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우는 디에르고를 달래던 솔레아가 품 안에서 하얀 천을 꺼냈다.
“아저씨, 킁 하세요.”
“……응?”
“킁! 아저씨 코 나왔어요. 다 큰 어른이 이러고 다니면 사람들이 흉봐요.”
“……걱정해 줘서 고맙다. 그, 그런데 이런 건 내가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코 한 번도 안 풀어 봤어요? 얼른 킁 해요! 나도 울 때 우리 오빠가 코 풀어 줬단 말이에요.”
“오빠?”
“오빠?”
“오빠?”
“오빠?”
“어느 오빠?”
“나?”
정령들과 공작님을 비롯한 삼 형제까지 모두 입을 모아 되물었다.
“오빠라고?”
“그거 내 얘기지?”
그레이가 한 발 앞으로 나가며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하지만 솔레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오빠는 너보다 잘생겼어.”
당황한 그레이가 잠시 눈을 굴리다가 용이 된 아무스를 바라봤다.
솔레아의 꿈을 통해 원래 인생을 본 용무스는 고개를 저으며 커다란 앞발로 그레이를 가리켰다.
솔레아가 말하는 오빠가 그가 맞다는 얘기였다.
그제야 확신이 생긴 그레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야! 내, 내가 지금 정령들 때문에 날아오느라 얼굴에 바람을 맞아서 그렇지. 원래는 이거보다 나아.”
“얼굴에 바람이 아니라 세월을 맞은 거 같은데?”
“……너 다 기억나는데 모른 척하고 시비 거는 거면 죽는다.”
“그레이! 애한테 무슨 말버릇이냐!”
“아빠 또 쟤만 편드네! 아이고, 그레이 억울해!”
발을 동동 구르던 그레이가 잔디밭에 드러누워 발로 허공을 팡팡 차 댔다.
“지금, 솔레아 앞에서, 그리고 가족끼리만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추태냐, 그레이. 당장 일어나!”
“아빠는 맨날 딸만 예뻐하고! 피 안 섞인 아들은 아들도 아니다?”
“너, 너! 너는 꼭 말을 해도!”
디에르고는 심각한 상황에서 굳이 익살스러운 말투로 장난을 치는 그레이가 이해되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여 혼내려던 찰나, 솔레아의 입에서 풉,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놀라 돌아보자 솔레아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키득대고 있었다.
곱게 반으로 접힌 눈 속의 보라색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빛나고 있었다.
이내 솔레아도 그레이 옆에 드러누웠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손수건으로는 코를 풀기 싫다?”
“잘한다, 야. 더 해. 우리 아빠 아주 펑펑 울려서 제국에서 제일 못생긴 공작으로 만들어 버리자.”
나란히 누운 솔레아를 부추기며 그레이가 두 팔과 다리를 허공에서 마구 휘둘렀다.
그 모습을 본 솔레아가 그레이를 똑같이 따라 하며 잔디밭을 굴러다녔다.
“딸도 아닌 애가 주는 걸로는 코 풀기 싫다?”
“아니, 아니! 아니야! 레아, 아가! 무슨 그런 말을! 아니란다!”
당황한 디에르고가 허둥지둥 말했지만 솔레아의 얼굴엔 여전히 웃음기만 가득했다.
“하하! 재밌다.”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티온도 얼른 잔디밭에 누웠다.
하지만 막상 눕고 보니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잠깐 고민하던 티온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내, 내 이름만 두 글자다?”
디에르고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긴 한숨을 쉬었다.
“네 이름 엄마가 지었다.”
“아, 앗……. 트, 특별한 것 같아서 좋아요. 아버지.”
솔레아가 큰 소리로 웃자 이번엔 헤이먼도 누웠다.
헤이먼은 이때다 싶었는지 아주 빠르게 말했다.
“엉덩이를 세게 때리셨겠다?”
“헤이먼, 아깐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미안하다.”
정령들이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심각한 상황이라 잊고 있었네!”
“우리 분홍이 때렸지?!”
“분홍이 아야 하게 했지!”
“때찌 하자!”
“꽃으로도 때리면 안 되는데!”
정령들의 말에 솔레아까지 동조했다. 이 모든 것들이 놀이처럼 느껴지는지 짓궂게 놀리는 말투였다.
“맞아! 자식은 때리면 안 돼!”
무심코 말을 뱉은 솔레아는 누워 있는 상태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아빠가 날 때렸어.
