습니까?!’
그가 짜증을 낸 게 퇴근 시간에 계속 말을 걸어서인지, 당연한 걸 물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솔레아는 그를 다시 만나 기분이 좋았다.
라트엘이 방에서 나간 후에야 솔레아는 공작을 마주 바라봤다.
앤이 어디로 갔냐고 묻기도 전에 공작이 초조한 얼굴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 뭐, 뭘요?”
갑자기 몸을 일으킨 공작 때문에 놀란 솔레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살짝 움츠러트렸다.
디에르고는 솔레아가 놀라지 않도록 다시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꼭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간 것 같구나.”
“아……. 죄송해요. 여기서 살기로 했으면 적응해야 되는데, 죄송해요. 제가 이달론이 보여 준 환상 속에서 아빠를 만나고 와서……. 아니, 공작님이 아빠 같진 않지만, 그게.”
“괜찮아, 괜찮단다. 아가야.”
디에르고는 조금은 쓰리게 미소 지으며 잔잔하게 말했다.
“너를 온전히 알아 가는 건 처음이니 내가 조심하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걱정하지 마렴.”
“네…….”
“아, 참. 아가라고 부른 건, 전의 솔레아와 너를 구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물론 다른 사람이니 구분은 필요하지만 선을 긋기 위한 호칭이 아니라, 내가, 그, 저기, 뭐냐. 네 본명을 알기 전에 너를 찾으러 다닐 때 아가라고 불러서, 그 호칭에 익숙해져서 말이다. 응, 그게, 혹시 기분이 나쁘다면…….”
디에르고가 어울리지 않게 횡설수설하며 눈치를 살피는 것이 우스웠다.
실은 고마웠다.
“아니에요. 감사해요. 가짜인 저를 딸로 받아 주셨으니까. 어떻게 부르시든 상관없어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평온하게 말하는 솔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에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솔레아가 놀라지 않을 정도로 느린 속도였다.
그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작은 함을 꺼내 솔레아에게 다가왔다.
“에일린이 남긴 목걸이란다. 솔레아가 성년이 되면 물려주기로 했는데, 에일린이 떠난 이후론 이 보석함을 열어 보지도 못했구나. 솔레아도 내내 아팠고…… 그래도 다행이다. 네게 물려줄 수 있어서.”
“아니, 아니에요! 제가 이걸 어떻게 받아요! 공작 부인의 물건이잖아요!”
뚜껑을 연 보석함 안에는 오묘한 색으로 빛나는 블루 오팔 목걸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솔레아는 손사래 치며 뒷걸음질 쳤지만 디에르고는 제자리에서 가만히 서서 그녀가 다시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네가 해 주렴. 넌 우리 가족에게 진짜란다.”
“그래도…….”
“어서, 지윤아.”
“아.”
솔레아는 주춤거리며 천천히 디에르고에게 다가갔다.
이건 디에르고 공작이 지윤에게 주는 것이었다.
가족이 되었으니까. 나는 나 자체로 진짜니까.
왼쪽 눈에서 주륵 흐른 눈물 줄기를 얼른 닦아 낸 솔레아는 공작 앞에 멈춰 섰다.
디에르고는 솔레아가 놀라지 않도록 느긋한 태도로 목걸이를 직접 채워 주었다.
로또 종이가 들어 있던 로켓 목걸이가 사라진 빈 자리를 베르고의 오팔 목걸이가 채웠다.
“잘 어울리는구나, 아가.”
솔레아는 먹먹해지는 감정을 애써 추스르며 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꾸 아가라고 하시니까 다들 놀리잖아요.”
“놀리면 뭐 어떠니. 정 싫다면 그렇게 안 부르마.”
솔레아는 디에르고의 말에 싫다고는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자신이 이 방에 찾아온 이유가 이제야 생각났다.
“참, 공작님, 앤은 어디로 갔어요? 집으로 편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어서요.”
“그렇지 않아도 네가 돌아오자마자 앤을 다시 부르려 했는데 고향으로 내려갔다는구나.”
“……고향이요? 앤의 집은 이 근처가 아니에요? 쉬는 날 집에 다녀오곤 했었는데.”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동안 지내던 곳은 친척 집이었다는구나. 앤의 고향은 여기서 꽤 멀어 아마 사람을 보내서 불러야 할 게다. 내가 곧 사람을.”
“젊은이. 내가 가겠다.”
창문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디에르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오직 솔레아만 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을 보내마. 아가.”
“젊은이. 내가 짝과 함께 가겠다. 날아가면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그곳이 어딘가?”
“네가 앤을 좋아하는 건 나도 알지만, 아가.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 주겠니? 카스탈리아는 꽤 머니까.”
“젊은이. 자네 왜 나를 무시하는 건가? 내 도움을 받아 딸을 찾았으면서. 젊은이? 나 여기 있어. 이봐. 젊은이. 장인.”
