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디에르고 공작의 품에 안겨 엉엉 소리를 내며 운 솔레아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공작님, 저, 제가, 전에도 말했듯이 저한테는 능력이 있어요. 정령들이랑 대화도 할 수 있고, 이제 용도 다룰 수 있으니까요…….”
“그래, 장하구나.”
디에르고는 솔레아를 품에서 살짝 떼어 놓더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공작님! 지금 뭐 하시는……!”
“아가. 아니, 지윤아.”
디에르고의 단정한 입술 새로 나온 제 이름에 놀란 솔레아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로 굳어 버렸다.
가만히 멈춰 있는 솔레아를 향해 공작은 낮은 목소리로 묵직하게 빌었다.
“내가 미안하다.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할 정도로 미안하다.”
“아니, 아니에요. 공작님은 따님을 잃으셨고…….”
디에르고는 솔레아의 말을 끊듯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면 안 됐어. 베르고를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노력한 너에게 그런……,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됐다. 나를 아빠라고 불러 준 네게 얼마나 모질게 굴었는지를 떠올리면…… 그 많은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용서를 비마. 아가, 지윤아. 솔레아.”
“공작님…….”
디에르고는 조심스럽게 두 손을 뻗어 솔레아의 손가락 끄트머리를 살짝 잡았다.
“너만 괜찮다면, 가족이 되어 주겠니? 내게 다시 기회를 줄 수 있을까? 아빠라 불러 주지 않아도 되니까, 시간이 얼마가 걸려도 좋으니까…… 다시, 한 번만…….”
“그래도, 괜찮아요? 공작님은 괜찮으신 거예요?”
솔레아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저를, 저를 가짜라고 하셨잖아요. 저한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가족이 되어 달라니…….”
그녀의 말이 비수가 되어 디에르고 공작의 가슴에 꽂혔다.
돌이킬 수도 없을 정도로 수십 번 꽂아 넣어 솔레아의 가슴에 깊숙이 박힌 상처들을 마주한 디에르고는 그저 비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아니에요!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공작님이 괜찮으신지 여쭙는 거예요. 저를…… 받아들이실 수 있는지……. 전 아까도 말했듯 라트엘처럼 일해도 돼요. 저 이제 외양을 바꿀 수도 있거든요. 하, 하하…….”
말꼬리를 어색하게 늘리며 솔레아는 웃어 보였다.
그러자 디에르고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쏟아 냈다.
당황한 솔레아는 마력을 이용해 얼른 제 모습을 바꿨다.
어깨를 겨우 넘는 진한 갈색 머리카락에 노란색 눈, 솔레아보다는 조금 작은 키의 여자였다.
“이러, 이러면 따님과 하나도 안 닮았죠? 피부색도 바꿀 수 있고요. 아! 말, 말투도 바꿀게요. 그러면…… 그렇게 하면 여기서 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공작님만 괜찮으시면…….”
디에르고는 주먹을 터질 듯 세게 움켜쥔 채 가슴속 응어리를 토해 내듯 울음을 뱉어 냈다.
사랑한다고 말해도, 딸이 되어 달라고, 가족이 되어 달라 몇 번을 말해도 닿지 않았다.
“아가, 아가. 지윤아, 아가, 미안하다.”
솔레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난처한 얼굴로 가만히 기다렸다.
이번엔 공작의 곁에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 몸은 솔레아의 것이니까. 여기에 ‘내’ 지분은 없다.
솔레아는 허리를 숙인 채 우는 공작의 어깨에 작은 손을 올리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이제 떠나지 않을게요.”
공작이 고개를 들어 올려 솔레아와 눈을 맞췄다. 노란색 눈동자를 곱게 접어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이 몸은 공작님의 따님 거잖아요.”
솔레아의 말에 디에르고 공작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솔레아의 얼굴에 일순간 공포가 서렸다.
디에르고는 그런 그녀를 보곤 안심하라는 듯 살포시 미소를 띠며 작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가고픈 곳이 있다면 떠나도 좋다. 하지만…… 가족이 보고 싶어지면 언제든 이리 돌아와 주겠니? 기다리마, 얼마든지. 네가 준비될 때까지.”
“하지만 솔레아가 아직, 여기……. 이 몸은……. 되살릴 순 없지만 그래도, 솔레아의 몸이.”
“솔레아.”
“네?”
“그래, 아가야. 우리 솔레아. 지윤아.”