……어라? 아닌데. 나 엄청 예쁨받았던 것 같은데.
“때찌 해 버리자!”
정령들이 고기 다짐용 망치를 다시 꺼내더니 말릴 새도 없이 공작을 향해 휘둘렀다.
아무스가 말리기 직전,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공작에게 달려간 솔레아가 그를 끌어안으며 마력으로 막아 냈다.
깜짝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디에르고 공작을 향해 솔레아는 씨익 웃었다.
“솔레아?”
“아저씨 우리 아빠랑 정말 많이 닮았네요.”
“뭐?”
솔레아는 주머니에서 흰 천을 꺼내 아무렇지 않게 공작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주며 말했다.
“아빠가 저 엄청 예뻐해서 매일 꽃 따다 주고, 가끔 둘이서 정원 산책도 하고, 차도 같이 마셨어요. 엄청 바쁜데도 매일 자기 전에 잘 자라고 인사도 해 줬고…….”
조잘조잘 말하던 솔레아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근데 왜 나를 가짜라고 불렀지?”
디에르고는 솔레아의 두 손을 맞잡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다. 아가. 솔레아, 아빠, 아니…… 아저씨가 미안해. 상처를 줘서 미안하다.”
“아저씨가 잘못한 일이 아니니까 괜찮아요.”
남을 바라보듯 적당히 무심하고, 친절한 눈빛이었다.
솔레아는 바닥에 떨어진 붉은 책을 주워 들었다.
“저도 따님을 찾아볼게요. 너무 걱정 마시고 돌아가서 쉬세요, 아빠. 아, 너무 닮아서 헷갈리네. 아저씨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태연한 솔레아를 가만히 살펴보던 헤이먼이 정령들에게 조용히 물었다.
“……이달론이 죽었는데 왜 솔레아는 기억을 찾지 못하는 거야?”
“충격을 받기도 했고, 아마 임시 주인 마음에 확신이 없어서가 아닐까?”
“임시 주인은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해.”
“응. 너무 아프니까.”
“맞아, 버려지는 건 슬프니까.”
헤이먼은 솔레아의 마음을 얕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버려지는 것이 무서워서 오랜 시간 속으로만 앓아 왔다.
우는 공작을 무감각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솔레아는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고 아무스를 향해 돌아섰다.
“아무스, 이제 가자.”
그때, 디에르고 공작의 머릿속에 아무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난 짝이 웃는 걸 다시 보고 싶어. 그러니까 도와줄게. 대신 당신과 당신의 아이들이 잘해 내야 돼.’
공작은 미친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디에르고의 간절한 얼굴을 보며 노란 눈을 깜빡이던 아무스가 솔레아에게 말했다.
“우리 재밌는 놀이 할까?”
“응? 좋아! 어떤 거?”
“숨바꼭질을 하자. 저 사람들이 네 이 빨간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이 아닌 다른 모습을 보고도 널 알아보면…….”
“알아보면?”
“그들을 믿어 주기로.”
“어떻게 믿어?”
“다시 사랑할 기회를 주자.”
아무스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솔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다지 흥미 있어 보이진 않았다.
“재미없을 것 같은데…….”
작게 중얼거린 솔레아가 입술을 삐죽거리는데 여태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그레이가 옆으로 돌아눕고는 손으로 머리를 받친 뒤 시큰둥하게 말했다.
“뭐야, 너무 쉽지. 그 정도는 지나가는 개도 알아보겠다.”
발끈한 솔레아가 그레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 모습 잘 바꿔!”
“냐 묘슙 쟐 바꺼∼ 웃기고 있네. 야, 네가 아무리 모습을 바꿔 봐라. 지 가족도 못 알아보는 멍청이가 어디 있냐.”
한껏 약 올리는 말투에 열이 오른 솔레아는 ‘가족’이라는 말을 캐치하지 못했다.
“야! 너 나랑 내기해!”
“그래. 뭐 걸래? 난 돈 그런 거 관심 없다. 우리 집 돈 많아. 동생이 장사를 하거든.”
“나도 돈 그런 거 관심 없어! 그, 음, 음…….”
“내 동생을 찾아 줘.”
갑자기 목소리를 깔며 진지하게 부탁하는 그레이의 모습에 솔레아가 눈을 크게 뜨며 ‘너 동생 잃어버렸어?’라고 되물으려는데 디에르고가 끼어들었다.
