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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119/192)

119화

뒤에서 나직하게 들린 헤이먼의 목소리에 솔레아는 주문서를 집어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흐꺄아아악!”

시원스러운 비명에 헤이먼이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솔레아! 왜 소리를 질러? 괜찮아?”

“너, 너, 너 때문이잖아!”

질겁하며 씩씩거리던 솔레아는 헤이먼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정강이를 후려 깠다.

“악!”

“이…… 얍샙이 새끼! 너, 너 예쁘다고 내가 봐줄 줄 아나 본데 이거 반칙이야!”

“아니지! 진짜 속일 거였으면 네가 가만히 있었어야지!”

헤이먼이 정강이를 붙잡은 채 바닥을 콩콩 뛰며 반문했다.

‘예쁘다고 한 건 반박 안 하는 걸 보니까 분홍이도 자기가 예쁘게 생긴 걸 아나 봐.’

‘그럼. 우리 분홍이 예쁘지.’

‘그래도 자기가 예쁜 걸 알고 기고만장하는 건 재수 없지 않나?’

‘우리 분홍이는 기고만장하진 않으니까 괜찮아.’

‘맞아. 예쁘게 생긴 것도 사실이고.’

‘누가 고기만두 하고 있다고?’

‘넌 먹던 거나 계속 먹어.’

“너네 조용히 해라.”

정령들을 조용히 시킨 솔레아는 헤이먼을 힘껏 노려보며 말했다.

“아무튼 반칙이야.”

“왜? 왜 반칙인지 말해 봐.”

“……내, 내가 화낼 수밖에 없는 상황처럼 네가 연기했잖아!”

“난 내 동생을 찾아야 해. 그러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고. ……그리고 아까 말했듯, 내가 무시당한 게 왜 네가 화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건, 그건…….”

별것도 아닌 질문인데.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질문일 텐데.

이상하게 답을 할 수 없었다.

솔레아는 손가락으로 헤이먼을 가리키며 화를 내다가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그러게.”

“잘 생각해 봐. 넌 답을 알고 있을 거야.”

“가르쳐 줘. 내가 왜 화낸 거야? 왜 내가 네가 무시당하는 상황을 못 참은 거야?”

솔레아가 어떤 어두운 그림자도 없는 맑은 두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어 왔다.

예전의 솔레아는 공감과 동정, 연민의 감정으로 헤이먼을 안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훨씬 단순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만큼 다양한 추억을 그와 쌓아 왔으니까.

대답이 없는 헤이먼을 가만히 바라보던 솔레아의 머릿속에 문득 아무스의 말이 떠올랐다.

‘너도 그 가족들을 사랑하나 보다.’

모든 걸 잊었는데도 감정은 선명해졌다.

생기 있게 반짝이던 솔레아의 두 눈 아래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난 이 사람들과 가족이 아닌데.

당황한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좌우로 마구 흔들렸다.

헤이먼은 손을 뻗어 솔레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린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을게. 네가 준비되면 돌아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솔레아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디에르고 공작만 남았다.

“이번엔 반드시 안 들킨다!”

“그들에게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 주는 게 그렇게 싫어?”

“……응.”

“왜?”

아무스의 질문에 솔레아는 말없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한참 조용하던 솔레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갔다 올게. 이번엔 절대 나라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할 거야. 공부도 열심히 했어.”

“이번엔 뭘로 변할 건데?”

“말 안 해. 왠지 너도 그 가족들 편 같아.”

솔레아는 아무스를 향해 눈을 흘기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 * *

공작은 피곤한 눈을 손으로 몇 번 꾹 눌러 주곤 살짝 고개를 저어 잠기운을 떨쳐 냈다.

“공작님, 많이 피곤하시면 잠깐 눈을 붙이시지요.”

“괜찮아.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돼.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

집사장 모건은 얕은 한숨을 푹 내쉬곤 공작의 빈 잔에 커피를 부었다.

“더 진하게.”

“……식사도 거르셨잖습니까. 속이 많이 상하실 겁니다.”

“괜찮으니까. 그 아이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잖나.”

“저는 사실 요즘 상황이 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공작님께서 입단속을 시키셔서 다들 쉬쉬하고 있긴 하지만요.”

