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라트엘은 굳은 얼굴로 디에르고에게 가만 안겨 있었다.
“공작님, 만약 아니면 어쩌시려고 민망한 소릴 하십니까.”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라트엘은 소리를 내지 않고 슬쩍 미소 지었다.
한동안 조용하던 디에르고는 라트엘을 품에서 떼어 내곤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아니지! 만약 자네가 진짜 라트엘이라면 내 딸과 표정까지 닮게 될 정도로 둘이 붙어 있었단 얘긴데!”
“아, 공작님. 사업 얘기 하다 보면 여자 남자가 좀 붙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죠. 그리고 저 정도 공작님 사위로 그렇게 빠지지도 않고요.”
디에르고는 주먹으로 라트엘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목이 안으로 쑥 들어갈 정도의 강한 주먹에 놀란 라트엘이 악 소리를 지르며 정수리를 감싸 쥐었다.
“이놈 자식이! 남의 딸을!”
“공작님! 저보고 능력이 출중하다고 칭찬하실 땐 언제고!”
“그래도 안 돼! 우리 딸은 안 돼!”
“그럼 평생 끼고 살 작정이십니까?”
“……아, 아무튼 안 돼! 아니, 그리고 라트엘이 아닌 것 같은데 왜 자꾸 그런 소릴 하는 거냐, 아가!”
“아직도 의심하시는 겁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디에르고의 인상이 험상궂게 구겨졌다.
“네가 우리 레아라도 문제가 있구나. 라트엘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흉내를 잘 내다니. 라, 라트엘과는 사업을 하라고 붙여 준 건데…….”
두 손을 올려 조심스럽게 라트엘의 양어깨를 움켜쥔 디에르고가 기어들어 갈 듯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서, 설마, 라트엘을 좋, 좋아하는 건 아니지? 물론 라트엘이 사리에 밝고, 머리도 좋지만……”
“설마 집안 때문에 반대하시려고요?”
라트엘의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피어오르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디에르고 공작의 얼굴은 심각하기만 했다.
“집안은 상관없는데…….”
방 안에 두 사람 말곤 아무도 없는데도 디에르고는 주변을 살핀 뒤 목소리를 낮추고 은밀히 말했다.
“……싸가지가 없잖니. 아빠는 네가 다정한 사람을 만나면 좋겠는데.”
“하하하하!”
그제야 마법이 풀리고 솔레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로 오른쪽 눈꼬리가 더 높이 올라간 솔레아는 큰 소리로 한참 웃었다.
디에르고 공작의 매섭게 생긴 긴 눈매가 부드럽게 접혔다.
“아빠가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구나.”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라트엘이 들으면 화내겠는데요.”
“화내도 돼. 틀린 말도 아닌데 뭐 어떠니.”
디에르고 공작은 안심한 얼굴로 만연한 미소를 띤 채 솔레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마 만에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 건지. 어쩐지 못 본 새 더 마른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밥은 먹고 다니는 거니? 전보다 더 말랐구나.”
디에르고는 깨지기 쉬운 유리알을 쓰다듬듯 손끝에 힘을 빼고 솔레아의 하얀 볼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움푹 팬 두 볼이 그간의 고생을 말해 주는 것 같아 죄책감에 마음이 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큰 소리로 깔깔 웃느라 올라가 있던 솔레아의 입꼬리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전 괜찮아요.”
“아가, ……딸을 찾아주 겠다는 약속은.”
“지킬게요.”
“아가?”
“저 이제 가 봐야 돼요.”
“잠, 잠깐만. 아가, 차라도 마시고 가렴. 아니면 빵이라도 하나 먹고 가.”
“출근해야 돼요.”
어딘가에 시선을 뺏긴 채 말을 뱉어 낸 솔레아는 황급하게 사라졌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크루아상을 집어 들고 급히 뒤돌았지만 방 안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디에르고는 멍하니 서 있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 *
검은 공간 안에 서 있는 솔레아를 발견해 낸 건 아무스였다.
“뭐 해?”
“일하는 중.”
솔레아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양손을 바삐 움직였다.
마치 눈앞에 돌아가는 레일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이거 다 끝내야 돼.”
“요 며칠 출근 안 했잖아. 왜 다시 일을 하게 된 거야?”
따듯하게 묻는 아무스의 목소리에도 솔레아는 손을 쉬지 않고 빠르게 답했다.