디에르고는 무심코 대답한 솔레아를 향해 보라색 눈을 접으며 활짝 웃었다.
울어서 붉게 물든 얼굴과는 상반되는 환한 미소였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솔레아의 이름을 지켜 주어서 고맙다.”
“아…….”
“다시 같이 살자. 가족이 되자, 아가. 솔레아를 대신해 살라는 말이 아니야, 네가…… 너였으면 한다, 아가.”
“……저는.”
“여기서는 솔레아로 사는 것이 편하겠지만, 네 마음이 불편하다면 본래 이름으로 살아도 좋다. 다른 모습이어도 괜찮아.”
“……정말이에요? 진짜 제가 다시 딸이 돼도 돼요?”
“그럼.”
“……저, 저 정말로 여기서, 계속, 솔레아로, 공작님 딸로 살아도, 흐, 괜찮아요?”
“아직 딸을 분가시키고 싶지가 않구나.”
솔레아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듯 휘날리더니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변했다.
솔레아는 디에르고와 똑같이 빛나는 보라색 눈을 질끈 감으며 공작을 안았다.
“……공작님, 미워요. 진짜. 진짜 저한테, 모질게, 진짜 못되게, 무섭게 하셨잖아요! 진짜 미워요! 너무 싫어요!”
“그래, 아빠가 미안하다.”
“저한테 가짜라고 하셨, 흑, 하셨잖아요! 제가, 저는 진짜 노력했어요. 여기,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었는데! 흐, 전…….”
“그래, 아가. 남은 평생 동안 네게 빌어도 모자라다는 걸 알고 있단다, 지윤아. 그러니 사과할 기회를 주렴. 응?”
“공작님, 진짜 큰 실수 하신 거예요! 무, 물론 제가, 흑, 제가 이달론 죽이려고 제 발로 가긴 했지만! 그래도 제가 거기서 얼마나 외롭고, 긴 시간을 혼자서! 흐윽. 아빠 무서워하는 것도 아시면서! 가족한테 돌아가라고, 흑, 나 이제 거기서 못 사는데, 이제 못 살 거 같은데!”
“미안하다.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가, 지윤아. 내가 네 아빠하면 안 되겠니. 내가 네 아빠 할 테니 좋은 기억 많이 쌓자, 이 땅에서 아빠랑 오빠들이랑 같이 살자. 아가. 그러자, 응?”
“흐, 흐어엉!”
솔레아는 주먹을 쥐어 공작의 등을 쿵쿵 때렸다.
디에르고를 나무라는 커다란 목소리를 들은 건지 방문이 벌컥 열리고 세 명의 남자들이 들이닥쳤다.
“야! 너 왔어?! 아예 온 거야?”
“레아! 얼굴 꼴이 왜 이래, 밥은?”
“막내야! 왜, 왜 울어?”
“흐어어엉! 흐, 끅! 나 진짜 억울해! 억울해요!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닌데! 나도, 흑, 진짜 노력했는데!”
“미안하다, 아가. 정말 미안하다.”
눈물을 펑펑 쏟아 내는 솔레아를 바라보던 그레이가 굳은 결심을 한 듯 솔레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솔레아. 그럼 아빠 딱 한 대만 칠까? 주먹으로 콩콩 말고 너 그 마력 몽둥이로.”
솔레아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안겨 있던 디에르고 공작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레이와 공작을 번갈아 바라봤다.
“공작님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키셨길래 쟤가 아빠 팬다는 말을 해요?”
“하, 하하……. 내가 그간 헛소리를 워낙 많이 해서…….”
조금은 쓰라리게 웃는 공작을 마주 보던 솔레아는 옷소매로 눈물을 벅벅 닦았다.
“아이고, 아가. 아빠한테 손수건 있는데.”
“막내야, 그러면 눈 아파. 문지르지 마. 응?”
“야, 너는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굳이 소매로, 아이고. 이 자식아.”
“레아, 눈이 빨간데 치료 마법을 써 줄까?”
그저 눈물을 닦느라 눈을 벅벅 문질렀을 뿐인데 걱정들이 줄줄이 따라왔다.
“됐어. 나 이제 오빠들 셋 합친 것보다 마력 많아.”
흐르려는 콧물을 킁 하고 훌쩍인 솔레아는 퉁퉁 부은 눈을 애써 똑바로 뜨고 말했다.
“우리끼리 열일곱 살까지 살았던 솔레아의 장례식을 치러요.”
