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그레이와의 숨바꼭질에서 대실패를 경험한 솔레아는 분노했다.
그렇게 쉽게 들키다니. 다 당근 때문이야.
몰래 공작가의 뒤뜰 텃밭으로 간 솔레아는 그레이가 직접 관리하는 스테파니 전용 당근밭을 뒤집어엎은 뒤 그레이가 오기를 숨죽인 채 기다렸다.
아침이 밝아 오자 간편한 복장으로 텃밭에 나타난 그레이는 엉망이 된 당근밭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솔레아아아악! 너 집에 오면 죽는다!”
히히히.
그가 말에게 줄 당근을 키우는 밭을 직접 관리한다는 걸 자신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재밌었다.
저 사람이랑 장난치는 거 좋아.
얄미운데 재밌어. 저 사람 좋아.
마음이 통하기라도 했는지 한참 씩씩거리던 그레이는 그나마 성한 당근을 밭에서 골라내다 말고 피식 웃었다.
“솔레아. 집에 빨리 와라.”
또 기분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 솔레아는 얼른 자리를 피해 버렸다.
다음 타깃은 험상궂게 생긴 회색 머리였다.
매일 허리춤에 검을 찬 채 저택을 돌아다니고, 기사들과 전투 훈련을 하는 걸로 봐서는 싸움을 어마어마하게 잘하는 사람 같았다.
그의 부하로 변하려는데 아무스가 가로막았다.
“그건 너무 쉽게 들키지 않을까?”
“응? 왜?”
“하루 종일 같이 있는 사람들인데 다른 느낌이 들면 당연히 알아채겠지.”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역시 아무스는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며 솔레아는 마음을 바꿔 타티아나라는 이름의 하녀로 변했다.
훈련을 끝낸 뒤 땀을 흘리고 있는 티온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도련님, 여기 물과 수건입니다.”
티온은 타티아나를 힐끔 보더니 그녀가 내민 수건을 받아 들어 땀을 닦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빈 컵을 내밀었다.
“고마워.”
“아니에요.”
성공했다! 역시 못 알아보네.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려는 걸 필사적으로 가라앉힌 솔레아가 뒤돌아 가려는데 티온이 시무룩한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근데…….”
“네?”
“나 많이 무섭게 생겼어?”
“그게 무슨…….”
갑자기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는 거람.
눈을 동그랗게 뜬 솔레아를 힐긋 본 티온은 손을 들어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덧붙였다.
“막내 네가 전에 나한테 무섭게 생긴 회색 머리라고 해서. 나 너한테도 많이 무섭게 보이나 싶어서……. 전에 네가 무서운 거 싫다고 했는데……. 얼굴을 가리고 다닐까?”
“엇, 아니, 그,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당황한 솔레아가 뒷걸음질을 치자 왜 덩달아 당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티온 역시 놀란 얼굴로 같이 뒷걸음질을 쳤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빠르게 멀어졌다.
티온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흔들며 자신은 무해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미안. 미안해, 막내야. 네가 왔길래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내가 너무 급하게 물어봐서 놀랐지. 그럼 저녁에 다시 물어볼까?”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 티온의 풀죽은 얼굴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우리 막내 놀라게 했으면 미안해…….”
“나, 나, 나인 걸 어떻게 알았어?”
“막내는 걸을 때 발가락으로 땅을 쭉쭉 밀면서 걸으니까. ……아마 원래 있던 곳에서 되게 바쁘게 살았나 봐. 예전엔 널 몰랐으니까 그냥 특이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지금은 그냥 우리 막내를 좀 더 알고 싶어.”
험악한 인상과 달리 티온은 온순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녀들은 나한테 가까이 안 와서……. 물이나 수건은 하인들이 내가 쓰는 의자 위에 올려 두고 가고…….”
“엥? 왜 그러는 거야? 너 차별받아?”
솔레아가 눈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타티아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솔레아의 것과 똑같았다.
티온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무섭게 생겨서 그런가 봐.”
솔레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티온에게 다가가 최대한 높이 손을 뻗어 그의 팔뚝을 다독거렸다.
“너 안 무섭게 생겼어. 그, 평균보다는 조금, 그, 그렇지만 특별하게 생긴 거지. ……장소의 특수성에 따라, 어, 굉장히 효과적인 얼굴이라고 봐, 나는.”