“그래, 그럴 테지.”

“멀쩡하던 아가씨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며 공작님이 장례식을 준비하신 것도 그렇고, 그런 아가씨가 어느 날 용을 타고 돌아오시더니 마법사가 되셨다고 하시질 않나…… 더군다나 기억을 잃으셨다니요. 아니, 그런데 용이란 생물이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놀랍습니다.”

“그 아이가 돌아오면 차차 설명해 주겠지. 그 전까진 모두들 그 문제에 대해선 함구해 주게.”

“예, 공작님. 당연히 그래야지요. 근데 아가씨는 언제 오신답니까?”

“……나도 몰라. 그래서 답답해.”

그때, 누군가가 노크를 한 후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었다.

라트엘이었다.

“공작님, 저 왔습니다. 이른 아침인데 공무 준비는 끝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일하시는 데 지장이 있으실까요?”

“……난 가끔 보면 네가 내 보좌관인지 상사인지 헷갈려.”

“하하하. 설마요. 저는 공작님의 충실한 보좌죠. 보세요, 지금도 이렇게 공작님의 오늘을 풍성하게 만들어 드릴 일거리를 가득 안고 있지 않습니까?”

공작은 한숨을 푹 내쉬며 라트엘이 내민 서류들을 받아 들었다.

그와 영지에 대한 얘기를 이것저것 나누고, 영주민들이 올려 보낸 건의 사항도 살폈다.

게다가 오늘은 솔레아가 관리하던 염색 양모와 통롤러, 새로 판매를 시작한 메트로놈에 대한 보고서도 올라왔다.

“아가씨가 만드신 상단, 솔리안에서 보낸 보고서입니다. 원래는 아가씨가 검토하셔야 되지만 지금 자리에 안 계시니 공작님이 대신 처리해 주시죠.”

“……곧 돌아올 테니 이건 보류해 두지.”

솔레아가 해야 할 일까지 자신이 맡게 되면 그 아이의 부재를 완전히 인정하게 되는 것 같았다.

돌아올 그 아이를 위해서 그 아이 몫의 일을 남겨 두고 싶었다.

디에르고는 보고서를 펼쳐 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나저나, 다른 애들은 다솔레아가 찾아왔었다는데 나한테는 왜 안 오지?”

“음, 공작님이 이달론에게 아가씨를 보내셨다면서요? 미워서 그런 게 아닐까요?”

“이 자식은 말을 해도……. 아휴, 능력만 없었으면 확 자르는 건데.”

“저 정도 되니까 공작님을 보필하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늘 그랬듯 거들먹거리며 웃는 라트엘을 노려보던 공작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제가 그 정도로 재수 없습니까? 공작님 안색이 아가씨 잃어버리셨을 때보다 더 안 좋으신데요.”

“너는 농담을 좀 가려 해라. 그게 아니라 솔레아가 걱정돼서 그런다.”

“위대한 마법사의 목을 쳐서 가져오신 분이 뭐가 걱정되십니까? 비록 기억은 잃으셨지만 몸 건강하시고, 용도 길들여서 타고 다니시는데요.”

묘하게 빈정대는 말투였지만 디에르고 공작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다크서클이 진하게 자리 잡은 피폐한 몰골로 묵직하게 말했다.

“……전처럼 웃질 않아.”

“웃으셨다면서요?”

“내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레이를 따라 잔디밭을 굴러다닐 때 웃긴 했지. 근데 그것도 어린아이마냥 깔깔대며 웃은 거지, 내 앞에서 재잘재잘 얘기하다 웃던 거랑은…… 뭐랄까, 묘하게 달라. 자연스러운 웃음이 있었어. 너는 모르는, 아빠만 아는 그런 게 있다고.”

“제가 아는 아가씨의 웃는 얼굴은 라이벌 상단을 짓누를 때 보여 주셨던 승자의 미소밖에 없는데요.”

“그건 어떤 얼굴이었는데?”

“승리를 확신할 때만 보여 주셨던, 공작님을 닮아 아주 잔인무도하고 비열해 보이기까지 한 미소였습니다. 이목구비가 확실히 한몫했죠.”

“내 딸이 뭐가 어때서!”