“그래, 그러자꾸나.”
“그리고 나…… 솔레아 할 거예요. 베르고에 입양아만 넷이면 인간들이 얼마나 입방아를 찧어 댈지 상상도 안 가. 내가 그놈들 머리통을 직접 잡아다가 방아를 찧을 순 없잖아요?”
“아가, 말이 조금…….”
“아빠 쉿.”
솔레아에게 주의를 주려던 디에르고의 어깨에 손을 올린 그레이가 고개를 짧게 좌우로 흔들었다.
디에르고는 입을 다물었다.
잘못한 게 많으니 고작 험한 말 따위로 딸을 나무랄 수가 없었다.
솔레아는 씩씩거리던 숨을 겨우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한테는 딸의 몸에 갑자기 마력이 생겨서 크게 앓았다고 해요. 치료를 위해 다른 곳으로 보냈었고, 치료를 받다가 정말로 죽은 줄 알았는데 가까스로 살아나서 마법사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래. 그렇게 하마.”
“그리고…….”
“응.”
“그리고 공작님은 아직 조금 미워요.”
“……그래, 그럴 테지.”
“그런데…… 좋아요. 같이 살고 싶어요. 나도 가족 갖고 싶어요. 믿고 싶어요.”
주저앉아 있던 공작은 그제야 몸을 일으켜 다시 솔레아를 안아 주었다.
티온, 헤이먼, 그레이 모두 다가와 막내를 힘껏 끌어안았다.
가족의 품에 안긴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기뻐 울었다.
슬퍼서 우나, 외로워서 우나, 억울해서 우나, 기뻐서 우나 어쨌든 눈물에서 짠맛이 나는 건 똑같았다.
그래도 기뻐서 운 건 처음이라 그녀는 그게 또 기뻤다.
* * *
그날 밤, 베르고 가족들은 뒤뜰 정원 큰 나무 아래에 모였다.
원래의 솔레아가 침대에 누워 창 너머로 바라보던 장소에 검은 옷을 입고 모인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지윤은 한참 동안 그녀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인사를 건넸다.
‘솔레아, 네 자리를 내가 차지해서 너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내게 이런 소중한 사람들을 줘서 정말 고마워. 평생 이 은혜 잊지 않을게.’
그때,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더니 때아니게 피어난 보라색 라일락 꽃잎이 그녀의 볼을 간질이다가 어깨에 살포시 가라앉았다.
마치 솔레아가 대답해 준 것만 같았다.
나도 네가 와 줘서 참 다행이라고. 가족들을 잘 부탁한다고.
새로운 솔레아가 달빛 아래에서 살짝 미소 지었다.
* * *
솔레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모습을 바꿔 공작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하녀일 때도 있었고, 하인의 모습일 때도 있었다.
정원사로 변해 꽃밭의 잡초를 정리하다가 ‘공작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공작은 잠깐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아가.”
“……어떻게 아셨어요? 공작님.”
“눈치를 살필 때 왼손 검지를 만지작대는 버릇이 있더구나. 하지만 지금 그 비결을 말했으니 다음엔 맞히기 어렵겠는걸.”
디에르고는 정원 한가운데서 변신한 솔레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고는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정원사 포드릭은 하인들의 질문 세례를 미어터지게 받았다.
“포드릭! 너 대체 공작님과 무슨 사이야?”
“내, 내가?”
“어제 네 까진 정수리를 공작님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쓰다듬으셨잖아!”
“나, 나를? 공작님이……?”
“머리가 다 벗겨진 반쯤 늙은 영감탱이가 대체 무슨 수로 공작님을 꼬셔서…….”
“야! 말이 심하잖아!”
“에일린 공작 부인께서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공작님께 얼마나 많은 혼담이 들어왔는데! 그걸 다 거절하셨잖아! 근데 포드릭이 어떻게!”
“난 몰라! 난 진짜 모른다고!”
포드릭은 정말 억울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공작님이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스럽게 바라본 기억이 없었다.
“너희가 잘못 본 거 아니야?”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이 모두 불같이 화를 내며 그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니야!”
“여기 있는 우리 다섯 명이 다 봤다고!”
“빨래 걷으러 가던 안젤라도 봤대!”
“그래! 네가 공작님이랑 팔짱도 꼈다던데!”
포드릭은 울고 싶었다. 그런 기억은 개미 똥구멍만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