티온의 입은 여전히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었지만 흉터는 거짓말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진짜로 웃을 땐 저 관자놀이 쪽의 흉터도 짜글짜글 구겨지는데.’
본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눈치채지 못한 채 솔레아는 축 처진 티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그의 거대한 근육들까지 시무룩해지진 않았지만.
굵은 목과 이어진 삼각근과 떡 벌어진 어깨, 그 아래의 두툼하고 단단한 가슴…….
가슴?
내가 저 가슴에 안긴 적이 있던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솔레아는 무심코 손을 들어 티온의 가슴 근육을 콕 찔렀다.
“어?”
“아는 가슴인가……?”
티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알, 알고야 있겠지만……. 막내야, 나는 괜찮지만 밖에서 다른 사람 가슴 찌르면 안 돼.”
“응. 오빠.”
“착하네. 내 동생.”
무심코 오빠라고 말한 솔레아는 계속 티온의 단단한 가슴을 콕콕 찔러 댔다.
‘분명 아는 가슴인데. 안긴 적 있던 것 같은데.’
커다란 눈을 데굴 굴리며 생각에 빠지려던 도중 몸이 번쩍 들렸다.
티온이 솔레아를 높이 안아 든 것이다.
“던지기 한번 할까?”
“싫어! 내려 줘!”
마력으로 티온의 팔을 날릴 수도 있었고, 그를 다른 공간으로 던진 후에 자신은 내기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아무스의 옆으로 가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솔레아는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수가 없었다.
솔레아가 망설이는 사이 티온은 하늘을 향해 그녀를 높이 던졌다.
그가 다시 받으려고 팔을 쭉 뻗었지만 솔레아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와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티온은 솔레아가 사라진 하늘을 응시한 채 뻗었던 팔을 힘없이 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몇몇 기사들과 하인들 사이에서 이상한 괴담이 생겨났다.
‘티온 도련님이 하녀를 잡아 하늘로 던졌더니 하녀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하녀들은 티온에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티온은 조금 슬퍼졌다.
……힝.
“아무스. 나 왜 자꾸 들킬까?”
“글쎄.”
용의 옆구리에 누워 있는 솔레아는 발가락을 까딱거렸다.
“근데 있잖아. 엄청 익숙한 기분이 들어.”
“어떻게?”
“……음, 가족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하는.”
말끝을 흐린 솔레아는 생각을 떨쳐 내려는 듯 머리를 빠르게 좌우로 흔들고는 화제를 돌렸다.
“분홍 머리는 어떻게 속이지? 다들 너무 쉽게 알아차려.”
“다들 솔레아를 엄청 사랑했나 봐. 금방금방 알아채는 걸 보면.”
“……그러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솔레아가 아무스를 매섭게 노려봤다.
“너, 자꾸 그 가족들 막, 어? 좋다는 듯이 얘기하지 마.”
“왜?”
“……그 사람들이 찾는 솔레아가 꼭 나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야.”
“그럴 수도 있지.”
“……싫어.”
“왜?”
“내가 지면 솔레아를 찾아 줘야 하잖아. 그 사람들이…… 나를 바라볼 때보다 훨씬 다정한 눈으로 솔레아를 바라볼 텐데, 친한 친구랑 가족은 다르잖아……. 난, 나는.”
말을 이어 가던 솔레아가 다시 아무스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난 그럼 너무 외롭고 슬플 것 같아.”
“너도 그 가족들을 사랑하나 보다.”
“응?”
“거기 갔다 돌아왔을 때 네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였어. 그 사람들이 다정하게 널 보는 게 좋고, 같이 장난치는 게 재밌고, 떨어져 있으면 생각나고 보고 싶다며.”
대답 없는 솔레아의 무릎 위에 커다란 머리를 올려 두며 아무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가 부족함 없이 행복할 때 나를 선택해 줬으면 좋겠어.”
“무슨 말이야?”
“가진 게 나밖에 없을 때 말고, 종일 행복해서 선택지가 아주아주 많을 때 나를 사랑해 줘. 그럼 난 네가 가진 많은 것들 중에서 제일 소중한 것이 될 거고, 매일 행복할 거야.”
“……지금 난 너밖에 없는데.”