공작이 참지 못해서 버럭 소리를 지르자 라트엘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런 라트엘을 분한 듯 노려보던 공작이 넌지시 그를 불렀다.

“라트엘.”

“예.”

“자네 퇴근이 몇 시지?”

“지금입니다. 더는 일시키지 말아 주세요. 전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습니다.”

“뭔데.”

“집에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왜.”

“……침대가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안 돼. 자네는 오늘 나랑 잔업을 해야겠어.”

“안 되겠는데요. 저도 제 생활이 있어요. 그리고 음란 서적이 가득한 공작님 방에서 잔업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모욕적이라고요.”

“그건…….”

디에르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솔레아가 가장 아껴 읽었다던 「렘샤 부인의 은밀한 사정」은 차마 끝까지 읽지 못하고 그 아이에게 줘 버렸지만 대신 비슷한 책이라도 읽어 둬야 할 것 같았다.

“대체 저런 책을 왜 사 모으시는 겁니까…….”

책장 방향으론 고개조차 돌리기 싫다는 듯 라트엘은 그곳을 등진 채 디에르고에게 물었다.

당황한 디에르고는 빨개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 그 아이가 좋아하던 책이 저런 종류라서……. 친해지려면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고 하길래…….”

라트엘이 또 소리 내어 웃었다.

“아가씨 취향도 참 괴상하네요.”

그런데 ‘내 딸이 뭐 어때서 자꾸 웃어!’라며 진작 소리를 질렀어야 할 공작이 조용했다.

디에르고는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라트엘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작님,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라트엘이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디에르고는 두 팔을 뻗더니 그대로 라트엘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디에르고의 목에서 먹먹하게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가.”

“……공작 각하. 제가 비록 사생아긴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계십니다. 물론 그게 공작님은 아니시고요.”

“아가야.”

“공작 각하. 결혼을 일찍 했다면 아이가 걸음마를 하고도 남을 나이인데요, 제가.”

평소 쓰지 않던 호칭까지 쓰며 라트엘은 정색하고 말했다.

하지만 디에르고는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라트엘의 뺨을 쓰다듬었다.

“내 딸.”

“……지금 제게 굉장히 실례되는 말씀을 하고 계신데, 아십니까?”

“아가, 드디어 와 줬구나.”

“모르시는 것 같네요.”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모른다, 딸아. 너만 괜찮다면, 다시…… 내게 다시 기회를 주지 않겠니?”

“……의사를 부를까요? 많이 심각하신 것 같은데.”

라트엘은 더 이상 숨기지도 않고 불쾌한 티를 팍팍 냈다.

온 얼굴을 찌푸린 채 서 있던 그는 디에르고가 팔을 뻗어 안으려는 순간 질색을 하며 파리를 쫓듯 두 팔을 마구 휘둘렀다.

“아악! 공작님!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레아, 왜 그러니.”

“공작님, 차라리 잔업을 하겠습니다! 징그럽게 이러지 마세요!”

온몸에 벌레라도 붙은 듯 질색팔색을 하며 공작을 떼어 낸 라트엘은 두 팔로 제 몸을 감싸 안고 씩씩거렸다.

“아니, 저번엔 아가씨가 회초리로 기사들을 길들이고 계시는 걸 보여 주시더니 이번엔 공작님이 이렇게 징그럽게 저를 어루만지십니까? 이거 직장 내 성희롱입니다. 저 가만히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요.”

디에르고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여유롭게 답했다.

“아가, 넌 웃을 때면 오른쪽 눈꼬리가 왼쪽보다 더 높이 올라간다는 걸 알고 있니? 크게 웃을 땐 오른쪽 눈을 질끈 감기도 하고. ……가만 생각해 보면 민망한 얘기를 할 때 주로 그랬던 것 같구나. 그건 어렸던 솔레아에겐 없던 표정이니 너만이 가진 표정이겠지…….”

공작은 속이 울렁거려 말을 잇지 못한 채 한참을 가만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길 반복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는 말을 이었다.

“내가 너와 마주 보고 차를 마시고, 네가 웃는 모습을 보며 행복하다 느낀 게 몇 번인데, 웃는 표정 하나 못 알아볼까.”

디에르고는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은 채 굳어 있는 라트엘에게 걸어가 그를 다시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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