“돈 벌어야 돼.”
“돈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졌어? 왜?”
“공작님이랑 다른 사람들이 다 나를 이겨 버렸거든. 그렇게 빠르게 찾을 줄 몰랐는데.”
“그래?”
“응. 그래서 솔레아를 찾아 줘야 돼.”
“왜 솔레아를 찾아 주면 너한테 돈이 필요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진짜 딸을 찾아 주면 나는 돌아가야 하잖아. 난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는데…….”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던 솔레아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아! 내 17억!”
“17억?”
“어! 나 17억이 있어! 잠깐만! 그것만 있으면 돌아가도 걱정 없어!”
드디어 손을 멈춘 솔레아는 옆구리에서 긴 검을 꺼내 공간을 갈랐다.
공간 너머에는 솔레아의 방이 있었다.
심장이 쿵쿵 크게 뛰다 못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솔레아는 저도 모르게 목을 쓸어내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같이 갈까?”
“거기 있어.”
홀로 방으로 들어간 그녀는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로또 종이를 분명히 어딘가에 뒀었는데 뒤죽박죽으로 섞여 엉망이 된 머릿속에서 원하는 정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자.
돈만 찾으면 바로 돌아가자.
솔레아는 마음을 다잡고 생각을 하나씩 정리해 갔다.
종이를 손에 쥐고 있었지. 그리고 목걸이로 만들었다가, 서랍에 넣었던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억을 더듬을수록 속이 울렁거리고 현기증이 심해졌다.
자꾸만 눈물이 새어 나올 것 같아 솔레아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서랍을 열었다.
펜던트 목걸이는 서랍 안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다행이야.”
다행?
거기로 돌아가는 게 다행인가?
……아니야. 여긴 내 자리가 없잖아.
솔레아는 애써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때 허공에서 나타난 아무스가 붉은 책을 내밀었다.
“집으로 돌아갈 거라면 이게 필요할 거야. 마침 몇 장 안 남았으니까.”
“……응?”
솔레아는 멍청한 얼굴로 아무스를 올려다보다가 그가 내민 책을 받아 들었다.
“이건 솔레아가 읽던 책이라며. 난 읽고 싶지 않아…….”
“네 거였어. 집으로 돌아가려면 이게 필요해. 그 서랍 안의 펜을 이용해.”
아무스의 말대로 서랍 안에는 펜던트 목걸이뿐 아니라 검은색의 만년필도 들어 있었다.
솔레아는 일단 목걸이를 착용하고 책을 펼쳤다.
회사로 들어가는 문을 연 줄 알았더니, 차원의 문이었나 보다. 왜 이런 판타지 세상으로 온 거지. 내 17억은 어떡하냐고.
“이게 뭐야?”
잠깐 혼란스러웠지만 금방 알 수 있었다. 이건 ‘내’ 일기였다.
집에 보내 주세요. 토끼 같은 17억이 저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요.
아니 근데 저 회색 동태눈깔은 풀 네임이 그래 이 새끼야인가? 싹수가 웜톤이네. 나한테 원수졌나. 귀여운 척은 또 왜 해. 얼굴 좀만 덜 생겼어도 싸웠다.
분홍 머리는 왜 또 쎄하게 굴지.
쎄 이즈 사이언스라는 한국 고유의 정서가 아직 내게 남아 있는데. 얼굴값 하는 건가.
웬 친구라는 것들이 찾아와서 시비를 걸길래 나름대로 짤짤 털어 줬다……
1번만 더 욕하고 다니면 가만 안 둬 개새끼들아
공작님 꽃꽂이 천재 희대의 다정킹 로맨티스트. 공작님, 제가 대략 몇백 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하, 아닙니다. 공작 부인께 실례라서 참습니다.
기억이 없어도 큰형을 좋아하게 될 거라니. 흥. 웃기는 소리.
솔레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일기를 모두 읽어 내려갔다.
윤지윤이 솔레아의 자리를 대신하며 느꼈던 모든 사건과 감정들이 가감 없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물론 개중에선 뜬금없이 ‘오늘 날씨가 좋았다. 내일도 좋았으면.’ 같은, 누가 봐도 일기 쓰기 싫은 초등학생 같은 내용도 있었고,
‘그레이랑 싸웠다. 대신 공작님께 꼰질러서 걔만 혼났다.’ 같은 유치한 내용도 있었다.