아무스는 노란 눈을 깜빡이며 솔레아를 바라봤다. 용의 긴 꼬리가 좌우로 부드럽게 흔들렸다.
“나밖에 없어서 날 사랑하는 거 말고. 가진 것 중에 나를 제일 사랑해 줘. 비싸고 예쁘고 멋진 것들 중에서 내가 가장 귀하다고 해 줘.”
“가족이 생겨도?”
“가……족은 빼고.”
솔레아는 하하 웃으며 용의 뿔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고마워, 아무스. ……근데 나 정령만큼 작아질 수도 있나?”
“말로도 변하는데 그게 뭐 어렵다고.”
아무스가 커다란 입으로 그르렁 소리를 내자 솔레아가 순식간에 정령만큼 작아졌다.
“모습도! 모습도 바꿔 줘! 빨간 머리 말고!”
“그래.”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뜬 솔레아는 다른 정령들처럼 뽀얀 얼굴에 햇빛이 비칠 때마다 색이 바뀌는 머리칼로 변했다.
“나 갔다 올게!”
솔레아는 신이 난 얼굴로 냉큼 사라졌고 아무스는 다시 눈을 감았다.
완전하게 행복할 때도 나를 사랑해 줘.
그게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용의 소원이자 그들의 약속이었다.
언젠가부터 헤이먼의 방에는 마력 전구가 전혀 필요 없었다.
기억을 잃은 임시 주인은 전만큼 재미가 없다며 정령들이 헤이먼의 방에 눌러앉은 탓이었다.
다행히 가족들을 제외한 저택 사람들 눈에는 정령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항상 주변이 시끌벅적한 건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묘하게 조용했다. 침대에 나란히 앉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정령들의 모습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너희 어디 아파? 정령들도 아플 수가 있나?”
정령들의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분홍아! 우리 걱정해 주는 거야?”
“분홍이는 어쩜 이렇게 마음씨가 착할까!”
“분홍아! 고마워!”
“네가 걱정해 줘서 우리 지금 너무 기뻐!”
“고마워, 행복해! 난 분홍이가 너무 좋아!”
헤이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버렸다.
“안 아프다니 다행이다. 나 그럼 밥 먹고 올게.”
그대로 나가려는데 침대 뒤편의 옷장에서 정령들이 날갯짓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하지만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뭐 하는 거지?
헤이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들을 살폈다.
정령들이 몸으로 커다란 화살표를 만들어 침대에 앉아 있는 정령들 중 하나를 가리켰다.
순간, 헤이먼의 머릿속에 며칠 전 정령들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솔레아 오면 알려 줘.’
‘앗. 그건 반칙인데.’
정령들이 머뭇거리자 헤이먼은 책상에 엎드려 우는 시늉을 했다.
‘나 동생 꼭 찾고 싶은데.’
‘앗, 우리 분홍이 울지 마!’
‘분홍이 새 인생 찾아 준 사람이니까 당연히 찾아야지. 맞아, 맞아.’
‘우리가 알려 줄게!’
설마 하는 생각에 헤이먼은 입을 다물고 있는 정령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령들은 쌍둥이처럼 비슷비슷하게 생겨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 정령은 무언가 달랐다.
……주접을 떨지 않았다.
심증은 확실한데 물증이 없네.
잠깐 고민하던 헤이먼은 애써 눈을 피하는 그 정령을 지나쳐 책상 앞으로 향했다.
솔레아가 전에 했던 말들을 생각해 보면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서 연결을 못하고 있을 뿐, 모든 것들이 사라진 건 아닌 것 같았다.
제발.
헤이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며 편지 봉투를 열고 중얼거렸다.
“……하, 내가 싫으면 초대장을 안 보내면 되지. 왜 굳이 나를 실험용 쥐새끼라고 부르면서 이런 걸 보내는 거지.”
그 순간, 작은 정령이 날아오르며 순식간에 모습을 바꿨다.
헤이먼의 손에 든 초대장을 뺏어 든 빨간 머리의 여자가 분노로 가득 찬 말투로 뇌까렸다.
“어떤 호로 쌍놈 새끼가 그딴…… 어라.”
그 편지는 이안이 보낸 메트로놈 공장 주문서 사본이었다.
“한결같네, 우리 솔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