“내 딸이 집을 나갔다. 애타게 찾고 있는데…… 내게 많이 화났는지 돌아오질 않는구나. 내기에 이기면 딸을…… 찾아 줬으면 하는데.”
솔레아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아저씨랑 저기 무섭게 생긴 회색 머리, 여기 얄미운 적갈색 머리, 예쁘게 생긴 저쪽 분홍 머리까지 다 할 거야! 각자 하루 안에 나 알아보기!”
“그래. 좋다.”
“그리고 내가 이기면 딸 안 찾아 줘! 영원히!”
“……그래, 그 정도는 감내해야지.”
디에르고는 애써 웃으며 답했고 헤이먼과 그레이도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티온은 마음이 조금 아야 했다.
‘나만 무섭게 생긴 회색 머리라고 했어…….’
티온의 속도 모르고 솔레아는 아무스의 등에 올라타 높이 날아올랐다.
“다들 깜짝 놀라지나 마! 한 번이라도 못 알아보면 내가 이긴 거야!”
* * *
그레이에게 제일 먼저 들켰다.
약 올리던 얼굴이 하도 재수 없어서 솔레아는 그를 제일 먼저 타깃으로 정했다.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하고 고심하던 솔레아는 그가 가장 아끼는 말인 스테파니로 변신하기로 마음먹었다.
마구간에서 얌전히 건초를 먹고 있던 스테파니를 잠깐 아무스의 공간으로 보내 놓고, 솔레아는 스테파니로 변해 가만히 마구간 안에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마복을 입은 그레이가 마구간으로 들어왔다.
“스테파니, 잘 잤어?”
부드럽게 웃는 그레이의 얼굴과 그의 입에서 나온 ‘스테파니’라는 이름에 묘한 기시감이 들어 솔레아는 잠깐 딴생각에 빠졌다.
“너 오늘 상태가 왜 이래? 아파? 몸 안 좋으면 오늘은 나가지 말고 쉴까?”
‘어? 이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인가? 기분이 이상해. 내가 아프다고 하면 온갖 난리법석을 떨면서 걱정할 것 같아. 왜지?’
솔레아는 뒷걸음질을 치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레이의 시선을 피했다.
“왜 날 안 보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스테파니. 괜찮아?”
‘저런 이름이 아니었는데. 나를 뭐라고 불렀지?’
솔레아가 혼란스러워하며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자 그레이가 품에서 당근을 꺼냈다.
“자. 스테파니, 이거 먹어.”
‘으. 생당근 싫어.’
솔레아가 관심이 없다는 듯 휙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레이의 말투가 변했다.
“서어얼마, 그 대애애애애단하신 용의 주인님께서 고작 공작가의 마구간에 숨어들 리가 없을 텐데∼”
‘그냥 죽일까.’
당근을 눈앞에서 흔들며 그레이가 긴 눈을 접어 웃었다.
“여기 보세용. 우리 스테파니가 좋아하던 생당근이에요∼”
그래도 솔레아에게서 반응이 없자 그레이가 울상을 짓는 척 오른손을 눈꼬리에 붙이며 흑흑 소리를 냈다.
“힝! 우리 귀염둥이 스테파니는 당근 좋아했는데! 변신은 잘해도 입맛이 한결같은 솔레아는 당근 먹는 척도 안 해 주네! 그레이는 슬퍼! 힝구!”
“생당근은 쓴맛 나서 싫다고!”
스테파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풍성한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나타났다.
“찾았다.”
당근을 뒤로 집어 던진 그레이가 순식간에 울타리를 뛰어넘어 마구간 안으로 들어와 솔레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야, 내가 이겼다.”
“……씨.”
솔레아가 분하다는 듯 그레이를 한껏 노려보는데, 장난칠 줄 알았던 그레이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는 솔레아를 끌어안고는 먹먹한 목소리로 말하며 이마에 뽀뽀를 쪽쪽 해 댔다.
“……역시 우리 동생 이마만큼 찰진 데가 없네.”
“……이거 놔.”
마음 한구석이 뜨끈해지는 이상한 기분에 솔레아는 도망치듯 그곳에서 사라졌다.
“스테파니는 돌려놓고 가!”
그레이의 목소리에 솔레아는 얼른 스테파니를 제자리에 갖다 두었다.
검은 공간 안에 홀로 숨어서 가슴을 다독였지만 자꾸 그리운 기분이 드는 걸 멈출 수 없었다.