그래도 좋아 보였다.
한 장씩 종이를 넘기는 솔레아의 눈에 눈물이 들어찼다.
몇 장 남지 않은 백지를 보던 솔레아는 조심스럽게 펜을 들어 올려 종이에 가져다 댔다.
그런데 전과 달리 어떤 저항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집에 갈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전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그땐 헤이먼을 살릴 수 없을 거라는 부담감에 도망을 치려 했던 거였지만, 이젠 달랐다.
정령들이 헤이먼을 ‘분홍이’라고 부르는 게 도움이 됐는지 헤이먼은 이제 건강하게 살고 있고, 티온과 그레이 역시 더 이상 사람들에게 괄시받지 않는다.
공작님도 지금은 힘들어 보이지만 적응할 것이다. 애초에 저는 가짜에 불과했으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는, 모든 게 해결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가기 싫을까.”
솔레아의 말간 눈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종이를 누르고 있는 펜촉에서 잉크가 새어 나와 하얀 종이를 검게 물들였다.
새카만 잉크가 번져 가는 모양이 제 마음속에서 커져 가는 미련과 닮아 있었다.
무시하려고 해도 자꾸만 커지고 눈에 들어와서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레아!”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 디에르고 공작이 책을 펼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그녀를 껴안았다.
“아가, 레아. 솔레아. 괜찮니? 왜 울어?”
“고, 공작님…….”
디에르고에게 가만히 안겨 있던 솔레아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졌다.
“……아가?”
솔레아는 터지려는 울음을 꾹 참고 디에르고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죄송한데, 정말 죄송한데요. 염치없는 거 저도 아는데, 공작님 제가, 흐, 제가 하면 안 돼요?”
제 등을 다독이는 디에르고 공작의 손길 때문인지 말을 할수록 솔레아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였다.
“……내가 할래요. 내가…… 제가 공작님 딸 하면 안 돼요? 저 잘할게요. 저 집에 가기 싫어요. 아빠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 흐윽, 그냥 제가아 할게요. 저 다 커서 손도 별로 안 가고, 흐, 보셨다시피 베르고를 위해서 이것저것 많이 했고요, 저……. 흑, 원래 있던 세계에서 일도 많이 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도 많이 알아요.”
자신을 힘주어 안고 있는 디에르고의 품에서 벗어난 솔레아는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러 눈물을 닦고는 터지려는 울음보를 몇 번이나 꾹 눌러 삼켰다.
솔레아는 절박할 정도로 간절한 목소리로 허둥거리며 말을 두서없이 뱉어 냈다.
“따님 자리가 싫으시면, 라트엘처럼요. 라트엘처럼 이 가문을 위해서 일할게요. 저 일 잘해요. 보셨잖아요. 솔레아라고 안 부르셔도, 네, 그건 너무하니까, 네……. 따님을 부르던 이름으로 저를, 불러 달라는 건…… 저도 잘 알아요. 진짜 이상하죠. 미친 사람처럼 보이겠죠. 지윤이라고 부르셔도 되고, 아니, 일만 시키셔도 되는데, 아, 죄송해요. 자꾸 말을 막 바꿔서…… 근데, 근데요. 공작님.”
말을 잇는 게 버거울 정도로 솔레아의 아래턱이 덜덜 떨려 왔다.
솔레아는 디에르고 공작의 옷깃을 붙잡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아빠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적은 나이가 아닌데, 저 진짜 어른인데요. 혼자서 여태 잘 살았는데, 근데…… 근데 공작님이 저를 딸처럼 대해 주셨잖아요. 이제 어떻게 혼자 살아요.”
솔레아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저 이제 혼자 못 산단 말이에요. 흐, 저 혼자서 못 살아요. 이제 그렇게 못 살아요.”
디에르고는 울고 있는 솔레아를 당겨서 품에 안았다.
“왜 우니.”
몇 주 전, 공작이 솔레아가 지윤임을 알았을 때 했던 말을 그대로 뱉었다.
솔레아가 품 안에서 굳어 버린 순간 디에르고는 그녀의 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딸을 내가 어디로 보낸다고 자꾸 울어. 우리 귀한 딸을.”
“저, 저 솔레아가 아니라…….”
“그래, 알고 있단다. 지윤이었구나, 우리 예쁜 막내딸 이름이.”
아빠의 품에 안겨 막내는 엉엉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