“누가 네 장인이야악!!”
디에르고는 자기도 모르게 창문 쪽으로 돌아서서 소리를 꽥 지르곤 혹여 솔레아가 놀랐을까 봐 다시 얼른 그녀를 바라봤다.
다행히 솔레아는 입을 가린 채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공작님. 저 아무스랑 다녀올게요.”
“아니…… 그래도, 아빠는 네가 헐벗고 다니는 남자랑 다니는 게 마음이 영…….”
“젊은이. 난 지금 옷을 입고 있다.”
그때 어딘가에서 그레이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내 셔츠! 이 새끼 또 찢어 놨어! 뱀 대가리 새끼! 아악!”
디에르고는 한숨을 짙게 내쉬곤 머리를 짚었다.
“……내 아들 옷 훔쳐 입지 마라.”
“그럼 앤을 만나러 가는 길에 짝과 쇼핑을 하겠다.”
“닥치고 아무 곳도 들르지 말고 곧장 다녀와라. 네놈 몸에 맞는 옷은 내가 사다 놓을 테니.”
“고맙다! 젊은이! 역시 마음이 넓군!”
검은색 긴 머리를 휘날리며 활짝 웃은 아무스는 걸터앉아 있던 창가에서 내려와 바람처럼 솔레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가자, 짝.”
“잠, 잠깐만. 근데 날아간다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겠니?”
어느새 아무스에게 휩쓸린 디에르고가 당황한 눈빛으로 말려 봤지만 아무스와 솔레아는 태연했다.
“마력으로 안 보이게 할 수 있어요.”
“그렇……구나.”
아무스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숙여 솔레아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뭐 하는 짓이야!”
디에르고가 기겁하며 아무스의 긴 머리카락을 잡아채려는 순간, 솔레아는 익숙하게 아무스의 어깨 위에 목말을 타듯 자세를 잡았다.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아무스는 순식간에 용으로 변했다.
방 안에서.
“아무스! 공작님이 깔릴 뻔하셨잖아!”
“앗! 실수했다!”
시커먼 용으로 변한 아무스는 샛노란 눈을 깜빡이며 제 두 발아래에 서 있는 디에르고 공작을 바라봤다.
공작의 방은 이미 무너져 천장과 벽이 날아간 채였다.
저택 밖의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아가씨!”
솔레아는 아무스의 목 위에 올라탄 채로 아무스의 머리 한가운데를 주먹으로 꽤 세게 퍽 때리곤 공작에게 말했다.
“공작님! 제가 금방 고쳐 드릴게요! 야, 일단 날아! 네가 하늘에 떠야 고치지!”
“야가 아니라 아무스다. 짝.”
“짝 같은 소리 하네. 날아.”
낑.
아무스는 조금 서글픈 소리를 내더니 검은 날개를 넓게 펼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솔레아는 아무스가 하늘 위로 높이 뜨자마자 부서진 저택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주문도 외우지 않았고, 겉보기엔 어떤 마력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지만 저택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갔다.
디에르고 공작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빠! 뱀 대가리 새끼 방금 날아갔죠? 그 새끼가 내 셔츠, 아! 또 찢었네! 변신하기 전에 옷 좀 벗으라니까!”
무언가에 홀린 듯 천장을 보던 디에르고 공작이 그레이의 등짝을 후려쳤다.
“이놈 자식아! 그 용이 네 동생 앞에서 변신하는데 옷을 벗고 하면! 어? 솔레아가 뭘 보겠니! 어? 뭘 보겠냐고!”
“아! 아빠! 아빠 은퇴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손이 이렇게 매워서! 아야! 아! 아니, 그럼 내 셔츠는! 아! 옷을 새로 사 주시든가! 아!”
저택을 말끔하게 고친 솔레아는 아무스와 함께 카스탈리아를 향해 날아갔다.
* * *
“너 밥도 안 먹고 계속 그렇게 누워만 있을 거야?!”
“안 먹어! 안 먹는다고!”
“얘가 진짜 왜 이래!”
벌써 몇 주째 앤은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수프라도 먹어!”
“나중에 내가 알아서 먹을게! 엄마 나 좀 그냥 내버려 둬!”
“공녀님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너까지 따라 죽으려는 거니!”
“엄마!”
앤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시뻘게진 눈으로 엄마를 노려봤다.
그러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방문을 가리켰다.
“나가.”
“……미안하다, 앤. 나는 그냥 네가 너무…….”
“알아서 밥 먹을게. 그러니까 그냥 혼자 좀 내버려 둬.”
“난 너 혼자 못 두겠는데?”
“꺅!”
창밖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앤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라 창을 바라봤다.
죽은 줄 알았던 공녀님이 창문 너머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기 3층인데.
앤은 그대로 기절하며 뒤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